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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3)(누가복음2:8-2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173 추천수:6 220.120.123.244
2019-12-22 14:52:17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3)

누가복음2:8-20

 

성탄절을 맞이하여 누가복음에 기록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나에 대하여 두 번째는 시므온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메시아를 기다렸던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은 양떼를 치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적으로 천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양과 함께 뒹굴며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당시 사회에서 배척받는 신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창기나 세리 못지않게 유대 사회에서 천민 취급을 받던 계층들이었습니다. 당시 권력을 가진 헤롯왕가의 통치자들은 웅장한 건물을 세우고 화려한 궁정생활을 즐겼습니다. 헤롯대왕은 10명의 부인을 두고 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왕가에 속한 사람들은 자산계층에 속해 화려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대상인, 토지 소유자, 세금 청부업자, 대금업자 등은 화려한 잔치를 즐겼으며 종과 하녀를 고용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많이 아는 지식인도 아니었습니다. 별로 아는 것 없이 남의 양을 기르며 메시아에 대한 소박한 꿈을 가지고 밤새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평 원망하지 않고 모두가 잠을 자는 밤이 되었지만 맹수들로부터 주인의 양을 잘 지키기 위해 깨어 있었습니다. 자기의 양이 아니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 산에 가서 기도하는데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두려운데 영광의 빛이 비추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렇게 두렵게 떨고 있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천사의 소리입니다.

무슨 소리가 들려옵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보라라고 말씀합니다. 놀랍고 새로운 엄청난 것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것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메가톤 급 소식입니다. 북한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큰 일을 벌인다고 하는데 그런 소식이 아닙니다. 나쁜 소식이 아니라 좋은 소식,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입니다. 유대인에게만 미칠 소식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칠 메가톤급 소식입니다. 얼마나 기대가 되었겠습니까? “부자가 될까? 아니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될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말한다면 무슨 기대를 할 것같습니까? 복권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복권이 당첨 번호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질병 치유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완치의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 합격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합격의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은 ‘유앙겔리조마이’였습니다. 복음입니다.

 

그들에게 메가톤급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복음은 무엇입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번역에서는 생략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하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소식이 왜 메가톤 급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소테르’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말로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된 호칭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질병으로부터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자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자는 그리스도 주라는 말입니다.(크리스토스 퀴리오스) 그리스도라는 말을 기름붓다, 기름을 바르다는 뜻입니다. 바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세 가지 칭호를 가진 분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사해주실 구원자로, 세상의 무질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주권을 시행할 메시아로, 모든 세대의 영원한 주인으로 예수님을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오셨다는 것입니까? 바로 오늘입니다.

어디에 오셨다는 것입니까? 다윗의 동네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구주는 왕실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유에 뉘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보에 싸여 있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쉽고도 명확하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목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말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그대로 100% 믿었다는 말입니다.

 

1.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약속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 메시아를 기다렸던 목자들처럼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구주라로 믿어야 합니다. 구주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지옥 갈 인생들을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만드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누구의 구세주입니까?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택함받은 우리들의 구세주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자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자로, 우리 왕 영원히 함께 하실 자로, 우리를 진정 위로할 자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죄의 올무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자로 믿어야 합니다. 가난했던 목자들은 이 말을 듣고 100%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인 헤롯은 믿지 않았습니다. 지식이 많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 배움이 많은 사람들이 잘 믿지 않습니다.

