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Locker No. 144)
동전이 철제 투입구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대합실에 울렸다. 짤그랑, 쿵. 열쇠가 튀어나왔다. 144호. 나는 그 차가운 금속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우리의 겨울옷과 이불이 들어간, 내 이름으로 된 유일한 부동산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이름을 빌린 채 잠시 숨 쉬는 공간이었다.
“거기 괜찮을까? 한여름인데.”
아내의 목소리에 걱정이 배어 있었다. 나는 힘주어 대꾸했다.
“걱정 마. 철도 경찰이 24시간 지키잖아.” 순례자라고 했다. 사역자라고도 했다. 훈련 학교를 수료하자마자 사택을 비워야 했고, 다음 임지는 안개 속이었다.
살림살이는 공중 분해되었다.
남의 집 창고, 처가 다락방, 그리고 대전역 로커. 갓난 둘째를 포대기에 싸고 첫째의 손을 잡은 채, 우리는 전국을 떠돌았다. 명분은 친척 방문. 실상은 염치를 접어 넣은 유랑이었다. “이번 주는 이모네, 다음 주는 여기…” 말끝을 흐리는 내 목소리에 아내가 웃었다. 엷게.
“괜찮아. 아이들한테는 모험이잖아.”
그 웃음이 내 속을 긁어놓았다.
가장(家長). 방 한 칸 없는 가장.
내 속은 바깥의 폭염보다 먼저 끓어올랐다. 그날도 우리는 이 길을 그렇게 반대했던 처가에서 나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안녕히 가라는 인사도 없었고, 우리도 돌아보지 않았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대전역 대합실. 회전하지 않는 선풍기 앞 의자에 짐짝처럼 주저앉았다. 플라스틱 의자는 뜨거웠고, 그 열기는 오래된 죄책감처럼 쉽게 식지 않았다.
아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둘째는 포대기 속에서 꿈틀거렸다.
“아빠, 어디 가?” 첫째의 눈동자는 너무 맑았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 다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비밀 기지 찾는 중이야.” 완벽한 거짓말. 주머니엔 동전 몇 개와, 302호 열쇠뿐이었다.
그때 둘째가 울음을 터뜨렸다.
배고픔의 비명.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소리. 아내는 말없이 포대기를 풀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기둥 뒤 그늘로 걸어갔다.
그녀의 등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 등을 보았다.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가장 크게 만들었다. 열차 도착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부산행 무궁화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캐리어 바퀴 소리, 뛰는 아이들 소리, 땀 냄새와 먼지가 뒤섞였다.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가는 얼굴들이었다.
아내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목덜미엔 땀띠가 번져 있었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소란스러운 역 한복판,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그곳에서
젖을 무는 아이의 얼굴만이 고요했다.
성화(聖畫).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그림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그 장면이 그림보다 더 정확했다.
그 순간 텍스트로만 알던 문장이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예수님은 집이 없으셨다.
그러나 불안해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속해 계셨다.
“…안 힘들어?”
나는 다가가 속삭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내는 아이 등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보.”
“이 아이한테는 여기가 집이야. 엄마 품이 있으니까.” 그제야 알았다.
집은 등기부 등본에 찍힌 주소가 아니었다.
무너져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었다. 벽돌이 아니라 사랑이 벽이고, 믿음이 지붕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늘 먼저 부서지는 사람의 몸 위에 세워졌다.
“우리 집, 번지수가 없네.”
“응. 움직이는 집이니까.”
나는 주머니 속 144호 열쇠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의 온기에 점점 미지근해졌다.
버리고 싶던 열쇠가 아니었다.
잠시 맡겨둔 짐표,
다시 찾을 날이 있을지도 모르는 증표였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땀에 젖어 끈적였지만, 세상 무엇보다 단단한 기둥이었다.
“가자. 다음 집으로.”
폭염은 여전했고, 아지랑이는 아스팔트 위로 춤을 췄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길 잃은 부랑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집은 두 발로 걸었고,
그 집의 중심에는 사람 하나가 품고 있는 사랑이 있었다.
-하늘 바구니(김필곤목사 콩트집) 중에서-
작가의 한 마디:
집은 머무는 곳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품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영원한 집은 먼저 부서지는 사람의 몸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늦게 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 집.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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