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일어나는 가정(1) 희망의 산실(출2:1-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640 추천수:4 220.120.123.244
2021-05-02 12:41:47

일어나는 가정(1) 희망의 산실

출2:1-10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이 되면 늘 가정을 주제로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 열린교회 가정 식구들이 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우리 성도님들의 손자 손녀의 이름이 잘 기억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본 아이들은 얼굴들이 기억되기 때문에 아들딸은 물론 손자 손녀까지 가능한 한 건강하고 잘 되기를 위해 매일 기도를 드립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코로나19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때인데 우리 열린 교회 모든 가정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떨쳐버리고 일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일어나는 가정>이라는 주제로 한 달 동안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일어나는 가정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우리 열린교회 식구들이 경제적 어려움, 사고, 질병, 중독, 장애, 불임, 불화, 이혼, 실직, 실패 등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어나는 가정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건강을 잃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걱정과 불안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우울한 자리에서 일어나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쓰러지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얼마든지 절망의 산실에서 죽음의 산실에서 살리는 산실, 희망의 산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가정은 모세 가정입니다. 아버지가 아므람이고 어머니가 요게벳 입니다(출6:20). 아므람의 이름의 뜻은 "고상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요게벳은 "여호와는 영광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으로 이름처럼 고상한 백성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면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결혼할 때 아들딸 낳아 이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모세의 부모가 맏딸을 낳아 '미리암'이라고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쓰라림'이라는 뜻입니다. 맏아들을 낳아 '아론'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뜻은 '이 임신에 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픈 현실입니까? 그래도 첫 딸과 첫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그런대로 살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를 임신할 때 가정에 엄청난 문제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 1장 8절을 보십시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렸습니다. 정권이 바뀐 것입니다. 통치자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통치자가 무엇을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히는 것입니다.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수가 많아지면 전쟁 때 적들과 연합하여 반역하고 탈출할까 봐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15-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산파들에게 남자 아이가 낳으면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사는 동네에 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셋째를 임신했을 때 아마 하나님께 간절히 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죽게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사람 아므람과 요게벳 가정은 죽음의 산실, 절망의 산실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산실,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희망의 산실이 되어 그 아들을 살려내어 2남 1녀를 민족을 노예로부터, 죽음의 자리로부터 해방시키는 위대한 주인공으로 만드는 희망의 사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절망적인 이 시대 속에서 가정을 희망의 산실로 만들어 후손들을 신앙의 위대한 인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1. 가정이 희망의 산실이 되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녀들을 보아야 합니다(2).

가정은 세상의 인물을 만드는 모판과 같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태어나자 마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지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불안과 걱정, 희생과 피해를 강요하는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석달 동안 숨겨 살렸는데 그 이유를 “잘 생긴 것을 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그저 단순하게 잘 생겨서 살리고 싶었겠습니까? 자신들의 목숨과 맞바꿔야 할 위기의 상황인데 그런 단순한 이유로 모세를 살렸겠습니까? 이 말은 원어로는 "토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단순히 아들이 잘 생겨서 숨겼다는 의미보도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 20절을 보면 그 이유를 조금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행 7:20)" 모세의 아버지가 3개월을 숨겨 기른 이유에 대하여 여기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토부라는 말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동일하게 하나님 시각으로 자식을 바라 본 것입니다. 자녀에 대하 기본적인 태도가 희망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낙태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하루에 1000명 이상, 1년 36만명 이상이 태아가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원치 않게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고,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천덕꾸러기 자녀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파괴되고, 부부 사이가 갈라지고, 사회로부터 천대를 받은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격이 맞지 않는 아이가 태어날 수 있고, 외모가 너무나 보기에 힘든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성별의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양육하면서 “왜 내가 이런 자식을 낳아 이런 생고생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에게 고생만 시키는 아이로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짐같이 생각하는 어린 아이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으며, 어린 아이를 사랑하십니다.

