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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2) 화목의 능력(골1:19-2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230 추천수:5 112.168.96.218
2017-10-22 14:42:48

 

보혈의 능력(2) 화목의 능력

골로새서1:19-23

 

옛날 시골 집에 가보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은 집이 많이 있었습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한자성어인데 우리 조상들은 집안의 화목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화목을 중요시하는 것은 옛날 선조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수 이효리씨는 이상순씨와 결혼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의외로 생각했는데 이상순씨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이상순씨의 "화목한 가정 분위기"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프리미엄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직장인들의 인생의 최종목표를 조사했답니다. 1위가 "화목한 가정(28.3%)"이었답니다. 어린이와 중학생을 대상으로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물었답니다. 첫째가 '화목한 가정(43.6%)'이었답니다. 서울 청소년 상담지원 센터는 서울시 19개 중고교 재학생 및 17개 대안학교, 청소년쉼터 이용 청소년 1,553명을 대상으로 생활실태 및 의식조사를 했답니다. 응답자의 70% 이상(73.1%)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고 했답니다.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9.7%가 "가정의 화목"을 행복 조건 제1순위로 꼽았답니다. 오늘날도 남녀노소가 그만큼 가정화목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이란 한자성어처럼 정말로 화목하면 만사가 잘 되겠습니까?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사람의 수명조차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부모가 싸우고 이혼하면 아이들의 수명이 4년 단축되고 전염성 질병에 저항하는 면역력이 약화된다고 합니다. 부부의 관계가 아이 성격에 50% 이상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이 건강에 좋은 이유 6가지를 미국 허핑턴포스트가 소개했습니다. 가족이 화목하게 식사 함께 하면 언어능력도 발달하고, 형제자매가 있으면 더 행복해지며, 아버지의 관심에 성적이 쑥 올라가고, 금실 좋은 부부가 병에서 빨리 회복되고, 어머니의 사랑이 아이의 면역력을 증가시킨다고 합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제임스 콜먼 교수는 '콜먼의 교육기회 균등에 대한 연구'(콜먼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학생 60만 명과 교사 6만 명, 그리고 이들이 속한 학교 4000개를 광범위하고 폭넓게 연구한 결과 교육정책이나 학교시설· 교육과정· 교사의 질 등 소위 '학교 효과'보다 '학생의 가정 환경'과 '친한 친구의 가정 환경' 이 두 요소가 학업성취도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분석했습니다. 가족 간 끈끈한 정서적 유대감이 있는 화목한 가정이 아이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줘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입니다. 아이들 공부 잘 하게 하려면 화목한 가정을 만들라는 말입니다. 부부가 행복하면 병도 빨리 낫는답니다.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한 부부는 원만한 관계의 부부보다 질병의 회복 속도가 40% 더딘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가화만사성이 빈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바르게 잘 살려면 화목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화목해야 하고,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화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화목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행복의 방해꾼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삶에서 추방하려고 합니다. 1882년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주는 전적으로 자연적이고 우연이기 때문에 삶에는 어떤 목적도 있을 수 없고 말합니다. 각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의미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궁극적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신이 없으니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고 말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간섭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행복의 방해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방하고 걱정 없이 인생을 즐기면 행복할까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세상이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행복한 척할 뿐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어금니 아빠'의 진상을 보았습니다. 꾸며낸 행복의 숨겨진 이면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없이 즐기는 음란행위하다 여중생 깨어나 저항하니 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없는 인간이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추방하면 죽음을 불안과 공포, 무의미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유익과 편리와 쾌락을 끝없이 추구해 보지만 뒤돌아보면 공허한 것입니다. 예외 없이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행복의 법칙입니다. 송창식씨가 노래하지 않아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고래사냥을 해보아도 남는 것은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알려 주고 있지 않아요.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지 않아요. 고기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뻥 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끝자락엔 공허와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게 만드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해 주었습니까?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루었다는 것은 헬라어 문법으로 부정과거 분사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신 평화가 단번에 되어진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화목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명료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1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1 4:10”

하나님과 화목하는데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끼어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이라고 끼어들어가는데 그것은 다 사기에 불과합니다.

