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끝이 잘되길 원하시는 하나님(대하24:17-1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827 추천수:6 220.120.123.244
2020-12-27 13:38:11

끝이 잘되길 원하시는 하나님

대하24:17-19

 

2020년 오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모든 것에 끝이 옵니다. 학교 생활도 끝이 올 때가 오고, 직장 생활도 끝이 올 때가 있고, 교회생활도, 가정생활도, 인생도 마지막 끝이 올 때가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다 끝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끝이 잘 되길 원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다 끝이 잘 되길 원합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서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바람과 자신의 바람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인생 끝을 비극으로 끝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유다의 제 8대 왕 요아스도 끝이 안 좋은 인생으로 마감한 왕입니다.

어떻게 인생이 끝났는지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첫째,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적들에게 침범을 당해 처참하게 패해 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둘째,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방백들은 다 죽고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한참 일할 47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셋째, 인간관계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자신의 신하들이 반역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넷째, 명예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40년 동안 왕 노릇하였지만 죽어 왕들의 묘실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제사장인데도 불구하고 왕실 무덤에 들어갔는데(16) 그는 왕인데도 왕실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다섯째,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18).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를 버려버렸답니다.

우리는 끝이 이렇게 끝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끝내길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식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이고, 아는 사람들도 수치스럽고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요아스처럼 끝이 불행하지 않고 끝이 잘되고 명예롭고 행복하여지려면 어떻게 끝마무리를 잘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 끝마무리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직장생활도, 사회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 학교생활, 사업, 인간관계 등 모든 부분에 있어 어떻게 해야 끝이 좋은 마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잘 섬겨야 합니다.

요아스 왕은 참으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할머니가 아주 권력욕이 강한 아달랴라는 악한 여자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 가장 악한 왕비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세벨 왕비의 딸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입니다. 유다 나라 왕자와 정략결혼을 시켜 유다 나라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욕이 아주 강해 자기 남편이 죽자 다윗 가문의 왕이 될 만한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사탄의 노리개가 된 것입니다. 다윗의 후예 중에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예언해 주었는데 메시아가 태어날 혈통을 다 제거하는데 쓰임받은 사탄의 노리개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어떻게 손자들을 다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귀신들려 미치지 않고는 못 하는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유일하게 혼자 살아난 사람이 요아스 왕입니다.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부인(여호세바)이 몰래 숨겨 6년 동안 성전에서 길렀습니다. 형제가 모두 죽었는데 자신만 살아났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생명만 살아났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자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레위인도 아닌데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교육받은 행운을 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23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성전에서 교육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건강한 몸으로 7살에 왕이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7살 나이에 유다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겠습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를 받았습니까? 자신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호와가 도우셨다’는 뜻으로 요아스입니다.

그는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삶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힘겨운 삶을 산다고 하지만 우리가 이 정도 사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요아스가 왕이 되어 처음 한 것을 성경은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성전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미국에 온 청교도들이 자신의 미국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닫고 교회부터 짓고 신앙 우선순위로 살아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우리가 먼저 그 나라와 그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망가뜨렸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성물을 가져다가 바알에게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결심을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성전을 수리하기로 결심합니다(4). 직접 왕이 진두지휘하여 왕이 직접 제사장과 함께 공사 책임자를 임명하여 성전 수리를 하게 하였습니다(12). 마침내 성전을 본래대로 아름답고 튼튼하게 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드리는 번제물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제사장 여호야다가 130세에 돌아가기고(15) 자신이 실권을 잡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잘 될 때 더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할텐데 출세하니까, 성공하니까, 부자되니까, 권력을 잡으니까, 많이 배우니까, 자신의 자율적 역량권이 커지니까, 모든 것이 스스로 된 것처럼,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며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신앙을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 끝은 좋을 수가 없습니다. 쌓기는 힘들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 주셨던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임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1년 동안 유예기간을 주십니다. 한량없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시면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가 듣습니까?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아람 군대를 사용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심각한 경쟁자로 돌변합니다.

