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자 침대와 5,400원짜리 변호사
로스쿨 3년 동안 마이너스 통장은 4,500만 원까지 갔고, 지갑엔 5,400원이 남아 있었다.
서윤은 퉁퉁 불은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끊어 먹으며 책상 위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대형 로펌 ‘태산’.
연봉 1억.
숫자만 봐도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이제 지하 교회 사택의 곰팡이 냄새도, 장의자 두 개를 붙여 만든 잠자리도 끝이었다. 뒤척이다 장의자 틈이 벌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깨던 새벽들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딸아, 합격 축하한다.”
“응. 내일 오리엔테이션이야.”
아버지는 잠깐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꺼냈다.
“혹시 ‘진리수호센터’ 이 소장님 기억하니. 지금 소송이 여럿 걸려서 사람이 필요하다더라. 기록이라도 좀—”
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다가 컵 벽을 ‘딱’ 치고 멈췄다. “아빠. 거긴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데잖아. 내가 왜 거길 가.”
“지금은 많이 어려워서….” “아빠처럼 살라고?”
서윤의 말이 이어졌다.
“맨날 남 일 대신 뒤집어쓰고, 형편도 안 되면서 괜찮다고 하고. 난 그렇게 안 살아.”
수화기 너머로 숨이 한 번 걸렸다.
“그래. 미안하다.”
통화가 끝났는데도 휴대폰 화면은 잠깐 환했다. 서윤은 화면을 꺼버리고 계약서 모서리를 눌렀다. 눌린 종이는 천천히 다시 들떴다. 아버지의 성경은 늘 손때로 번들거렸고, 그 번들거림이 커질수록 집이 더 닳아가는 것 같아 서윤은 싫었다.
다음 날, 태산 입사 서류를 준비하다 ‘가족관계증명서(상세)’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정부24를 켰지만 공동인증서가 만료돼 있었다. 제출 기한은 오늘이었다.
서윤은 마지못해 반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아버지 명의로 된 서류가 사택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랐다. 눅눅한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벽지는 끝이 말려 있었고, 창틀에는 곰팡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랍 맨 안쪽에 테이프로 봉해진 낡은 봉투가 있었다. 서윤은 그냥 밀어두려다, 봉투 겉면의 날짜에서 손을 멈췄다. 그 날짜는 서윤이 장의자에서 처음 밤을 샜던 때와
겹쳤다. 천천히 테이프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누렇게 바랜 이행각서가 들어 있었다.
교인 대표 박○○ 장로는
최○○ 목사가 자진 사임하고 교회 관련 일체의 이의 제기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건축위원회 관련 고발을 취하한다.
그 아래에서 작은 수첩 하나가 또 나왔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십월 사일.
장로 쪽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물러나면 고발은 접겠다고.
권사님 생각이 났다. 막노동으로 애 대학 보낸 분. 전과 하나면 그 집은 끝이다.
채소 팔아 평생 헌금한 집사님도. 그분들 중 싸우다 먼저 다치는 사람이 나오면 안 된다.
무섭다. 그래도 이쪽이 맞는 것 같다. 다음 장에는 짧은 한 줄만 더 적혀 있었다. 서윤이가 장의자에서 자는 밤이 길지 않게 해 주십시오. 어렵게 교회를 개척하여 건축했는데 이단에 빠진 장로에 의해 교회가 탈취되었을 때 기록이었다.
서윤의 손끝이 수첩 위에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당구장 구석방의 삶은 달걀 냄새, 겨울 새벽의 니스 냄새, 등을 돌리던 얼굴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버지는 그때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 침묵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돌을 자기 쪽으로 모으는 일이었다는 것을, 서윤은 십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날 밤 서윤은 태산 계약서를 덮어놓고 앉아 있었다.
8시가 넘어서야 서윤은 휴대폰을 집었다. 태산 인사팀 메일을 열었다.
입사 서류 제출 기한 연장 요청.
개인 사정으로 며칠만 보류하고 싶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서윤은 진리수호센터 번호를 눌렀다.
“이 소장님, 최서윤입니다.”
“아, 서윤 씨. 이 밤에 왜” “기록부터 보내 주세요. 소장, 답변서, 증거목록 있는 만큼요.” “지금요?” “네. 오늘 밤부터 볼게요.”
다음 날 아침.
허름한 상가 건물 삼층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보일러가 채 돌지 않아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벽 한쪽에 교회 장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야근하는 사람이 잠깐 눈 붙일 때 쓰는 모양이었다.
서윤은 그 앞에 잠깐 섰다. 손바닥으로 매끈하게 닳은 나무 끝을 한번 쓸었다.
이 소장이 서류 더미를 안고 허둥지둥 나왔다.
“정말 와 줬네요. 그런데 수임료는….”
“나중에 얘기하시죠.”
서윤은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최서윤 변호사입니다.”
작은 창문으로 아침빛이 가늘게 들어왔다. 장의자는 여전히 딱딱해 보였고, 통장 잔고는 여전히 바닥이었다. 아버지는 끝내 변명하지 않았다. 서윤은 위임장 양식을 펼쳐 책상에 눌러 놓았다.
그 종이는, 오늘부터 누가 다치지 않을지를 가르는 선이 됐다.
-김필곤 콩트집 <하늘 바구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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