가정을 희망의 산실이 되게하는 가정을 만드는 부모는 자식을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짐덩어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단지 물건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들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들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어 이 땅에 보낸 자녀이므로 비록 장애를 가졌다고 해도, 비록 다른 아이에 비해 아이큐가 둔하고, 비록 외모가 부족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신 가장 고귀한 생명으로 지켜내야 합니다. 어느 자녀일지라도 우연히 태어난 아이는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생명이라고 고귀하지 않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무명의 사람 노예, 그것도 죽을 수밖에 없는 악한 세상에 태어나게 했겠습니까?

바로의 눈에는 죽을 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로 태어났습니다. 출애굽기 4장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출 4:11)"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부르기 위해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창15:13-14절에서 400년이 지난 후 해방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 사명을 성취하는데 모세와 그 가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민족을 해방하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사탄은 그 메시아적 언약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바로를 사용하여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헤롯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궁극적으로 사탄이 우리 자녀들을 죽이는 환경을 통해 주신 사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어 우리 자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신묘막측함으로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살려고 태어난 사람이고 백성을 살리려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민족을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아무리 나쁜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초라한 목동으로 태어난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 22:9-10절에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母胎)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는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母胎)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예언한 이사야를 보십시오. 이사야 49:1-3절에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胎)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腹)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예레미야 1:4-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腹)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세례요한(눅1:13-16)도 바울도(갈1:14-16)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 우연히 태어난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신묘막측함으로 태어났습니다.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가락이 두 개뿐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그는 지금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세계를 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행복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 내에서 죽였거나 부모가 방치했다면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전하는 그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를 보십시오. 장애인으로 정상인도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합니다. 강연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손을 번쩍 들어 주먹을 꽉 주라고 주문하면서 "You can do it" 선창하면서 따라 하게 합니다. 내 가정 환경이 나쁘다고 아이들까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노예의 아들이지만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노예를 해방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시련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 오경을 기록하였습니다. 루터 아버지 광산 노동자였습니다. 김활란 박사의 어머니는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양잿물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링컨은 너무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꼭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야만 시대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취니크 박사는「의학과 위생학」지에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역사를 움직인 300여명의 지도자가 고아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 황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조지 워싱턴,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해상을 장악함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던 골다 메이어,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드골 장군 등, 300여 명의 인물들이 고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루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데카르트는 한 살 때, 파스칼은 세 살 때 각기 어머니를 잃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였고 바흐는 고아였습니다. 루소, 스탕달, 보들레르, 포우, 단테, 톨스토이, 바이런,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등도 모두 고아였답니다.

 

2. 가정이 희망의 산실이 되려면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3-4).

거대한 악 앞에서 모세의 생명을 살리고 양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할 일입니다. 심히 두려운 일이고, 심히 고달픈 일입니다. 그 아들을 위해 큰딸과 큰아들에게 피해를 주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매달릴 정도로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 비결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11:23)"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석달동안 숨겨 양육했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이들 보호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행동을 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어떤 포기의 상황에서 희망을 품고 믿음으로 창조적 계획을 세워 실천한 것입니다. 나일강에 아이를 그냥 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마 바로 공주의 딸이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 양자 삼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지혜를 가지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바고 공주가 목욕하는 장소에 가져다 놓았을 것입니다.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6690km 나 된 강으로 서울 부산 10배 넘습니다. 그 중 바로 공주가 목욕하는 곳을 알아 놓은 것입니다. 시간을 알아 놓은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믿음으로 모험을 시도한 것입니다. 애틋한 모성애의 반영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를 기대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미리암으로 하여금 멀리 지켜 보게 했습니다(4). 자식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행위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믿음으로 자녀를 최선을 다해 양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녀를 바라보고 끝내면 안 됩니다.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에는 지혜가 따라야 합니다. 지혜 없는 믿음은 맹신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지혜입니까? 최선을 다하는 지혜입니다. 구체적으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자식을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최선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어머니인 자신이 젖을 뗄 때까지 양육하게 됩니다. 이때 믿음으로 양육한 것입니다. 적어도 3년 내지 5년은 믿음으로 양육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애굽의 왕자로 세상 학문을 배웠습니다. 전혀 믿음과는 관계없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80이 되었는데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민족 해방을 위한 지도자로 쓰임받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11장 24-25,27절에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똑같은 믿음이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정에서 어머니의 믿음 교육에 있었습니다. 모세 어머니의 짧은 조기 믿음 교육은 40년 세련된 왕궁 교육 보다 더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의 믿음의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모세 어머니의 이런 지혜로운 믿음의 행위가 없었다면 모세는 이 땅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방신을 섬기는 애굽 문화에서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을 품 안에 있을 때 조기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교육의 현장에 무신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그렇습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종교 관련 경로로 발생한 확진자 수는 전체의 8.8%라고 합니다. 대면 예배 때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면 드리면 거의 감염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론 보도와 방역당국의 브리핑 과정에서 한국교회를 실제 이상으로 집중조명함으로 인해 일반인 84.2%가 기독교를 부정적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기독교인이라는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준다고 하니까 1년 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에 나간 아이들이 13%만 교회에 나가고 87%는 교회를 떠났다는 자료도 나와 있습니다. 아이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때입니다.

