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치유(1)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예레미야17:14; 8:18-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917 추천수:7 220.120.123.244
2021-06-06 13:32:12

치유(1)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예레미야17:14; 8:18-22

 

6월 첫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제가 “치유”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 열풍으로 우리가 움츠리고 있지만 한 때 우리 사회는 “웰빙(wellbeing), 힐링(healing)” 열풍이 불었습니다. 언론에서도, 마케팅에서도, 사람들의 입에도 “웰빙(wellbeing), 힐링(healing)”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더 나아가 자연 친화적이며 영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코로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유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힐링(healing)이라는 말은 단순한 질병 치료보다 포괄적으로 ‘치료, 회복, 휴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양질의 의료 혜택, 좋은 생활 주거 환경 등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 증가와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각종 먹거리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적인 생존 조건으로 인해 과도한 스트레스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으며, 가족과 이웃 간의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도처에서 알게 모르게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파산, 불치의 병이나 자살 충동, 치명적인 죄의식이나 수치감, 주체할 수 없는 적대감과 분노,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가져온 절망적 상실감,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삶의 의미와 의욕 상실 및 허무 등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치명적인 질고와 사고, 상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전인적 치유란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인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치유의 첫 번째로 살면서 당한 수많은 상처로부터 치유 받으려면 근본적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이가를 말씀에 근거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은 산 나이만큼 상처를 가지고 삽니다. 인생의 상처는 나무의 나이테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물었을 때의 흔적, 영양이 충분했을 때의 흔적, 폭풍이 많았을 때의 흔적을 나이테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상처, 어머니의 상처, 친구들의 상처, 애인의 상처, 남편의 상처, 아내, 자녀의 상처가 흔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상처가 치유되지 못해 불행하게, 평생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케이 아더(Kay Arthur)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와 남편은 1970년에 프리셉트 국제본부를 창설했습니다. 케이는 삶을 위한 교훈들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명강사로 매일 라디오와 TV, 그리고 인터넷으로 8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쓴 <영적 치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서두에서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첫 남편은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리”라는 문구를 새겨 결혼반지를 해주었답니다. 결혼 생활 6년 만에 남편은 자신을 때렸다고 합니다. 축축한 코피가 입술로 흘러내릴 때 그는 남편에게 “이제 끝이에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다음 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였고, 목사님으로부터 별거하는 것이 낫겠다고 잘못된 조언을 받았답니다. 그 목사님의 조언대로 두 아들은 자신이 맡기로 하고 별거를 했답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남편과 별거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그의 꿈은 결혼해서 자신의 부모님들처럼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답니다. 자신의 남편과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골프를 치며 행복하게 살 것으로 기대했답니다. 그러나 결혼 6년 만에 모든 꿈을 깨어지고 악몽으로 변해 버렸답니다. 별거할 때만 해도 그보다 더 큰 상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답니다. 남편은 전화를 걸어 정신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곤 했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녀가 남편에게 했던 그 끔찍한 말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가끔 전화해 남편은 자기가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그렇다면 가서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제가 당신 유산을 상속받지요!”라고 매몰차게 말했답니다. 남편의 상처는 전화를 걸 때마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더욱 깊어지는 것 같더니 결국 자살하고 말았답니다. 아내에게 받은 상처로 인생을 자살로 마감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상처를 주었고, 자신도 상처를 받았지만, 남편의 자살로 인한 상처, 남편과 별거로 인한 두 아들에게 준 상처, 그 후 계속 정결치 못한 삶으로 인해 아들들에게 주어진 상처를 주님 앞에서 치유받고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상처를 치유받은 그녀가 책에서 맨 처음 인용하는 구절이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 두 번째 인용하는 구절이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18,21-22)”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상처가 아무리 깊고 끔찍한 것일지라도 “길르앗의 유향을 바르는 방법, 위대한 의사의 처방을 따르는 방법, 그분의 약이 약효를 낼 수 있도록 시간을 드리는 방법”만 알면 치유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 깊은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집니까?

치유에 대하여 글을 쓰는 기독교학자들은 깊은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6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 대인 관계의 어려움입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실연을 당하여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모든 사람을 사기꾼으로 볼 수 있고, 상처가 치유받지 못하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태도와 또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의존하려는 태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둘째,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결여된다고 합니다. 나는 별수 없어 실패한 인간이야라고 말하고, 매사 의욕이 상실된다고 합니다.

셋째,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태도를 가진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다른 사람, 부모 혹은 세상의 모순 탓이라고 말하고 원망하고 분노한다고 합니다.

넷째, 우울증과 강박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한다고 합니다. 무기력, 신경쇠약,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진정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고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영적인 삶에 있어서 심한 굴곡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어떤 사람보다 신앙이 좋은 것같이 보이다 신앙이 곤두박질하면 교회를 등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처하신 성도님을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 성도님들 중에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로 대인 관계의 어려움을 격고 있으신 분 계십니까?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끄집어내어 되새기고 분노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상처난 기억 때문에 우울한 삶을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은 감정의 사슬 때문에 신앙의 참 즐거움을 모르고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부모에 대하여, 시어머니, 시아버지, 남편, 아내, 친구, 자식에 대하여 아직도 감정의 응어리를 풀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고 복수의 때를 기다리는 원한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신앙인으로 참 자유와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상처를 치유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2. 모든 상처의 치유자이신 하나님께 나오면 됩니다.