오직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보혈만 하나님과 화해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은 이 진리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에 거하고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고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하나님과 원수"(롬5:10), "진노의 자녀"(엡2:3), "사형에 해당하는 자들"(롬1:32), "지옥자식"(마23:15)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내 죄 때 문에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보혈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화목은 쌍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미 화목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반목하고, 불화한 상태를 개선해 버렸습니다. 저주와 형벌, 지옥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영적 법칙입니다. 논증이나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자연과학의 법칙이 있습니다. 인간이 그 법칙을 발견했을 때나 발견하지 못했을 때나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만유인력의 법칙은 1687년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이후나 이전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해하든 이해 못하든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20층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말씀을 읽고 발견하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계시된 진리를 믿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영벌에 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흠이 많은 우리를 그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히 7:25). 그래서 우리는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사람과 화목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화목의 능력에는 세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첫째는 보혈로 말미암은 화목께 하는 복음의 진리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실제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화목의 복음을 전하는 화목의 직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이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때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천국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행복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평안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떠나 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이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후는 어떻게 됩니까?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 죽으신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보혈이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보혈의 피가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구별된 상태로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혈의 피가 흠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주십니다. 흠이 없는 상태란 온전한 희생 제물처럼 아무런 결점이 없는 순전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혈의 피가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것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거룩해지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덮어 주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런 삶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20절에 "화목되기(부정사)를 기뻐하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을 이루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완전을 향해 현재 진행중인 것입니다.

 

23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보혈의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고 예수님 재림 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며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사는 것은 보혈의 능력으로 온전히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인간 원수끼리 화목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을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막힌 담을 헐어 버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 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그래서 이제는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 5:13)"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보혈의 능력으로 서로 화목을 누리면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가 원망과 미움과 분노에서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사람들을 보면 결코 화목하게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서로 욕구와 가치관과 감정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하나를 같이 가지려고 하면 갈등하게 되고 다투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같이 다녀도 쉽게 화목하지 못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좌파와 우파가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어 갈등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상대방의 다른 생각과 행동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남의 말 듣기를 싫어합니다. 불만, 분노, 다툼, 미움, 갈등, 불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사모”를 만들고, “박사모”를 만들고 “교회를 사랑하는 모임 교사모”를 만들고, “떡 볶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 "떡사모"를 만들고 “억울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임“인 “억사모” 만듭니다. 갈등과 분열 다탐을 좋아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화목하지 못하면 건강한 공동체를 파괴되고 고비용을 치루어야 합니다. 화목하지 못하면 건강하던 공동체를 병들어 흩어집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파괴되고 영적생활이 파괴됩니다. 정신을 파괴하고 정서와 질서를 파괴해 버립니다.

화목은 사람의 완벽함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완벽해야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다면 아무도 하나님과 화목할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들어가면 화목한 인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덮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덮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 주고 덮어주면서 화목을 누려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고 영예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답니다. 사람들은 급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답니다. 그런데 처마는 좁고 사람이 많아 겨우 서있는 처지였답니다. 갑자기 어느 아주머니가 사람들을 밀치며 끼여드는 바람에 맨끝에 있던 젊은이가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답니다. 신앙이 좋은 젊은이였답니다. 그 젊은이는 하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길을 가려고 했답니다. 그때 처마 밑에 있던 한 사람이 “여보게, 인생은 다 그런 거라네”하며 위로했답니다. 잠시 후 그 젊은이가 여러 개의 우산을 사 가지고 와서 처마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말을 건넨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케 되었으니 화목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보혈 때문에 아버지와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목사님과 장로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어머니와 화목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와 아들과 딸이 화목해야 합니다.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듯이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보혈에 흐르는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응어진 마음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보혈이 흐르면 강퍅하고 교만한 마음이 녹아집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면 미워보였던 사람이 불쌍해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이며,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화해하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닙니다. 교회 생활은 화목해야 행복합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하면서 성도끼리 싸우고, 늘 긴장과 갈등 관계에 있다면 보혈의 능력으로 아직도 온전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자로 화목(和睦)은 눈목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화목한 사이의 눈들은 호의적이고, 친밀감이 있지만 반목한 사람들의 눈은 무섭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만날 때 사나운 눈으로 보지 말고 호의적으로 대하고 친밀하게 웃으면서 대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 화목됐네 예수 안에서 우리 화목됐네 하나님의 영광 함께 누릴 소망 있네 예수 안에서 우리 화목됐네'

 

3. 우리는 세상이 화목할 수 있도록 화목케 하는 직책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화목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피로 화목케 된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에 대하여 고린도서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5:18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서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목’은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적대 관계에서 우호와 평화의 관계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이 화목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에 대하여 바울은 어떤 자세로 하고 있습니까?

