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 위의 새벽
현관문이 또 덜컥 열렸다. 이월 저녁의 찬 공기가 방바닥을 훑고 들어왔다. 방 안에는 약 냄새와 데운 죽 냄새가 눅눅하게 엉겨 있었다. 형광등 아래서 어머니는 외투도 없이 신발을 거꾸로 신고 서서, 먼저 간 남편이 밖에서 기다린다며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먼저 달려가 문을 닫았다. 낮에는 아이 재활치료실을 오가고, 밤이면 어머니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시트를 다시 펴느라 며칠째 잠을 설친 얼굴이었다. 수건을 쥔 아내의 손등은 물에 오래 불어 희게 일어나 있었다.
“어머니, 밖에 추워요.”
아내가 웃으며 말했지만, 어머니는 금세 눈을 흘겼다.
“내 집에 왜 네가 있니. 내 옷 내놔.”
서랍은 두 번 뒤집혔고, 저녁상 국그릇은 세 번째 식탁보를 적셨다. 같은 말을 스무 번 넘게 듣는 동안 집 안에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한숨이 먼저 쌓였다. 그는 교회에서는 오래 참음을 말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문고리 도는 소리만 나도 가슴이 먼저 굳었다.
식탁 끝에 밀어 둔 설교 원고 첫 줄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아이의 공책 위에 물컵을 엎질렀다. 아내가 입술을 깨문 채 젖은 종이를 한 장씩 떼어 냈다. 번진 연필 자국 사이로 아이 이름이 흐려졌다. 아이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만 꼭 다문 채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또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얘야, 밥은 먹었니.”
손끝에 힘은 없었다. 금세 잊을 말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말까지 받아낼 힘이 없었다. 젖은 공책, 설교 원고, 아내의 불은 손등이 한꺼번에 목까지 차올랐다. 하루 종일 참았다고 믿은 짜증이 손목으로 먼저 몰렸다.
탁.
손등을 쳐낸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방이 얼어붙었다. 어머니는 놀란 아이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내 손에서 젖은 공책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설교 원고 끝도 물을 먹어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강단에서 성경을 넘기고 병상에서 성도의 손을 붙들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장 약한 사람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는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어머니 앞에 무릎부터 꿇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는 한참 그의 얼굴만 보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조금 전 맞은 그 손등으로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왜 울어. 됐다.”
어머니가 잠든 밤, 그는 로션을 짜서 그 손등에 천천히 발랐다. 거칠게 튼 자리를 따라 손바닥을 오래 움직였다. 식탁 위에는 낮에 젖었던 공책이 펼쳐진 채 마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설교 원고도 물결처럼 굳어 가고 있었다. 곁방에서는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로션이 다 스며들 무렵, 잠결의 어머니 손이 스르르 올라와 그의 손등 위에 얹혔다. 낮에 붉게 오른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손을 빼지 못했다. 창문 틈으로 스민 새벽빛이 겹쳐진 두 손 위에, 그리고 젖었다 마른 공책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새벽마다 문을 열려 했고, 먼저 간 남편을 찾았고, 방문 앞에서 길을 잃었다. 아내의 잠은 여전히 짧았고, 아이의 치료도 계속되었다. 그도 자주 지쳤다. 어떤 날은 문밖 계단참에 나가 한참 서 있다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손이 먼저 나가려 할 때마다, 그날 밤 손등에 남은 감촉이 그를 붙잡았다. 어머니가 문고리를 잡고 서 있으면 그는 소리부터 낮추었다. 외투를 먼저 어깨에 둘러 드렸고, 같은 질문을 열 번째 듣는 날에도 대답 대신 미지근한 물 한 컵을 쥐여 드렸다. 집 안이 또 젖고 어질러지는 날에도, 그는 먼저 자기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새벽이 올 무렵, 그는 잠든 어머니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고, 창밖에서 들어온 희미한 빛만 방 안에 엷게 번졌다. 어머니의 손등은 여전히 거칠고 가벼웠다. 그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한때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붙들어 주었을 그 손이, 이제는 그의 품 안에서 어린아이의 손처럼 조용했다.
-김필곤 콩트집 <하늘 바구니> 중에서-
[작가의 한마디]
우리는 종종 나의 얄팍한 인내심으로 누군가를 품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밑바닥에서 내 안의 위선이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를 온전히 보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 자식을 사랑으로 기르며, 결국 자식의 돌봄을 받다 이 땅을 떠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부모의 돌봄 없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다. 기억마저 잃어버린 순간에도 자식을 향해 본능적으로 뻗어오는 어머니의 투박한 손길은, 우리의 숱한 반역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내 우리를 덮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닮아 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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