어떤 상처일지라도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낫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다” 사람에게 치유받으려고 하면 오히려 수치만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애굽이나 바벨론 사람을 의지하며 치유받으려고 했지만 수치만 당했습니다. 오늘 날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남모른 상처를 누구에게 말하면 그것이 나중에는 수치의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수치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5-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저주를 받는 다고 말씀합니다. 저주를 받은 인간은 어떤 사람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보다 인간을 믿는 사람입니다. 육신으로 그 힘을 삼는 자입니다. 마음이 여호와께서 떠난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사람이 살 수 없고 외롭고 거친 땅, 돌덩이만 쌓여있는 광야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래바람만 휘몰아치는 황야에서 볼품없이 가시덩굴만 내뻗치는 한 그루 관목과 같은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좋은 일을 보지 못하고 행운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보다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인정하기 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죄악 중에 출생한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진정한 치유자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치유”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라파'입니다. 6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그 뜻은 '고치다. 치료하다. 수선하다. 완전하게 하다. 멈추다, 잠잠하다, 끝내다.'입니다. 고통과 아픔을 끝내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가 “여호와 라파”입니다. 출15:26절 보면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이 병, 마음의 병, 육신의 병, 관계의 병 등 모든 상처를 고쳐주시고 끝내주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믿습니까? 우리의 죄와 죽음을 해결해주고, 고난을 멈추게 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끝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전인 치유를 해주십니다.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신명기32장 39절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께 돌아오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집니까?

7-8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여호와께 돌아오면 틀림없이 좋은 때가 옵니다(7). 분명히 복을 받을 때가 옵니다(7). 물댄 동산에서 자라는 과일나무와 같이 됩니다(8). 아무리 가물어도 수로를 향하여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길고 지루한 가뭄도 무섭지 않습니다. 여름철의 뙤약볕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언제나 푸르고 싱싱합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에게는 전혀 고통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무성할 것입니다.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로 곪아 고통스러워하지 마시고 여호와께 나와 이런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예레미야 시대에 남왕국 유다 백성들은 죄로 얼룩져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죄는 평민에서부터 제사장, 선지자, 왕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계층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나라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 평화”를 외치고 다녔지만 진짜 평화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계속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강조합니다. 코로나 19시대 인류가 근본적으로 치유받는 길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질병으로만 생각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4. 상처로 인한 고난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확성기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고난을 겪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10년 이내에 이보다 엄청난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온난화가 지속되면 머지않은 2030년이면 인천 공항 활주로가 바닷물에 잠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계화를 말하며 자유롭게 왕래하던 세계인이 코로나 19의 세계적인 확산으로 지구촌은 패닉 상황에 놓였습니다. 코로나19의 등장은 앞으로 다가올 재앙의 서막으로 전염병이 일상화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구 온도가 상승하면 빙하가 녹고 그 속에 얼어있던 미지의 박테리아들이 전 세계로 퍼질 것이고, 아예 존재 자체를 몰라서 걱정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질병이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2050 거주불능 지구> 저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달궈지는 지구는 30년 후엔 사람들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2050년 기후난민이 최대 10억 명에 이르고, 여름철 최고 기온이 평균 35도 이상인 도시는 970개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25만5천 명이 폭염으로 죽고, 50억 명 이상이 물 부족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온이 2℃ 상승하면 적도의 주요 도시가 거주불능 지역으로 변화하고, 북극의 빙상이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 평균 온도가 4도만 올라도 아프리카, 호주, 미국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으며 5도가 오르면 전 지구가 거주 불능 지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이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행성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살인적인 폭염', '빈곤과 굶주림', '마실 수 없는 공기', '질병의 전파', '무너지는 경제', '기후 분쟁', '시스템의 붕괴' 등 모두 12가지 주제로 기후재난의 실제와 미래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짚어나가고 있습니다.

자본과 기술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망상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문제 해결을 못하게 하는 첫째 주범은 경제적 요인으로 과생산•과소비를 지향하지 않으면 몰락하는 현재의 시장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는 정치적 요인으로서 민주주의 체제라고 합니다. 정부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선거를 통해 정부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국제관계적인 요인으로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고 국가 간 경쟁 체제 속에서 범국제적 기후협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민족국가 체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대한 문제는 개개인이 지구온난화 현상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알신을 섬겼는데 그 신이 자본의 신, 돈 신입니다. 정치인들은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국민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고,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강대국의 눈치를 하나님보다 우선해 보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지구에겐 인간이 코로나가 되어 지구를 죽일 것이라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하며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 이후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끼리 왕국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7절-42절에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면서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하나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경고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라는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무신론 자들은 "안심하세요. 지옥은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즐기세요."라고 외칩니다. 내세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생은 이 땅으로 끝이고 인생은 단지 세포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산소와 질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듯 하나님의 존재가 가시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라고 말씀합니다.