세상은 무신론이 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만들어 주고 건강과 자유와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신론으로 무장한 가정이 정말 행복합니까? 동성연애를 합법화하고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데 누가 간섭하느냐고 살아가는 세상이 진정 행복한 세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절대적인 기준이 상실되어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권위가 상실되고, 절대적인 해답이 없어지고, 가정의 목표는 출세와 돈에 있다고 살면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살면 이혼율이 줄고, 자살율이 줄고, 낙태율이 줄고, 청소년 탈선율이 줄고, 성적 타락과 가정 폭력이 줄고 노인문제나 미혼모 문제가 잘 해결되어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됩니까?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 다 제멋대로 살면 자녀들이 잘 됩니까?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반기독교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가정을 자녀 신앙 훈련의 산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프뢰벨은 "아이는 다섯 살까지 일생동안 배우는 전부를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과장되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길버트 비어스(아장아장 성경의 저자)는 말했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3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태어나서 세 돌(3세)까지'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첫 3년 동안 인생의 기초가 되는 모든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카고 대학의 벤자민 부른(Benjam.S.Bloon)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지능은 4세까지 50% 그리고 8세까지 80%가 발달하고 지능의 이러한 발달에는 환경의 적응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엘릭슨(E.Erkson)같은 학자도 "아동기의 경험이 성인기까지 확장된다"고 말합니다. 뇌의 90%는 3세 전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성격의 85%는 6세가 되면 이미 형성된다고 합니다. 어릴 때 믿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젖떼기 전까지 품에 안고 신앙 교육을 시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듭니다. 다니엘과 보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신앙으로 이방 나라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총리로서 당당하게 정치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받은 신앙 교육 때문입니다. 유아 때부터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에 아이를 맡기지 말고 어머니가 진실한 신앙으로 같이 예배에 참석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찬양 부르고, 같이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기 교육의 원조인 칼 비테 목사의 아들 주니어 칼 비테가 <칼 비테의 공부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조기 교육 이론서로서 지난 200년 동안 영재교육의 "경전"으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책입니다. 칼비데 목사의 소신 중 하나는 아버지로서의 첫 번째 임무는 자녀를 위해 좋은 엄마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중요시 한것은 태교였습니다. 시골 목사님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52세에 Jr. 칼 비테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9개월 만에 태어난 조산아로 목에 탯줄을 감고 나와 발육 부진에, 잦은 병치레뿐만 아니라 지적장애인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저능아가 어떻게 천재가 될 수 있느냐며 쑥덕거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사람들 말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답니다. 믿음으로 조기 신앙 교육을 시켰습니다. 9세 무렵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답니다. 9세 때 프로이센의 괴팅겐 대학에 입학했고 13세에 기젠 대학으로부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6세 때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업적을 남겼고 1883년 8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국왕의 뜻에 따라 독일의 각 대학에서 법학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칼 비테 목사의 조기 교육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조기 신앙 교육입니다.

