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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2)(눅2:25-3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634 추천수:3 220.120.123.244
2019-12-15 14:53:36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2)

눅2:25-35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골 교회에 다닌 성도님들은 어릴 때 성탄절을 기다렸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 가서 한 달 전부터 성탄 트리를 만들고, 성극 연습을 하며, 각종 발표회 준비를 합니다. 성탄절 새벽에는 새벽송 조를 나누면 누구와 같이 같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비를 뽑습니다. 친한 친구와 같이 가게 되면 기뻐하며 손에 불을 들고 눈을 밟으며 시골 성도님의 집들을 방문합니다. 여기저기에서 개 짖는 소리 들리고(아니 요즈음은 개 짖는 소리라고 하면 큰일 날 것같습니다.) -반려견 노래하는 소리들으며 대문 앞에 가서 천사가 된 기분으로 “기쁘다 구주오셨네” 찬양을 목청껏 부릅니다. 그러면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이 일 년에 한 차례 과자를 많이 준비했다고 선물로 주면 자루에 담아 옵니다. 과자가 궁한 시대에 그 과자를 송구영신 예배 때까지 교회에서 먹으며 교회에서 즐겁게 보낸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 성도님들 성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까? 요즈음은 그런 기대와 소망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싶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집도 너무 좋고, 먹을 것도 너무 풍요롭고, 즐길 것도 너무 많아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님의 초림을 기다린 시므온의 삶에 대하여 소개해 주시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시므온의 자세를 통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면 살 것인가를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1. 시므온이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약속을 믿었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하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시므온을 소개할 때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로운 사람, 둘째, 경건한 사람, 셋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넷째 성령이 그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오늘 제가 먼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이스라엘의 구원 소망을 가리킵니다(사 40:1;49:13;51:3;57:18;61:2). 이 구원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서 성취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후대의 랍비들은 메시아를 ‘위로자’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시므온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방 세력의 압제 가운데 메시야를 대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 탄생은 민족적인 소망에 대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매일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400년 동안 선지자도 계시도 없자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세속에 물든 생활을 했습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무력으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권력과 야합하며 권력욕을 채우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분명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만민의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그는 메시아를 기다렸을까요? 그 답이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그는 특별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죽기 전에 메시아를 꼭 볼 것이다는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할 것이라고 말씀을 통해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롯의 사위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다고 하는데 농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 시대 사람처럼 믿지 않고 쾌락을 즐기며 조롱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믿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한 말씀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행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은 25년 만에 성취가 되었습니다. 노아에게 홍수를 내리겠다는 약속은 120년 만에 성취되었습니다. 에굽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약속은 430년 만에 성취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은 70년 만에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유혹, 고난이 다가 온다고 해도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셧씁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0-11)”믿습니까?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살전5:2)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한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초림하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모두 191개나 나온다고 합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재림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께서 직접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요14:3; 마24:30; 마26:64).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마 16:27) 공회 앞에서 선언하셨고(마 26:64)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요14:1-3)

