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同行), 등 뒤의 엇박자
1980년대 중반, 관악산 자락에서 내려온 바람은 신림동 달동네의 얇은 창호지를 무자비하게 두드리곤 했다. 겨울 아침이면 정수는 대문을 나서기 전, 반드시 한 번 더 귀를 세웠다.
탁, 드르륵. 탁, 드르륵.
그 소리가 들리면, 정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땟국물 밴 지팡이를 휘두르며 아들의 학교 근처까지 따라오는 사람. 유일한 아들 정수에게 아버지는 보호자가 아니라 등 뒤에 붙은 그림자였다. 지팡이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정수는 골목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정수냐? 정수야. 같이 가자. 길이 미끄럽다."
아버지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들 눈에 그 소리가 닿기 전에, 그는 먼저 사라져야 했다.
졸업식 날, 아버지는 낡은 양복을 꺼내 입었다.
"오지 마세요."
정수는 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오시면… 나 진짜 끝이에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양복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그래. 안 간다."
정수는 그날 졸업장을 받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군복을 입었고, 군복을 벗자마자 타지의 건설 현장을 떠돌았다. 전화는 받지 않았다. 편지는 뜯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고는 십 년쯤 지난 뒤, 낯선 번호로 걸려온 동사무소 직원의 목소리로 닿았다.
"보호자이신가요? 고인께서 혼자 사셨는데…"
정수는 수화기를 쥔 손이 저리도록 오래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텅 빈 고향집. 정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발을 멈췄다. 냄새가 먼저 왔다. 오래된 장판과 곰팡이,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아버지의 잔향, 점자 성경. 애지중지 여겼던 볼 수도 없었던 십자가 성화, 정수는 신발을 벗지 않은 채 마루에 주저앉았다.
방 한가운데 낡은 궤짝이 있었다. 그 위에 녹음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먼지가 쌓이지 않은 것을 보니 아버지가 자주 만졌던 물건인 듯했다.
정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다시 뻗었다가 또 멈췄다.
누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잡음 뒤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정수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발걸음이 무겁다. 가방이 무거운지, 마음이 무거운지…"
정수는 눈을 감았다.
"녀석이 요즘 나를 피한다. 지팡이 소리만 나면 골목 저쪽으로 숨는다. 나도 안다. 내가 창피해서 그러는 거."
녹음기 속 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지팡이를 더 크게 짚는다. 네가 내 소리를 미리 듣고, 멀리 가라고."
정수는 눈을 떴다. 손이 떨렸다.
"내가 네 곁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네 앞길에 그늘이 질 것 같아서."
녹음기가 잠시 멈췄다. 정수는 손을 뻗어 멈춤 버튼을 누를 뻔했다. 하지만 녹음은 계속됐다.
"이 지팡이는 말이다. 앞을 보려고 짚는 게 아니라… 네가 어디쯤 있는지 확인하려고 짚는 거다. 네 발소리가 멈추면 나도 멈췄고, 네가 뛰면 나도 마음으로 같이 뛰었다."
짧은 웃음, 그리고 기침.
"정수야."
아버지는 이름을 불렀다. 녹음기 너머로, 십 년 전 그날로.
"너는 혼자 걷는 줄 알았겠지. 하지만 네 뒤엔 항상 내 발소리가 있었다. 그 뒤엔… 주님께서도 같이 걸으셨고."
녹음기는 그렇게 끝났다.
정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녹음기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등이 둥글게 말렸다.
그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소리 없이.
한참 뒤, 정수는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 기대어 있는 지팡이가 보였다. 그는 일어나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손때가 묻어 있었다.
밖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람에 창호지가 흔들렸다.
탁, 드르륵. 탁, 드르륵.
정수는 그 소리를 이제 도망치지 않고 들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한 번 바닥에 짚어 보았다.
탁.
그 소리는 아버지의 것과 똑같았다.
-하늘 바구니(김필곤목사 콩트집) 중에서-
[작가의 한 마디]
하나님이 시각장애인처럼 취급되는 시대입니다. 십자가는 부담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간섭으로 치부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존재로 멀리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아들을 버리지 않고 동행하십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명기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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