적은 무리가 왔으니 심히 큰 군대가 무너져 버립니다. 상식적 원칙이 통하지 않게 만들어 버립니다. 개연성이 없어지도록 해 버립니다. 이만하면 당연히 노후생활, 미래가 건강하고, 당연히 보장되고, 당연히 잘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들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평생 동안 도와 줄 것 같은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23) 유다 지도층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백성들도 그를 진정한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람 군대의 공격 무마하기 위해 성전 기물 바치는 비굴한 일을 합니다(왕하12:18). 그렇다고 그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신하들이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한 것입니까? 요아스왕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자신도 복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백성도, 자신의 자식도 복을 받지 못하도록 해 버린 것입니다. 끝이 안 좋게 파멸로 가는 가족 시스템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파멸의 고리를 끊어 버리지 못했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다 아버지가 23살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형제들이 모조리 죽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바알 신을 섬기다 비참하게 중병에 걸려 40세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우리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의를 구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마지막까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매이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하나님보다 귀중히 여기는 것이 다 우상입니다.

초대왕 사울 왕에게는 권력이, 인기가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쾌락이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자식들이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끝이 좋지 못한 인생으로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더욱 자식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책임져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자식들 의지하고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들면 자식들 앞에서 돈 있는 체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산 안 주면 맞아 죽고, 반만 주면 조여 죽고, 다 주면 굶어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가시킨 후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손자들은 떼강도’,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돈을 쥐고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자식들한테 무시당하고 서럽기 짝이 없어지는 거지.”, “다 쓰고 죽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유산을 놓고 자식들 간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지.” 그래서 ‘다 쓰고 죽자’고 하는 뜻으로 줄여서 ‘쓰 죽 회’를 만드는 노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내가 잘되고 자식들이 잘되는 길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이 가장 존중히 여기며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자식들도 끝까지 존경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 주어 마지막이 잘 되는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자식들 예수님 제대로 믿으면 인생 잘 됩니다. 가끔 방송에 미국에 입양된 아이들 보십시오. 미국 가서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출세하여 부모님 찾으러 한국 옵니다. 공부하는데 돈 한 푼 주지 않았는데 그냥 얼굴만 한 번 보여 주어도 고맙다고 말합니다. 유산 안 남겨 주고, 손자 손녀 안 보아주었는데 얼마나 부모를 귀중히 여깁니까? 예수님만 똑바로 잘 믿으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보면 끝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를 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빈국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교회는 나오지 못하지만 꼭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하십니다. 올해 파키스탄 만만만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건축하는데 많은 헌금을 하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노년에 선교 가려고 모아놓았던 것을 헌금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 많이 나오는 큰 교회에서 장로님으로 섬기다 조기 은퇴하시고 작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노년을 하나님 섬김을 최우선으로 살아가시는 장노님 부부를 보면 많은 교훈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노년이 되면 쉬려고 합니다. 노욕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새벽기도, 수요예배, 주일 예배 빠짐없이 나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헌금으로 섬깁니다. 교회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나와 섬기는 모습을 보고 저도 은퇴해도 끝까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교회와 성도를 그렇게 사랑해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 인생의 끝을 가장 좋게 마감하는 비결은 끝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비결입니다. 자식들에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하나님밖에 몰라라는 말을 들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마지막에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믿고 사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이 사실을 믿고 살면 이런 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2. 우리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배은망덕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끝이 좋아지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가 좋지 않으면 끝이 안 좋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생의 전환점에서 어떤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은 갚아야 할 '평생의 은혜'입니다. '안면 바꾸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배은망덕한 사람은 끝이 좋지 않습니다. 옛말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아스 왕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요아스 왕이 부상했을 때 왜 가장 가까이 있는 신하들을 그를 도와 고쳐주지 않고 침대에서 죽여 버렸을까요? 왜 왕이 신하들에게 배신당하고 끝이 비참하게 끝나버렸을까요?