어떻게 재림하실 것인가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구약에서도 예언해 주셨습니다(욥 19:25, 26; 단 7:13, 14; 슥14:4; 말 3:1-2) 특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300회 이상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림에 대한 기록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 전체 구절 가운데 25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재림에 관한 언급이 없는 책은 요한2서, 3서, 빌레몬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 뿐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면 신약의 주제는 영광 중에 재림하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약속 있는 예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흐르고 있는 메시아사상은 신약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와서 재림하실 예수님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신천신지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재림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으로 우리에게 기대와 환희, 기쁨과 위로, 소망을 줍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고 했습니다. 성경을 마감하면서 계시록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젠가 재림하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2. 시므온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령의 사람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았습니까?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의롭고’로 번역된 ‘디카이오스’는 ‘하나님과 사람의 법을 준수하는’, ‘정직한’을 의미합니다. 시므온이 이웃에게 의를 실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서 사람들은 저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하고 불의가 팽배한 시대였습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아주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시대에는 말씀이 밥 먹여 주냐고 생각하며 양심도, 절대적인 윤리도 없습니다.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이익에 맞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시므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경건하였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여’라는 말음 ‘종교적 의무에 투철한’, ‘헌신된’ 등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주의하고 신중하고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도 없고 선지자도 없는 때였습니다. 그 결과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제 좋은 대로 해석하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범사에 주님의 뜻을 헤아려 따르고 죄와 불의를 두려워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노아시대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비가 위축되고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하지만 향락산업은 날로 날로 번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너 명만 마셔도 유흥비가 100만원을 넘는 단란 주점은 평일 밤에도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흥청망청 성황이라고 합니다. 유흥·향락산업, 밤낮이 따로 없고 불황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동성애를 죄라고 말을 못하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육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기도와 예배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공교육을 통해 하나님 없고 인간은 진화되었다고 세뇌되고 있습니다. 단이 인간의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제 또래 중에 신앙인이 5%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교에 가면 한 반에 한 두 명이 신앙인입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이 힘들겠습니까? 세상은 예배가 필요 없고, 헌신과 봉사는 낭비라고 선전합니다. 세상 돈이면 최고이고 그저 즐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학교에서 기도로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공영 방송에서 종교 용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잘 못이라고 말하면 출연도 못하게 합니다.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트리에서 십자가를 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달면 특정 종교를 상징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아동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 아동들의 권리를 과잉 신장시키고 있습니다. 성문란을 조장하여 경건한 기독교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와 자유로운 성을 주장하며 낙태를 합법화를 제도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면 반 인권적이라는 것입니다. 딸이 아버지 이 여자를 사랑하니 결혼하게 해달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조장하고 있습니다. 광고와 텔레비전 신문, 영화 산업, 인터넷을 통해 성적 쾌락이 인생의 최고 즐거움이라고 선전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고 미디어를 통해 반 기독교적 가치를 확상시키고 있습니다.

과학주의적 무신론, 철학적 무신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광고를 합니다. "나쁜 소식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좋은 소식은 우리가 신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라고 광고를 합니다.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고 신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망상의 산물이고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의롭게 경건하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초림을 기다리며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던 시므온을 보십시오. 25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그의 위에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이 그 위에 거룩하게, 또는 거룩한 상태로 머물러 계셨다는 말입니다. 계속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시므온이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26절에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27절에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령님과 함께 살며,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령 안에서 살았습니다. 항상 성령 안에 살며 교제하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즉각 반응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앞에 정관사(토)가 나와 있는데 그의 위에 머물러 있던 그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침이라는 말은 ‘카이 엔’을 번역한 말로 ‘그리고 때에’라는 말입니다. 시므온의 발걸음과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부모님의 발걸음을 주장하사 극적으로 만나게 하신 성령님의 절묘한 인도하심을 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당시 성전이 작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에 간다고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두 분이 극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리라는 말씀을 성취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유혹 많고 고난과 환란 많은 세상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실패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돈 충만해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지식 충만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쾌락 충만으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의와 평강과 희락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성령충만을 받아야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금방 실증이 나고, 이해타산이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빼앗알 갈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성령을 받아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을 받아야 각종 은사로 힘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도움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 구제의 은사를 주어 주어진 사명을 넉넉하게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성령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을 끝까지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라디아서 5:5)”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인격의 열매가 주정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 집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 밑에서 낳아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눅1:15, 41, 6) 담대하게 천국을 전하고 그 악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보십시오.(사도행전 6:5절 행7:55)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강력한 영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를 꾸짖으니까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행13:9)

성령 충만하면 바른 길로 인도를 받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 충만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자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1:24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재림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려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요 7:39)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합니다.(행2:38-39)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눅11:13).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행 5:32).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3. 메시아를 기다렸던 시므온이 메시아를 찬양하며 증거하였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메시아를 찬양하며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드디어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 무엇을 합니까?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송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성경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라고 말씀합니다.