노아 시대 때 결국 홍수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깨어서 방주를 준비한 노아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세상 향락에 도취되어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과 함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에 <코로나 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라는 책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존 레녹스가 지은 책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분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대표적인 무신론자들과 공개 논쟁을 벌였으며, 현재 세계적인 강사로 활약하고 있는 기독교 변증가입니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적이고, 감정적이고,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서양에서 국가적 재앙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갔고 국가 지도자들은 기도를 요청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 현상을 지금은 보기 드물다고 합니다. 세계 전역에서 교회들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문을 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수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가 격리 중이라 접근할 수 없느냐고 질문합니다. 하나님도 자가 격리 중이면 누구로부터 진정한 위안이나 희망을 얻을 수 있을까 질문합니다.

그러면서 2020년 3월 10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마티아 페라레시의 글을 인용합니다. “뜨거운 물은 손 소독제가 아니고 기도는 백신이 아니다. …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종교가 영적 치유와 희망의 근본적인 원천이다. 그것은 안녕의 필수 요소인 심리적 및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절망의 치료책이다. 또한 여러 의료 전문가들이 우리 시대의 가장 걱정되는 공중보건 이슈의 하나로 지적하는 외로움의 해독제이기도 하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종교가 예배자들에게 궁극적인 의미의 원천이다. 모든 종교의 가장 심오한 주장은 존재 전체를, 특히 고통과 환란으로 채색된 상황을 이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그러면 신체적 건강조차, 더 큰 목적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무신론은 궁극적으로 고난이 문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코로나’는 왕관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왕관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하는데 이 바이러스는 우리 인간에 대해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와 창조 세계의 관계, 창조 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비틀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왕관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가 처형되기 전 재판을 받을 때 그의 머리에 쓰였던 가시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그 코로나는 피조물과 창조주 간의 단절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지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이 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입자와 청지기일 뿐이고 그것도 결함이 많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구에 행한 짓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삶과 심지어 타인의 삶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지구에서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빠르게 부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려주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메가폰을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C. 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여 코로나는 하나님의 확성기 역학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예외 없이 죽는다는 엄연한 진실을 상기시켜주는 확성기. 이 확성기 덕분에 우리가 오랫동안 무시했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가 그분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되고 죽음 너머 깨어지지 않은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면, 코로나바이러스는 그 엄청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목적을 이룬셈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류를 향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가 기록될 때도 질병과 전쟁과 기근을 통해 하나님을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렘3: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렘3:14”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예레미야 3: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렘4:1)”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렘25:5)”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렘31:21)”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렘30:17)”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33:6-8)”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아 치유받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그 후 돌아 오지 않은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님을 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치유 받지 못한 사람은 사중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육체적 고통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절망의 고통입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은 고통중에 죽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셋째는 사회적 소외의 고통입니다. 병자들은 치유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가족과 일가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넷째는 종교적 죄의식의 고통입니다. 병은 병균이 아니라 병마가 가져다 주는 것이며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았으며 부정하고 불결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상처를 전인적으로 치유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치유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치유자로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치유하면서 예수님을 그들에게 주로 4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첫째,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합니다(마9:2; 막2:5; 눅 5:20). 둘째는 믿음이 낫게 했다고 말씀합니다(막5:34; 10:52). 셋째,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넷째,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전인 치유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계급이나 성별이나 민족적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불쌍히 여겨서 무상으로 치유해 주었습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건강한 아이만 양육하고 나면서부터 결함이 있는 아이는 버려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이스토텔레스도 <정치론>에서 불구의 아이들은 절대로 양육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네로 시대의 현자 세네카도 <분노론>에서 “병든 양을 칼로 찔러 다른 양들에게 감염시키지 못하도록 한다. 자연스럽지 못한 자손은 없앤다. 약하고 비정상적인 것은 아이일지라도 물에 빠뜨린다. 해로운 것들은 건전한 것들로부터 구별해 내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병자들이 먼저 들어가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천국 잔치에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3)고 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를 택하고 가버나움에서 첫 번째로 한 공적인 활동이 병자의 치유였습니다(막1:21-27).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단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눅7: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초청해 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어떤 상처가 있다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마음만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전인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비록 이방 민족일지라도 심판받은 애굽이 다시금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그들을 고치실 것입니다(사19:22).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자기 백성의 맞은 자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사30:26),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든 간에 그들을 반드시 고쳐 주실 것입니다(사57:19). 우리의 눈문을 다 닦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게 하여 치료하는 광선을 그들에게 비추실 것입니다(말4:20).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 )의 찬송이시오니 (나 )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 )가 낫겠나이다. (나 )를 구원하소서 그리하면 (내 )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6.6.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