뉴스위크지에서 "종교와 경제는 반비례"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 세기에 걸쳐 100여 개국의 경제를 분석한 결과, 한 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올라가면 종교인의 수는 줄어들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선 가난할 때와 달리 청년층의 38%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요해지면 신앙을 버리는 비율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에 있던 유럽 사회가 부가 축적된 지금은 젊은이 56%가 무종교이고, 16%가 기독교인라고 하지만 실제적인 신앙인은 5%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70-80%가 교회에 나가던 유럽 사람들이 풍요로워지니까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을 정말로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조금 세상적인 지식이 쌓이면 믿지 않습니다. 어릴 때 교회를 잘 다니던 아이들도 대학에 들어가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등산하다 옹달샘을 발견하고 물을 먹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 샘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의 진위를 따지지 않고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가니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라고 하면 잘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예인교회에서 몇몇 기독 연예인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였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 때 한 분이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아니 세상에 믿을게 따로 있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이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마태복음 1장에 써놓고 믿으라면 어떻게 2장으로 넘어가겠느냐고"라고 자꾸 물고 늘어졌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당시 교인이었던 구봉서 장로께서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하도 답답하니까 그 사람을 향하여 "야! 지 서방이 믿는다는데 왜 니가 난리야?"라고 했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지식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의 존재를 믿는다면 생각은 달라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계시다면 처녀에게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세포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진화론은 믿으면서, 작은 힘의 씨앗이 빅뱅에 의해 거대한 우주가 만들어 졌다고 빅뱅설은 믿으면서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미신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창조설은 신앙에 근거한 것이고 진화론은 가설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과학의 문제이기 보다는 기본 신념, 전제, 믿음의 문제입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빛은 보이지 않는 파장이지만 빛은 보이는 사물을 통하여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전파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파수만 맞추면 텔레비전 화면에 그 존재를 영상으로 보여 주고, 스마트폰 속에서 음성으로 드러내 줍니다. 만유인력이 보이지 않지만 떨어지는 물건을 보면 그 힘을 알려줍니다. 존재란 현상에 의해 증명되지만 꼭 보이는 것에 의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압니다.(히11:3)"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라는 주파수로 맞추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분명합니다. 천국과 지옥도 분명히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에 갑니다.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영적인 법칙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이릅니다.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네가 저 지렁이를 욕심내는 거지?" 그 물고기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되어지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적, 인식적, 과학적 방법론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검증되지 못하였을 뿐이지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못했다고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얀 눈이 쌓인 산에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한 사람이 호랑이가 이 산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호랑이를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찾아보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산적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비물질, 초자연적, 초월적 존재와 같은 초과학적 진실은 '현재의 이성', '현재의 지식', '현재의 과학적 진실', '현재의 경험적 방법론'로 설명이 불가능할 따름입니다.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 자연 현상을 뛰어넘어 가능해지면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법칙(우가야 마사히로)>에 "리틀우드의 법칙"이 나옵니다. 캠임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수학자 존 이든저 리틀우드가 주장한 법칙입니다. 그는 '기적'이 수학적으로는 1백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누구에게나 한 달에 한 번꼴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였는데 증명과정은 간단합니다. 그는 사람이 어떤 소리를 듣거나 신문을 읽는 등 보통 사람이 행동하거나 경험하는 사건이 매 1초마다 하나씩 일어난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 8시간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전제했습니다. 이런 전제들로부터 한 사람이 매일 경험하는 사건의 수는 약 3만 건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결국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경험하는 사건은 약 100만 건이 됩니다. 기적이 백만 건의 사건 당 한 번씩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앞의 전제에 대입하면 결국 사람은 매달 한 번씩 기적을 경험하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기적은 뜻밖에도 일상적인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어느날 믿는대로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17:20)".

 

2.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메시아에게 경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말을 믿고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그 후 어떻게 했습니까?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갔습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양을 돌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이지만 날이 새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각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삶이 바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였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믿고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처럼 예배당에 나와 예수님 만나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갔다는 말입니다. 헤롯처럼 메시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왕권이 위태롭다고 사람들을 보내어 아이들을 처형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처럼 자신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의 탄생 징조를 알고 헤롯왕에게 그 사실을 알려 아이들을 죽음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겸손히 경배드렸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다 메시아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삶고 평생 예배하는 삶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까?

에베소서1장 3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가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까? 예배드리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는 구주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자와 예배드리지 않는 자로 구별됩니다.