25절을 다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그 이유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라고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은인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말씀도 부담이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아달랴의 눈을 피해 성전에 6년 동안 숨겨 교육하며 보호해 주었는데 하나님을 똑바로 섬기라는 말을 했다고 죽여 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살얼음판을 걷으며 수많은 오해를 받으며 양육하며 요아스가 7살이 되자 제사장 여호야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혁명에서 실패하면 모두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요아스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혁명을 일으켜 그를 왕으로 세워주었는데 자신을 자신되게 만든 인생의 은인을 배신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거슬린다고,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고, 자신을 몰라준다고,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자기 멋대로 살지 못 하게 한다고 죽여버린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니까 멀쩡한 인간이 마귀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날 배신이 미덕이고, 배신이 살길이라고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이것만큼 나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지자가 잘못을 지적해도 왕이 돌아서지 않으니까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나섭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용감하게 백성 앞에서 말합니다.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이 말을 듣고 요아스가 어떻게 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왕의 명령에 따라 무리가 함께 꾀어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은혜가 떨어지지까 말씀도 부담으로 들리게 되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배은망덕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야다 때문에 생명도 구원받았고 왕도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큰 은혜를 받고도 그의 아들이 이방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충고한다고 은인의 아들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거룩한 성전 뜰 안에서 말입니다.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드라는 사람은 "배은망덕은, 어떤 풍토에서도 자라는 잡초로서, 처음에는 너무나도 빨리 자라지만, 조만간에 시들어 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끝이 비참해진 것도 스승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끝이 비참하게 된데도 바로 은인인 다윗을 원수로 삼고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도 끝이 안 좋은 대부분은 인간관계 때문입니다. 조금만 서운한 일을 당하면 은혜를 잊어버리고 은혜를 악으로 갚습니다. 목회자와 원수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기분 나쁜 설교를 들으면 그동안 말씀으로 기도로 양육해 주었던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섭섭해하고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생활도 결국 끝이 좋지 않게 됩니다.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끝이 좋아지려면 인간관계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끝까지 그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배은망덕한 사람은 끝이 좋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면 끝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3. 우리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좋은 멘토의 말씀 코치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끝이 안 좋게 끝나는 이유는 끝이 안 좋은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좋은 멘토가 중요합니다. 가까이 지내며 따라가는 친구가 중요합니다. 교회 생활도 안 좋게 끝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친구를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 태도를 가집니다. 교회에서도 늘 비난거리만 찾습니다. 특정 정부를 적대시하는 언론과 같이 이렇게 해도 비난거리 저렇게 해도 비난거리를 찾아 보도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언론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신앙인도 비슷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런 사람 만나 1-2년 같이 신앙생활하면 아주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열정도 다 식어져 버리고 예배를 일주일에 세 번 나오던 사람이 한 달에 한 번 나오다 결국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회사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입니다.

