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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드리운 십자가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158 추천수:1 218.147.218.173
2025-12-21 14:03:31

구유에 드리운 십자가

낯선 거리 한복판에서 스마트폰 배터리 잔량이 붉은색으로 깜빡일 때의 공포를 아십니까? 충전기는 없고, 보조 배터리마저 방전된 상황. 화면이 꺼지는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우주에 홀로 표류하는 미아가 된 듯한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현대 심리학은 이런 상태를 단절 불안(Disconnection Anxiety)’이라 부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하게 연결된 초연결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시대보다도 고립을 두려워합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 감정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화려한 트리 불빛과 SNS 속 행복해 보이는 타인들의 모습 사이에서, 나만 세상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것 같은 소외감이 스며듭니다. 사람들은 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파티를 열고,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이와 전혀 달랐습니다.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는 이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했습니다. 그의 작품 죽음의 그림자속에서젊은 예수님은 목공소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기지개를 켭니다. 그러나 양팔을 벌린 그분의 몸 뒤로, 벽에는 선명한 십자가 모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 없는 전율에 잠깁니다. 이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성탄의 구유는 낭만의 시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서막이라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 가운데 몰약은 시신을 염습할 때 쓰이던 향품이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 그것도 가장 처참한 죽음을 예고받은 탄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십자가의 고난을 채찍질과 못 박힘 같은 육체적 고통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터뜨리신 절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의 핵심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우주적 단절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단 한 번도 분리된 적 없던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그 순간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묻습니다알고 오신 길 아니었는가? 신이면서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가?” 그러나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예수님이 감당하신 대속의 깊이를 증명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한 윤리적 실수가 아닙니다. 죄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콘센트에서 뽑힌 전구가 더 이상 빛을 낼 수 없듯,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그 순간, 거룩하신 성부 하나님은 죄 그 자체가 된 아들을 외면하셔야만 했습니다. 우주적인 침묵, 완전한 외면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의 비명 앞에서 아버지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절규는 상황을 몰라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의 실체인 완전한 고독철저한 유기를 실제로 통과하고 있다는 처절한 선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초연한 얼굴로 이 정도쯤이야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연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끊어지셨고, 실제로 버림받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실존적 소외라고 부릅니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선언합니다. 당신이 느끼는 그 고독의 밑바닥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내려가셨다고 말입니다. 구유의 나무가 십자가의 나무가 되기까지, 그분이 감당하신 단절 덕분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성탄은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성탄절에는 화려한 트리 너머에서 구유에 드리운 십자가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예수님이 치러낸 혹독한 버림받음의 대가입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배터리가 다 된 것처럼 깜빡이고 있습니까?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외로움 속에 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독보다 더 깊은 심연까지 내려가셨던 예수님이, 이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연결이 되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는, 바로 이 영원한 접속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 단절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접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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