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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률과 원금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26 추천수:0 218.147.218.173
2026-04-19 13:51:24

수익률과 원금

용인 처인구의 고물상 마당은 밤새 내린 비를 머금어 질척거렸다. 그 위로 매끈한 검은 포르쉐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박하랑 집사는 차 문을 열자마자 조건반사처럼 명품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젖은 폐지 썩는 내와 녹슨 쇠비린내가 비싼 조말론 향수를 단숨에 짓눌렀다.

"아버지, 오늘은 진짜 갑시다. 최고급 실버타운에 계약금까지 다 쐈다니까요."

러닝셔츠 차림의 만수 노인은 빈 소주병 상자를 끌어다 놓고 묵묵히 병뚜껑만 분리했다. 굽은 허리는 펴질 줄 몰랐고, 낯빛은 유독 누렇게 떠 있었다.

"됐다. 나는 여기 있으면 된다."

"다음 주에 저 청년부 간증 집회 서는 거 아시죠? 목사님이 저더러 엠제트(MZ) 세대 청지기의 본이래요. 근데 아버지가 계속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제 홀리(Holy)한 간증에 똥칠하는 거잖아요!"

만수는 때 절은 목장갑 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똥칠은 무슨. 네가 뭐가 되긴, 그냥 네가 너지."

하랑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릴 적, 학교 앞에는 오지 말라고 그토록 성질을 내도 기어이 고물 냄새 밴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던 사람이었다. 친구들의 비웃음보다 하랑을 더 미치게 했던 건, 아버지가 늘 굽신거리며 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병원은 가보셨어요? 눈동자도 노랗고 배도 남산만 하게 부었는데, 아직도 그놈의 술 못 끊으셨죠?"

"술은끊었다."

"그럼 왜 갈수록 더 사람 꼴이 아니냐고요!"

묵묵히 빈 병만 만지던 만수가 처음으로 탁한 눈을 들어 아들을 보았다. "사람 꼴은네가 더 못됐다." 3년 전, 하랑의 첫 사업이 처참하게 망하고 사채 빚에 몰려 마포대교 난간에 올라갔던 밤. 벼랑 끝에 선 그를 살린 건 얼굴도 모르는 재미교포 투자자, '마이클 정' 장로가 보내온 3억 원이었다. 목사는 하나님이 길을 여셨다고 축복했고, 하랑은 그 극적인 반전을 자신의 뛰어난 영성과 능력의 훈장으로 삼았다. "전 아버지처럼 구질구질하게 안 삽니다. 적어도 제 인생은 제가 일으켰고, 하나님이 채우셨어요." 만수는 녹슨 깡통 하나를 찌그러뜨리고 나서야 낮게 읊조렸다.

"사람은 돈 번 걸로 사는 기 아니다. 네가 누구 덕에 안 무너졌는지 알아야그때 진짜 사람이 되는기라." 화가 치민 하랑이 이탈리아제 수제 구두 발끝으로 낡은 철제 캐비닛을 거칠게 걷어찼다. 덜컹! 찌그러진 서랍이 빠지며 잡동사니가 쏟아졌다. 누런 약봉지, 녹슨 참크래커 깡통, 그리고 손때 묻은 중학교 1학년용 영어 단어장. 단어장 사이에서 구겨진 편지 초안 하나가 툭 떨어졌다.

[정 장로님, 제 이름으로 보내면 그 녀석 자존심에 안 받을 낍니다. 에인절 투자인가 뭔가 그걸로 해 주이소. 영어 문장은 내가 며칠 밤새워 적어 봤는데 혹시 틀리면 좀 고쳐 주이소.] 그 밑에,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수십 번 지운 흔적이 역력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Hello Harang. I believe your vision.]

하랑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봉투 아래에서 서류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고물상 부지 포기 및 가계약금 영수증', '생명보험 암 진단금 조기 수령 확인서'. 그리고 대학병원 로고가 찍힌 3년 전 서류도 한 장 미끄러져 나왔다.

'말기 간경화 진단서', 그리고 '간 이식 수술 포기 및 연명 치료 중단 동의서'. 마지막으로 엉성하게 스테이플러로 찍힌 서류는 외화 송금 확인증이었다. 날짜는 하랑이 사채업자의 전화를 끊고 난간 위에서 울부짖던 바로 그 주간이었다.

"아버지이게, 이게 다 뭐예요."

만수가 급히 절뚝거리며 다가와 서류를 주워 담았다.

"남의 서랍을 왜 함부로 뒤지노. 옷 베린다, 비켜라."

"이 돈아버지가 만든 거였어요? 수술비랑, 평생 일군 고물상 자리까지 다 팔아서요?"

한참을 침묵하던 만수가 흙 묻은 종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집으로 빚 독촉장 날아온 거 보고 알았다. 미국 사는 고향 친구 정 장로가 이름이랑 계좌만 빌려줬다. 씨돈은내가 냈다."

아버지가 왜 죽어가는 몸으로 매일 고물상을 맴돌았는지, 누런 눈과 불룩한 배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3억 원이라는 찬란한 간증의 밑바닥에 누구의 피가 고여 있었는지 한꺼번에 드러났다. "왜 말 안 했어요!"

"네가 알면 기를 쓰고 안 받을까 봐." "그럼 아버지 수술은요! 당신 목숨은요!"

"늙고 병든 놈 수술해 고쳐서 뭐 하노. 내 새끼, 젊은 놈 하나 안 죽고 살았으면 됐지."

하랑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기를 지금껏 살게 하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자신의 화려한 '수익률'이 아니라, 아버지가 남김없이 쏟아부은 생명의 '원금'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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