감리교위 창시자 요한 웨슬리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습니다. 수산나는 매일 밤 그 많은 자녀들의 머리 맏에 앉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으며 경건의 연습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엄격한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5세가 되면 주기도문을 암송케 하고, 성경을 통독하게 하고, 알파벳을 가르치고, 집안 일을 거들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침과 저녁 한 시간씩은 가족 기도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기 원하면 최선을 다하는 지혜를 동반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를 때 나쁜 환경이라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환경의 제물로 아이들을 바쳐서는 안 됩니다. 도저히 기를 수 없는 환경이라고 자식을 미리부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르지 못하도록 수많은 덫을 놓고 우리를 하여금 포기하게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여 가정을 진정한 희망의 산실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라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 가정이 희망의 산실이 되려면 자녀를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5-10).

모세의 어머니는 자신이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왔습니다. 바로의 무남독녀 외딸입니다. 법적으로 왕위 계승자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공주가 그곳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의 섭리입니다. 새 시대의 지도자 모세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애굽 왕실의 화려한 왕실의 목욕탕을 놓아두고 그 시간에 처녀인 공주가 모세가 있는 나일강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 것입니다. 시녀들은 감시하기 위해 나일강 강가를 거닐고 있는데 바로의 딸이 목욕도 하기 전에 모세를 발견합니다. 열어 보니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히브리인의 아이는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 아이인 줄 알면서도 죽일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때 미리암이 뛰어갔습니다.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공주는 허락했습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히브리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을 것같은 아이는 권력 핵심부에 있는 딸에게 발견됐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미리암은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삯을 받고 아이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이가 자라기까지 어머니는 모세를 길렀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믿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장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이들이 지금 당장 잘못된 길로 간다고 너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17년 정도를 피신하며 미친 짓도 했고, 범죄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은혜로 그를 보호하고 훈련하여 성군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가정도 없습니다. 마치 가정은 천국이 되어야 하고 천국처럼 생각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은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때로는 가장 많이 상처를 받는 곳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최초의 가정 아담의 가정은 형제간의 살인이 있었던 가정입니다. 제 2의 인류의 시조라고 하는 노아의 가정을 보십시오. 한때 아버지가 자식들을 저주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은 롯의 가정을 보십시오. 근친상간이 이루어진 가정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내가 둘이어 시기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결국 배다른 아들을 내어 쫓아내야만 했습니다. 다윗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아들 끼리 죽이는 골육상잔이 벌어집니다. 모세는 살인하고 광야로 도망가 40년을 초야에 묻혀 살았습니다. 때로는 모세의 가정처럼 내가 계속 기를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의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별의 과정을 겪어야 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연약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명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80년 후 민족 해방을 위해 40년 동안 쓰임받게 만들었습니다. 고난도, 방황도, 원하지 않는 일도 은혜의 과정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연약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명기 34장 10절에 "그후에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의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2장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하니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선지라로 학문과 인격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며 부모의 의지대로 자녀를 로봇으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씁니다. 그는 한평생을 고아를 위해서 헌신하였고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어느 누구도 그 은혜 앞에 쓰임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에 자녀를 맡기는 산실이 되면 우리 하나님은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 우리 자녀를 한 시대 쓰임받는 인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자녀들을 세상에 맡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자녀들을 돈에 맡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당대 최고의 부자 중 하나였던 믿음의 사람 힐튼이 1979년에 죽을 때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식들에게는 호텔 경영권만 넘겨주고. 손자들에게는 1인당 10,000불씩만 남겨 주며 하나님께 맡겼다고 합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 최적의 은혜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37:5)”,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고, 우리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며, 우리 하나님이 돌보아 주십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한 나라의 힘은 그 나라 국민들의 가정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사회 비평가 존 러스킨은 "인류 역사는 세계의 역사가 아니라 가정의 역사"라고 갈파한 후 " 한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의 가정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고 한 나라의 생존은 가정의 생존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 것처럼 가정은 참으로 중요한 기관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은 우리 자녀에게 희망을 주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1. 가정이 희망의 산실이 되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녀들을 보아야 합니다(1-2).

2. 가정이 희망의 산실이 되려면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3-4).

3. 가정이 희망의 산실이 되려면 자녀를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5-10).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5.2.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