왜 요아스 왕의 인생의 끝이 비극으로 끝났겠습니까? 끝이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좋은 멘토를 잃었기 때문이고 좋은 멘토의 코칭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 때문에 살았고, 여호야다를 멘토로 모시고 정치할 때는 좋은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리가 다윗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선을 행한 사람, 하나님께 선을 행한 사람,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하여 분명한 기준, 누가 무어라 해도 사심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한 사람입니다. 혁명을 일으켜 자신이 대권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살된 다윗의 혈통을 왕으로 세우며 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헌금을 거두었는데 많이 거두었습니다. 남았습니다. 그러면 사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의 아들처럼 하지 않습니다. 나쁜 제사장들처럼 사욕을 챙기지 않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130세까지 살고 왕의 묘실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왕이 이런 멘토를 따를 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고 자신의 멘토였던 여호야다 대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왕에게 잘못을 말합니다. 그렇게 가면 끝이 안 좋다고 말합니다. 그 스가랴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왜 듣지 않습니까? 은혜가 떨어지니까 자기를 살리는 말씀이 자기의 자존심을 상하는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니다. 자신을 정죄하는 말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체면을 손상시키고 모독하고 정죄하는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나도 알 만큼 안다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40대 중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39년 동안 왕노릇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섭정에서 벗어나 나도 내 길 가겠다는 것입니다. 독립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데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받는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자신이 은혜를 받았던 성전에서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분노 조절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상처로 인하여 성격장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목과 인정에 목말라 있었던 것같습니다. 이것이 아킬레스건이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 형제처럼 지낸 선지자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여 죽여버립니다. 멘토도 중요하지만 그 멘토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 멘토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그 멘토를 통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 멘토를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말을 듣습니까?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유다 방백들이 왕에게 절하며 아부합니다. 이제 왕다운 왕처럼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는 자신이 왕이었지만 실제적으로 대제사장이 왕같은 역할을 했는데 이제 명실공히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흥분되었을 것입니다. 우쭐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황홀했을 것입니다. 이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이때가 사탄의 시험과 유혹 올무에 걸리기 쉬운 때입니다. 자신을 책망하는 사람의 말보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단호하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며 거부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를 보내어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듣지도 않았습니다. 금방 마음이 흔들립니다. 금방 변질됩니다. 소금이 바닷물에는 금방 녹아 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 건짐받았기 때문에 금방 세속화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과 어울리면 그 끝은 좋을 수가 없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신앙생활 잘 하다가도 대학에 가서 그런 친구 하나 사귀면 금방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말씀에 인도받는 사람,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세상 흔들려도 사람과 하나님, 자신의 일에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사명 붙들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의 멘토를 받는다면 인생의 결말은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끝이 좋은 길로 늘 선택하며 살아가야 결국 끝이 좋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언 27장 17절)”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누구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풀러 신학대학의 리더십 분야 교수인 J. 로버트 클린턴 박사는 광범위한 연구 결과 리더들의 70% 이상이 결말이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성경과 교회사에 등장하는 사람 900명을 연구해 보았답니다. 그런데 900명 중에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된 사람 100명 정도였고, 또 그중에서 인생의 결승점까지 멋지게 통과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답니다. 특히 성경 속에 인생의 끝부분까지 기록된 사람은 불과 49명뿐이었답니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여러 목사를 직접 지켜보며 인터뷰했는데 놀랍게도 90% 이상이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스캔들로 인해 실족하였고, 교회 안의 심한 분열과 덕스럽지 못한 은퇴로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클린턴 교수는 끝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을 한 가지로 지적하는데 바로 높이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는 특히 성경의 다니엘을 가리켜 잘 끝내신 분의 모범이라고 말합니다. 1장에 나온 청소년 다니엘이나 6장에 나온 80대의 노인 다니엘의 모습은 변함없이 멋진 삶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도 과정도 끝도 좋은 것은 다니엘의 삶이 어떤 상황을 만나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높이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라와 성전과 부모를 잃은 상황에서도, 얕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정치 세계의 현실 속에서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높이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 땅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좋은 친구 셋이 다니엘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이 좋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은 시작과 끝을 비교해 볼 때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시작도 나쁘고 끝도 나쁜 사람입니다. 셋째는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나쁜 사람입니다. 넷째는 시작은 나빴는데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결정됩니다. 시작도 좋고 끝도 좋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잘못되었더라고 끝을 잘 맺어야 합니다. 끝이 좋아야 시작도 빛이 납니다. 끝이 좋아야 과정도 교훈이 됩니다. 끝이 좋아야 공로도 인정이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끝이 좋아야 합니다. 정치도, 사업도, 연애도, 공부도, 대인관계도, 만남도, 신앙생활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끝이 좋아야 명품이 됩니다. 좋은 소설은 결말이 아름답습니다. 좋은 물건은 끝마무리가 깔끔하고, 좋은 회사는 끝까지 책임지며, 좋은 경기는 끝이 좋습니다. 좋은 사랑은 끝까지 아름답고, 끝이 좋아야 명품, 명인, 명가가 됩니다. 결혼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끝이 좋아지려면

1. 우리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잘 섬겨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배은망덕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좋은 멘토의 말씀 코치를 받아야 합니다.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