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1968년 묵호항. 술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한결의 유년을 끌고 다녔다. 노름판에서 전 재산을 날린 아버지가 순사에게 팔을 비틀려 끌려가던 날, 아홉 살 한결은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아부지, 나 두고 가지 마요!”
아버지는 돌아서서 침을 탁 뱉었다.
“이 재수 없는 놈아. 네 다리만 멀쩡했어도 내 팔자가 이 모양이냐!”
그 한 마디가 유산이었다. 동생 한별은 어느 날 사라졌고, 한결은 절뚝거린다는 이유로 고아원 마당에 던져졌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결핍이 아니라 저주였다.
1977년, 미국 유타. 황량한 벌판의 공항에서 두 번째 아버지 ‘아더’가 손을 흔들었다. 부유한 백인 부부를 기대했던 한결은 그 자리에서 속으로 욕을 했다. 아더의 손톱 밑에는 기름때가 검게 눌어붙어 있었고, 그가 몰고 온 차는 20년 된 낡은 포드였다. 문을 닫자 “철컥”이 아니라 “덜컹”이 났다." 첫 식탁에서 양어머니 마르다가 내놓은 ‘한국 김치’는 더 참담했다. 양배추에 식초를 부어 절였는지 혀가
찌릿했다. “스티브, 널 위해 만든 김치야. 맛있지?”
한결은 씹다가 물을 벌컥 마시며 웃었다. “네, 진짜… 미국답네요.”
그날 밤, 한결은 화장실에서 몰래 그 김치를 휴지에 뱉어 버렸다. 휴지를 버리며 중얼거렸다.
‘가난한 주제에, 동양애 하나 데려다 자위하는 거지.’
한결은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이 집과 조국과 자기 다리를 비웃어 주기 위해서였다. 아더가 “학비는 걱정 마” 하며 밤늦도록 정비소 불을 켤수록, 한결은 더 냉정해졌다.
“그거, 아버지 의무잖아요.”
아더는 스패너를 내려놓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아빠는 의무를 잘 못 배웠는데… 너한텐 배워서라도 해야지.” 졸업을 앞둔 봄, 아더가 작업대 앞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환자실 복도에서 마르다가 낡은 가계부를 건넸다. 표지는 손때로 번들거렸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한결은 펼치다 얼어붙었다.
‘스티브 등록금 대출’
‘이자’
‘초과근무’
‘심장약—반만’
‘김치 재료—양배추(세일)’
그 아래, 연필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약은 줄여도 스티브 졸업은 못 줄인다.”
한결은 가계부를 덮고 병실 문을 밀쳤다. 산소마스크를 쓴 아더가 눈을 떴다. 한결의 목소리가 먼저 터졌다. “왜요? 왜 이렇게까지 해요! 나 아들이 아니잖아요. 나 때문에 왜 망가져요!”
아더는 떨리는 손으로 한결의 손등을 더듬어 덮었다. 기름때가 지워지지 않은, 투박한 손이었다.
삐— 삐— 심장 모니터 소리가 낡은 포드 엔진처럼 덜컹거렸다. 그 덜컹거림 사이로 한결은 이상하게도 묵호항 바람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욕설이 들려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누군가가 끝까지 떠나지 않고 붙드는 숨소리였다. 한결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더의 손이 붙든 것은 ‘의무’가 아니라 ‘이름’이었다. 아들이란 이름, 가족이란 이름, 하나님 아버지란 이름. 한결은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번엔 사람 앞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 앞에서였다. 어릴 적 고아원 예배당에서 꺼진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아버지 좀 주세요”라고 빌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 기도는 허공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다만 다른 모양으로 도착했을 뿐이었다. 기름때 묻은 손, 시큼한 김치, 덜컹거리는 포드… 그 모든 것에 숨어서. 한결의 입술에서 오래 밀봉해 둔 호칭이 새어 나왔다. “하늘의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미워한 게 아니라, 아버지를 몰랐습니다.”
우주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과학자가 된 한결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비린내 나는 어느 도시의 보육원을 찾았다. 절뚝거리는 일곱 살 아이가 구석에서 눈만 굴렸다. “아저씨… 나도 다리 아픈데… 나 때문에 싫어질 거죠?”
한결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정장 소매가 바닥에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아이를 꼭 안았다. “아저씨 아니고… 아빠.”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아빠, 김치 잘해요?”
한결은 웃었다. “우리 집 김치, 좀 시큼해. 근데 그 시큼한 맛이… 누군가 날 위해 끝까지 버틴 맛이야.” 하늘엔 그가 쏘아 올린 위성이 돌고 있을지 몰라도, 그의 인생을 가장 밝게 비추는 별은 지금 품 안에서 떨던 이 작은 아이의 눈동자였다. 한결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속으로 조용히 고백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저도 이제, 당신처럼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그 사랑을 갚으렵니다.”
-하늘 바구니(김필곤목사 콩트집) 중에서-
[작가의 한 마디]
상처 입은 아들이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은 완성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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