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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과 노란 도시락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09 추천수:0 218.147.218.173
2026-04-12 13:54:29

미슐랭과 노란 도시락

도진의 프렌치 레스토랑 이름은 '아망(Amant, 연인)'이었으나, 주방의 공기는 아우슈비츠에 가까웠다.

", 이 소스 꼬라지 봐라. 네 혈압 잴 때 피를 뽑아도 이거보단 맑겠다. 당장 버려!"

15만 원짜리 안심스테이크가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접시 가장자리에 튄 0.1밀리미터의 소스 자국 때문이었다. 도진의 새하얀 조리복은 그의 신경질적인 완벽주의를 상징하는 일종의 성의(聖衣)였다. 아내가 집을 나간 뒤, 그는 오직 완벽한 요리만이 자신의 무너진 삶을 구원할 동아줄이라 믿고 매달렸다.

그 완벽한 성역의 유일한 오점은 오피스 구석에 쪼그려 앉은 아홉 살 아들, 우주였다. 경계선 지능을 앓고 있는 우주는 도진에게 실패한 결혼의 잔해이자 감추고 싶은 수치였다. 우주의 무릎 위에는 칠이 벗겨진 낡은 노란 플라스틱 도시락이 늘 놓여 있었다.

재료를 확인하러 들어온 도진이 미간을 팍 구겼다.

"너 또 쓰레기통 뒤졌냐?" 도진이 빼앗듯 뚜껑을 열자, 안에는 

그가 굽다 조금 태워버린 바게트 꽁다리, 모양이 틀어져 내버린 관자 조각들이 가득했다.

"거지야? 쉰내 나는 걸 왜 자꾸 주워 담아!"

우주가 어눌한 발음으로 도시락을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빠가아빠가 만든 거, 다 마시써……."

"입맛도 지능 따라가냐? 버린 건 쓰레기야. 내 요리 아니라고!"

도진은 아이의 도시락을 책상 위로 거칠게 밀어버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유리 너머 남겨진 우주는 한동안 도시락 뚜껑만 조용히 쓰다듬었다.

디너 피크 타임, 하필 깐깐한 미슐랭 평론가들의 예약이 겹친 날이었다. 손끝의 작은 떨림조차 용납되지 않는 중압감이 주방을 짓눌렀다. 마음이 급해진 10년 차 수셰프가 실수로 최고급 트러플 오일 병을 화구 근처 바닥에 깼다.

"정신 안 차려?!" 도진이 불같이 화를 내며 거칠게 돌아서는 순간, 미처 닦지 못한 오일에 그의 구두가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허우적대며 중심을 잃은 도진의 몸이, 하필 막 끓여내어 식혀두려던 20리터짜리 오리 콩피(Confit) 기름통을 덮쳤다. "셰프님!" 도진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찰나의 순간, 허공으로 솟구친 

180도의 기름비 아래로 작은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문틈으로 아버지만을 쫓던 아이였다. 우주가 두 팔을 뻗어 바닥에 주저앉은 도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끓는 기름은 고스란히 우주의 얇은 등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이는 제 등판으로 아비에게 쏟아지는 불비를 모두 막아냈다.

"으아아아!" 아이의 비명이 주방의 모든 소음을 삼켰다. 바닥을 구르는 아이의 품에서 노란 도시락이 튕겨 나갔다. 도진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아이에게 손을 뻗었지만, 붉게 짓물러가는 아이의 살갗을 보는 순간 제 손을 급히 거두고 말았다. 제 손길 아래에서 무너져 내리는 그 끔찍한 뜨거움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기름 바다 한가운데 주저앉은 도진의 조리복은 기괴할 만큼 멀쩡하고 새하얬다.

응급실 복도는 형광등 불빛으로 서늘했다. 의사는 화상이 너무 깊어 평생 일그러진 흉터를 안고 살아야 한다고 선고했다. 그 차가운 통보 앞에서 도진은 자신의 알량한 완벽주의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넋이 나간 도진에게 현장을 수습하고 온 구급대원이 그을린 비닐봉지를 건넸다. "애가 기절하는 와중에도 이걸 안 놓더군요." 열기에 흉측하게 녹아내린 노란 도시락이었다. 도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새까맣게 탄 빵조각, 짓이겨진 고기 파편들. 완벽을 

기하느라 가차 없이 잘라버렸던 제 실패작들이었다. 그제야 도진은 깨달았다. 자신은 남들에게 보여줄 완벽한 1%만을 뽐내며 교만했지만, 아이는 세상이 쓰레기라 부르는 아비의 99%의 부끄러움과 실패마저 제 품에 온전히 그러모으고 있었다는 것을. 버려진 것조차 '아빠의 것'이라며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도진은 도시락 속에 남은 바짝 마른 빵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모래알처럼 씹히는 쓴맛 사이로 뜨거운 오열이 터져 나왔다. 차가운 수술실 문 앞, 오직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린 살갗이 타들어 가는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낸 것. 도진의 고개가 천천히 꺾였다. 그가 입고 있는 셰프복은 처음 그대로, 소름 끼치도록 티 하나 없이 새하얬다.

-김필곤 콩트 집 <하늘 바구니> 중에서-

 

[작가의 한마디]

우리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새하얀 조리복'처럼 포장하며, 흠집과 실패는 쓰레기통에 감추기 바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잘난 성취가 아니라, 우리가 내다 버린 부끄러운 오답과 흉터들을 자신의 온몸으로 끌어안는 데서 시작됩니다. 가장 완벽한 사랑은 흠 없는 식탁이 아니라, 찌그러진 도시락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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