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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색 청테이프의 복음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81 추천수:1 218.147.218.173
2026-02-22 13:20:07

은색 청테이프의 복음

즘 사람들은 북유럽풍 인테리어니 실크 벽지니 따지지만, 상진의 유년 시절 벽지는 단연코 철물점표 은색 청테이프였다.

상진의 아버지는 해만 지면 소주병 속에 사는 괴물로 변했다. 술이 오르면 톱을 들고 판잣집 벽을 미친 듯이 썰어댔다. 톱날이 나무를 뜯는 쇳소리가 밤을 갈라놓으면, 그의 어머니는 다음 날 말없이 구멍 난 곳을 청테이프로 막았다. 어떤 밤엔 다섯 살짜리 상진을 발가벗겨 세워두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어둠 속에서 빨갛게 타는 담뱃불이 허공에 멈추면 여지없이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어린 상진은 그 불빛이 멈추지 않기만을 덜덜 떨며 빌었다. 그때 데인 마음은 어른이 되어서도 혀끝을 잡아당겨,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 지옥을 뛰쳐나와 상진은 철저히 과거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번듯한 직장, 대출 낀 작은 전세 빌라, 순한 아내와 갓난아이. 그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 같은 쓰레기가 되지 않겠다고 수천 번 다짐했다. 그런데 가난은 바퀴벌레보다 끈질겼다.

여보, 이번 달 전세 대출 이자 나가고 나면애기 분유 살 돈이 모자라.” 아내의 목소리는 모기장만큼 얇았지만, 상진의 귓전에는 넌 남편도 애비도 아니야라는 천둥소리로 꽂혔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기계야? 밤새 투잡이라도 뛰면서 돈을 찍어내?”

아내가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신발장 거울에 핏발 선 상진의 눈이 비쳤다. 평생을 저주하던 바로 그의 얼굴이었다. 숨이 턱 막힌 그는 주저앉은 아내를 타박하고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고 도망쳤다. 3일을 싸구려 모텔을 전전했다. 휴대폰은 꺼뒀다. 꼴에 아버지와 다르답시고 손찌검은 안 했으니 된 거 아니냐는 비겁한 변명이 입안에서 돌았다. 셋째 날 밤, 켜진 휴대폰으로 이메일 하나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연을 끊은 지 십 년도 넘은 아버지였다. A4 용지로 뽑으면 족히 수십 장되는 긴 글이었다. ‘컴퓨터 켤 줄도 모르는 양반이 이걸 어떻게?’ 의아해하며 맨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자 짤막한 한 줄이 붙어 있었다. “복지관 선생이 글자만 대신 쳐줬다. 나는 말로 했다. 손이 떨려서.” 그 한 줄이 상진의 명치 끝을 찔렀다. 평생 자존심 하나로 가족을 팼던 늙은이가 제 수치를 말로토해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 피 묻은 진술서였다. 할아버지 노름빚에 머슴으로 팔려 가 지겟작대기로 맞으며 컸다는 이야기. 배운 게 매질뿐이라 자식을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몰라 톱을 들었다는 고백. 소주를 들이붓지 않으면 삶의 무게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는 비명. 시설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용서을 배웠다고 용서를 구하는 글이었다. 종이 다발을 출력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소파 끝에 앉은 아내의 눈이 퀭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상진은 종이 다발을 식탁 위에 툭 내려놨다. “아버지가보냈어. 읽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해.” 퉁명스럽게 뱉었지만, 속으로는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는 안방으로 도망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거실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각거림은 오열로 바뀌었다. 마침내 종이 소리가 멎고 발걸음이 안방으로 다가왔다. "당신도 결국 당신 아버지랑 똑같아"라는 선고가 떨어질 줄 알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문이 열리더니, 덥석 이불이 걷혔다. 아내가 무너지듯 상진의 위로 엎어지며 땀범벅이 된 남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여보거기서 혼자 얼마나 무서웠어.” 아내의 뜨거운 눈물이 그의 목덜미를 데웠다. “안 죽고 살아줘서 고마워. 도망 안 치고 나한테 다시 와줘서 고마워.” 상진은 짐승처럼, 아니 길 잃은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아내는 오물이 묻은 남편의 밑바닥을 다 읽고도 정죄하지 않았다. 도리어 두 팔을 벌려 냄새나는 그를 십자가처럼 안아주었다. 하나님의 용서가 저 멀리 구름 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아내의 떨리는 좁은 어깨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쭈뼛거리며 다가온 아들이 깨진 플라스틱 자동차를 내밀며 울먹였다. “아빠바퀴 빠졌어.” 습관처럼 조심 좀 하랬지!”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 멈췄다. 대신 서랍을 열었다. 아내가 쓰다 남은 은색 청테이프가 있었다. 상진의 유년 시절 끔찍했던 벽지. 그는 말없이 테이프를 뜯어 부러진 바퀴를 칭칭 감았다. 서툰 솜씨라 테이프 끝이 뭉툭하게 울었다. 그걸 본 아들이 배시시 웃었다.

우와! 아빠, 여기 구멍 난 데도 더 붙여줘!” 상진은 아들을 덥석 무릎에 앉혔다. 눈을 맞추는 게 어색해 헛기침이 났지만, 이번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아빠가 화내서 미안해. 우리 아들, 참 많이 사랑한다.” 아들이 그의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창밖의 아침 햇살이 작은 거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난감에 둘러진 투박한 은색 청테이프는 더 이상 폭력의 흉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서진 것을 싸매고, 이어 붙이는, 상진의 집만의 작고 눈부신 복음이었다.

-하늘 바구니(김필곤목사 콩트집) 중에서-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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