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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갈 집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12 추천수:0 218.147.218.173
2026-05-03 13:01:45

이사 갈 집

김 장로는 예배 시간마다 누구보다 먼저 아멘을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늦게 설교를 들었다.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예배당 천장에 번질 때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늘 다른 소리가 났다. 용인 플랫폼시티 상가 시세, 예상 공실률, 다음 달 이자, 잔금 날짜. 목사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외치던 날에도 그는 가죽 수첩에 호실 번호를 적고 그 옆에 작은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믿음의 표시라기보다 불안을 누르는 버릇이었다.

조금만 더 평수를 넓히면, 조금만 더 통장 잔고를 불리면 그제야 마음이 잠잠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등기부등본이 두꺼워질수록 속은 더 타들어 갔다. 밤마다 속이 쓰렸고, 새벽이면 입안이 바짝 말랐다.

눈을 감고 기도할 때조차 십자가 대신 임대차 계약서가 어른거렸다.

정기검진 결과를 들으러 간 수요일 오후, 의사는 한동안 모니터를 보다가 말없이 화면을 김 장로 쪽으로 돌렸다. “좋지 않습니다. 췌장 쪽에 악성 소견이 보입니다.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그다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조직검사, 항암, 전이 같은 단어만 띄엄띄엄 귀에 걸렸다. 평생 숫자를 계산하며 살았는데, 그의 인생 장부에서 아예 지워버렸던 '기한'이라는 변수 앞에서 그는 완벽하게 파산했다. 평생 계산하며 살았는데, 계산할 수 없는 문장 하나 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병원을 나와 벤치에 주저앉았을 때 그는 넥타이도 풀지 못했다. 숨이 가슴 어딘가에 걸려 끝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햇볕이 이쪽이 더 낫겠네요.”

고개를 들자 전동 휠체어를 탄 노인이 벤치 끝에 멈춰 섰다. 발받침 옆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흙은 바싹 말라 있었고 줄기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김 장로가 무심코 내뱉었다.

곧 말라 죽겠네요. 그걸 아직도 들고 다니십니까.”

노인은 말라비틀어진 잎 하나를 조심스레 펴 주며 웃었다.

그래도 데려가야지요.”

가망이 없는데요.”

혹시 압니까. 새집에 옮겨 심으면 살아날지.”

김 장로는 그제야 노인의 손목에 채워진 환자 팔찌를 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인데도 눈빛만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집으로 가져가시는 겁니까?”

노인이 휠체어 방향을 틀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정확히는 먼저 가 계신 분이 마련해 두신 집이지요. 내가 먼저 가면 이 녀석도 버려질까 싶어서요. 같이 가 보자 했습니다.”

같이 가 보자.

그 짧고 무심한 말이 김 장로의 가슴을 쳤다. 자동 물 공급 장치가 달린 제 집 베란다의 값비싼 난초와 분재들이 떠올랐다. 그 많은 것들 사이에서도 한 번도 쉬지 못한 자기 마음도 함께.

노인이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도 준비해 두셨습니까?”

뭘 말입니까.”

가실 집이요.”

그 순간, 오래전 장례 예배에서 들었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땅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있다는 말씀. 그는 평생 집을 사고팔았지만, 정작 마지막으로 들어갈 집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준비해 본 적이 없었다.

무릎 위 수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펼쳐진 페이지마다 계좌번호와 분양 일정이 빽빽했다. 그는 그것을 줍으려다 멈추고, 진단 결과가 적힌 종이를 뒤집어 빈칸에 썼다.

이사 갈 준비

그 밑에 다시 썼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물이 떨어져 마지막 글자가

번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은 이미 조금 멀어져 있었다. 전동 휠체어가 지나간 자리 위로 저녁빛이 얇게 누워 있었다. 특별히 찬란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환했다.

김 장로는 수첩보다 먼저 그 종이 한 장을 가장 심장 가까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얼굴을 감싼 채 울었다.

처음으로 더 가질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가져갈 것을 생각하면서.

-김필곤 콩트집 <하늘 바구니> 중에서-

 

[작가의 한마디]

사람들은 평생 '더 가질 것'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무리 쥐어도 소용없는,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이 문득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다릅니다. 그들은 '더 가질 것'이 아니라, 마침내 '가져갈 것'을 소망하며 오늘을 삽니다. 나의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삶의 진실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삶의 재미, 의미, 가치는 우리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진짜 ''의 주소가 어디인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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