자기 교만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에,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경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시간 낭비, 물질 낭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손해입니다. 실제로 조사해 보니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오히려 성적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학과 제니퍼 그랜빌 교수의 연구 결과 교회에 다니는 10대들의 성적이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미국학교 7학년부터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서 매주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은 중퇴 비율이 낮았다고 합니다. 종교 예배에 참석하는 10대들은 전혀 참석하지 않은 10대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겠습니까? 예배드리지 않고 세상 쾌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겠습니까?

정신위생계에 있어서 세계적인 학자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에서 정신적 요소가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네 가지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첫째가 일, 둘째가 놀이, 셋째가 사랑, 넷째가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네 요소 중에 예배가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정신안정의 절대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라는 말입니다. 수면제 먹고 신정 안정제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건강하게 살겠습니까? 예배 드리지 않고 산으로 들로 건강을 찾아 떠나고 쉬겠다고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겠습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등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사망위험이 약 20%가량 낮다고 합니다. 미국 뉴욕 예시바대학 연구팀은 9만 2,395명의 50∼79세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가족이나 친구 등의 사회적 지지가 강하고 담배를 덜 피우고 술을 마시지 않는 등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있어 사망위험이 낮을 수 있지만 이런 요인 말고도 신앙생활 자체가 사망 위험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영국 'The Times'의 보도에 의하면 최소 한 매주 한 차례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조지 W. 컴스톡 박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에 비해, 전혀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치명적인 심장병에 걸릴 위험률이 거의 두 배나 높은 반면,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신앙인이 주요 질병의 낮은 발병률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건강에 상당히 유익한 투자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고 경제적으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18세기 말 경 프랑스 혁명 후 무신론자들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10일 휴일제가 실시된 적 이 있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제도가 국가 산업발전을 위한다고 하였으나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산업재해가 급증하고 생산량도 40%나 감소되어 프랑스는 다시 7일 휴일제로 환원하였습니다. 소련에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무신론자 레닌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하루 분의 일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8일 휴일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생산성은 그 전보다 30% 감소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새벽에 남침을 시도하여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보십시오. 사망한 김일성의 외가 쪽이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김일성이 다녔다는 숭실중학교는 기독교학교였습니다. 김일성 외가 쪽의 외삼촌들이 기독교 목사가 있었습니다. 김일성 어머니 이름이 강반석입니다. 반석은 베드로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우상화시켰습니다. 기독교의 시스템을 도용하여 월요강연회 수요학습회 그리고 토요생활총화와 같은 의식을 치릅니다. 토요생활총화 때에는 수령님의 교시록 이라든지 김정일의 말씀록을 가지고 일주일간의 생활을 반성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큐티와 같은 것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찬양 가는 성경의 찬송가와 비슷한 멜로디와 비슷한 형식으로 불러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시스템을 모방한 사이비종교국가로 전략시켜 놓았습니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나라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우리는 예배를 통해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 힘을 받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우리는 예배를 통해 존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7)"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용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2-3)"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고 영혼이 소생함을 누립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와 부귀영화를 받았습니다.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셔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치고 구원 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6장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았을 때 3백 명으로서 모래알 같은 미디안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대상21:22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니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쳤습니다.

대상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픈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예배시간에 나와 삶에 지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면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재림하실 메시아는 기다리는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아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3.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메시아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말을 믿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고 그 후 무엇을 합니까?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였습니다.

무엇을 전합니까?

첫째,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아기에게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구주, 그리스도,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천국 천사들의 노래 소리도 전했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노래 소리는 무엇입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몇 명의 목동을 위한 하나님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진 것입니다.

무엇을 전합니까?

 

둘째,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희생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 안 하시고 "(겔33:1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딤전2:4) 죄인 하나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하시는데 "(눅15:7,10)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일을 다 이루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세상에 평화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사람들 중에는 평화가 됩니다. 구약의 '샬롬'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살롬이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탄생이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됩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버린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평화를 주었습니다.(롬 5:10)

 

예수님의 오심을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원수였으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둘이 서로 화목하게 되었고(엡2:13-15)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 예수님은 시기와 질투, 다툼과 분쟁이 있는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진정한 죄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죽음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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