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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포도 넝쿨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223 추천수:1 218.147.218.173
2026-03-01 13:24:08

끊어진 포도 넝쿨

무릎팍의 굳은살은 신앙의 훈장이 아니다. 2층 셋방에서 매일 세 시간씩 이어지던 어머니의 가정예배가 남긴 흉터다.

주여, 살려주소서. 오늘도오늘도.”

홍수로 모래 사업이 망하고 우리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정육점에서 버리다시피 하는 2천 원어치 돼지 뼈다귀를 빨래통에 끓여 온 식구가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밑 빠진 독 같은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매일 밤 주여 삼창을 외쳤다. 시끄럽다며 1층 집주인이 바깥에서 현관에 자물쇠를 채워버린 날, 어머니는 기어코 2층 베란다의 얇은 포도 넝쿨을 타고 맨발로 뛰어내려 새벽기도를 가셨다. 발목을 절뚝거리면서도 입으로는 할렐루야를 중얼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속으로 예수를 저주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기도를 등지고 도망치듯 취업한 지 3년째 되던 해, 나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중증 간손상으로 급성 간부전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입안에서 늘 비릿한 쇳내가 났고, 밤마다 속에서 검붉은 것이 올라왔다.

보험이 안 되는 비급여 주사 치료를 지금 못 하면위험합니다. 생존 확률은 30% 미만으로 봅니다. 보호자 결정이 필요합니다.”

의사는 중환자실을 권했지만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강제할 수 없다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내 생명이 내 의지보다 서류 한 장에 달려 있다는 뜻 같아서. 선고 앞에서도 어머니는 담담했다. 오히려 핏기없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나는 수액 줄을 뜯어내며 악을 썼다.

평강? 나 죽는다고! 평생 그놈의 무릎 꿇고 빌었는데 남은 게 이 썩은 간 하나야!”

그러나 어머니는 수납하지 않으면 내일 퇴원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짐짝처럼 차에 실어 경기도 용인의 한 허름한 기도원으로 보냈다.

의사 선생님이공기 좋은 데서 며칠 쉬면 수치가 잡힐 수도 있다더라.”

거짓말. 돈이 없어 자식을 산장 기도원에 버리는 그 위선이 역겨웠다. 원인도 모르는 병을, 원인도 모르는 신에게 떠넘기는 꼴이라니. 나는 차가운 2월의 기도원 방바닥에 누워 피 섞인 숨을 토하며 독을 품었다. , 죽어드릴게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 곁으로.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독기인지 신의 변덕인지, 황달이 걷히고 간 수치가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스스로 걸어 서울의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주치의 앞에서 승리감에 찬 미소를 지으려 했다. 약물 없이도 내가 이겼다고, 어머니의 맹목적인 기도 따위가 아니라 내 정신력이 이겼다고.

그러나 차트를 보던 주치의는 유령을 본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살아오셨군요. 어머님은 그날, 30% 확률에 아들을 맡기느니 100% 하나님께 맡기겠다며 호기롭게 퇴원하셨는데.” “거 봐요. 돈 없어서 신앙으로 포장한 거라니까요.”

내가 비아냥거리자, 주치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어제 새벽, 본원 응급실로 추락 환자가 한 분 실려 왔습니다. 신원 확인이 안 됐는데, 소지품에서 광호 씨 이름이 적힌 비급여 견적서가 나왔습니다. 기록을 보고혹시나 해서요.” 순간, 이명이 들렸다. “남자들도 꺼리는 새벽 인력시장, 고층 상가 간판 철거를 나가셨답니다. 위험 수당이 세다며, 제대로 된 안전교육도 없이누가 건네준 안전띠 하나에 의지해서요. 어제 새벽그 줄이 끊어졌습니다.” 간호사가 건넨 봉지 안에는 낡은 통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펼쳤다. 찍혀 있는 잔액은 정확히 그 주사의 1회 투여 비용이었다. 통장 맨 뒷장, 굳은살 박인 손으로 쓴 삐뚤빼뚤한 글씨가 망막을 찢고 들어왔다. ‘주님, 저는 이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매달릴 테니, 주님은 우리 광호 생명줄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2층 셋방의 포도 넝쿨. 상가 외벽의 낡은 밧줄. 어머니는 평생 나를 살리기 위해, 홀로 허공에 매달려 십자가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돈이 없어서라고 믿었지만, 어머니는 한 번만이라도라는 마음으로 매달려 있었다. 용인의 늦겨울 바람이 병원 창문을 때렸다. 나는 통장과 피 묻은 안전띠를 움켜쥔 채, 그토록 혐오하던 자세로 병원 복도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가 타일에 닿자, 무릎팍의 굳은살이 먼저 아팠다. 마치 그 자리가 원래 내 자리였다는 듯이. “주여.”

두 번째 주여는 소리가 안 났다. 목이 막혀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내 등 위에 조용히 얹히는 것 같아서였다.

-하늘 바구니(김필곤목사 콩트집) 중에서-

[작가의 한마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침묵과 부모의 투박한 신앙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비웃고 답답해하던 그 미련한 방식이, 실은 우리를 낭떠러지에서 끌어올리고 있던 십자가의 피 묻은 손길이었음을 깨닫는 날이 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3)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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