본문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괴로움이 있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채운다고 했습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령님의 힘으로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해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화목 대사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왜 내가 이런 일까지 감당해야 하냐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고 화목의 중재자로 사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화목의 직책에 초점을 맞추어야 싸우지 않습니다. 목사파 장로파 안수집사파 권사파로 분열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전투함입니다. 친목 중심으로 한 유람선이 되면 갈등과 분열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사탄과 영적 전쟁을 날마다 치루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영혼을 지키고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교인끼리 시선을 돌리게하는 교란작전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도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를 놓고 싸우게 했습니다. 어느 해변에서의 일입니다. 암초가 많은 곳이라서 항로를 잘못 잡은 배들이 자주 좌초되어 항해하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해변에는 인명을 구하기 위한 구조대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좌초된 배에서 침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은 상황에서 살아 난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남은 여생을 가치있는 일에 쓰기로 결심하고 그들은 낮에도, 밤에도 해안을 살피며 조난 당한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구해 준 은혜가 감사해서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구조 활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점점 대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원 중 한 사람이 제안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대원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제 이 텐트는 잠자리가 불편하니 보다 좋은 집을 짓도록 합시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한마음이 되어서 구조에 힘쓰기 위해서는 서로 친목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니 파티를 가집시다.”세월이 흐르자 해변에는 화려하고 넓은 저택이 들어섰고, 매일 저녁 친목 파티가 열렸습니다. 이 사람들의 해변 생활은 이전의 단조롭던 생활에서 벗어나 보다 활기를 찾은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처하고 있는 저택에서는 화려한 조명 아래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바깥 해변에서는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밤바다에 파도 소리를 타고 피어린 통곡으로 메아리쳐 오고 있었습니다. 해변에 모이는 사람들은 점점 없어졌습니다.

어떤 외국 선교사가 한국 교회를 진단할 때 이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집을 지키는 개보다는 보신용 개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손님이 오면 짖고 집에서 밥만 먹고 살만 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이니 성경 공부니 많이 하는데 정작 영적 전투의 현장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집을 짖는데 감독도 있고 설계사도 있고 십장도 있는데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이 있는데 소대장도 있고 보급관도 있고 참모도 있고 포병도 있는데 정작 전투에 참여하여 싸울 소총수가 한국 교회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평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최대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라는 자세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요일 2장2절을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웃과의 화해도 중재가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국가 간의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이웃과 이웃,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화목하는 평화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화해자의 역할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화해자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 하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며 기독교 장로라는 사실을 확실한 것입니다.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나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하였답니다. 갑오경장(1894)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2년 남짓 영어와 서구 민주주의를 배웠답니다. 그 후 그는 독립협회에 가담했다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감옥에서 보혈의 능력을 믿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형틀에 묵여있느니까 성경을 볼 수 없어 성경 책장을 넘겨주어 성경을 읽으며 참된 안위와 평안과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 그의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된 사람은 4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상재 김정식 같은 상류계층의 사람들이었답니다. 양반계층 가운데서 이렇게 집단적으로 신자가 된 것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감옥이 예배당이 되었답니다. 그곳에서 기도했고 예배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답니다. 그래서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은 그 지긋지긋한 한성감옥을 '복당'(福堂)이라고 불렀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도 직장도 나라도 화목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고 유언이며 지상 과제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목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총독이 미쳤다할 정도로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행 26:24).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쳤다고 하는 총독 앞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행 26:25). 바울은 미쳤다고 비판을 받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화목을 사역을 시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 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후렴]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세상 널리전하세”

 

보혈은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사람과 화목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만 화목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화목의 복음을 전하여 세상이 화목할 수 있도록 화목케 하는 직책을 힘을 다하여 수행하여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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