29절부터 32절까지를 일반적으로 시므온의 고별 노래라고 말합니다. 이 찬양은 중세 로마의 가톨릭에서는 임종 찬송으로 불렸답니다. 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찬양하며 바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찬양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제 메시아를 보았으니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매우 늙었으나 지금까지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명으로 살았는데 이제 그 사명이 완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셨으므로 아무런 미련없이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메시아는 이렇게 강력한 힘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 그 자체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본 아기 예수님이 약속의 메시아이심을 찬양을 통해 선포합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었지만 성령 충만하기 전까지는 비겁하고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담대하게 ‘예수가 메시아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말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원을 만민 앞에 예비하신 분이십니다. 구원은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는 당시 편협한 선민의식과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그로 인한 구원이 자기 자신 혹은 유대 민족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미칠 것을 찬양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노인 시므온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 인류에게 미칠 것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3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방인을 비추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이 지옥의 땔감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될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구원의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제 메시아의 탄생으로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세계만방을 향하여 구원의 빛이 비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는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적 수단임과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육신적 부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3절을 보세요. 시므온의 말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미 천사의 수태고지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그 아기에 대한 예언을 들었으나 그들의 마음 한쪽 구석에는 의구심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 요셉은 이러한 마음이 더 강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천사들, 목자들, 동방 박사들, 엘리사뱃, 사가랴 그리고 지금 시므온에게 들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이 때 시므온을 그 놀란 부모에게 무엇을 합니까?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축복 기도를 해 줍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폐하거나 흥하게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셨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비참하게 넘어질 것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은 은혜로 인해 일어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방을 받았고 결국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메시아 되심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표적이지만, 메시아를 믿지 않고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멸망’ 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재림할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룰 메시아를 보며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에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성향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를 진심으로 섬기는 자들과 그를 적대하는 지들 사이에 분명한 구별이 생기도록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겨져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라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사역으로 인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과 염소를 명확하게 구별시킵니다. 재림 때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재림을 확신하고 이 땅에서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 과장되거나 수정된 순교 전설이나 순교 사화가 아니라 초대교회 순교자들에게 일어난 재판 과정에 대한 보고를 기초로 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ad 120-372년 사이 약 200년 에 걸쳐 일어난 순교자들의 실제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소년, 소녀, 90넘은 노인, 귀족과 자유인과 노예, 학자와 농부와 상인과 군인, 감독과 장로 같은 성직자에서부터 세례 준비자와 순교의 현장에서 처음 신앙을 가진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들 모두 순교의 현장에서 핍박과 유혹에 타협하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가족을 잃지 않고, 재산을 잃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순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로 "심포로사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가 나옵니다. 남편이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의 호민관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동생과 함께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황제가 불러 심포로사를 심문합니다. "네 아들들과 함께 전능한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이 네 아들들과 함께 제물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그 때 그녀는 황제에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아들들과 함께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이런 좋은 일(순교)이 어디로부터 나에게 오게 될까요?" 오히려 순교하여 천국 가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황제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나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든지 아니면 참혹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든지 하라." 저와 우리 성도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한마디 하면 자신과 자신의 일곱 자녀들은 살아납니다. 이때 심포로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죽음의 두려움이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죽인 나의 남편 게툴리우스와 함께 안식하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뺨을 맞고 머리카락을 매달림을 당하고 그녀의 목에 큰 돌을 달아 강물에 빠뜨림을 당하였습니다. 황제는 다시 일곱 아들을 모두 한꺼번에 자기 앞으로 불러 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전혀 황제의 협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교회의 감독이었던 포카스 같은 사람은 "나는 하늘과 땅에 한 분이신 나의 하나님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경배할 수 없다."고 우상숭배를 거절하자 석회 굽는 큰 솥 속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복음을 받은 이그나시우스 같은 사람은 잔인하게 매를 맞고, 몸은 칼로 난도질을 당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하지 않자 기름 적신 나무에 묶어서 불을 태웠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순교할 만큼 강력한 믿음을 주었겠습니까? 재림 신앙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죽으면 더 좋은 천국이 있다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상급에 대한 기대입니다. 어차피 한 번 가는 죽음의 길인데 순교하면 하늘나라에 순교자의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삶의 풍요롭다 보니 신앙인도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고 하늘나라 상급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천국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이 있습니다.

마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12절에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선지자를 영접한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영접한 자는 의인의 상을 받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들도 역시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10: 41-42)"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 16:27에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금세에 있어 백배를 주시고 내세에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막10:30; 마 19:29; 눅 18:30).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우리가 이해는 못하지만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등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며 재림 신앙을 가지고 늘 찬양하고 메시아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약속을 믿었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하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시므온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령의 사람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시므온이 메시아를 찬양하며 증거하였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메시아를 찬양하며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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