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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해석의 근거, 섭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창50:19-2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055 추천수:3 220.120.123.244
2020-12-13 08:55:48

사건 해석의 근거, 섭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창50:19-21

 

우리는 지금 우리 생애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사업은 문을 닫아야 하고, 아이들을 유치원이나 학교에 정상적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고, 일부 직장인은 집에서 근무합니다. 자유롭게 드렸던 예배도 집에서 드려야 하고, 혹시 만나는 사람이 코로나 환자일까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다양한 일을 만나는데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일까요? 아니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일까요? 어떤 사람은 결정론을 주장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때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정론입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운동은 이미 그 전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어떤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론(숙명론)을 주장합니다. 운명론은 세상의 사건은 모두 미리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고,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결정론은 인과관계로 말미암아 필연으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숙명론은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세상의 사건은 모두 미리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정론은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양자 역학이 생기면서 물체들의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성경 첫 장 첫마디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니니라(창1:1)”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편103:19)”라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세상을 다스리시고(마태복음5:45), 나라들의 사건들과(시편66:7), 인간의 운명(갈라디아서1:15), 사람의 성공과 실패(누가복음 1:52), 자기 백성의 보호(시편4:8), 가장 사소한 것(마10:29-31),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잠16:33, 왕상21:19-24, 왕상22:17,34-36), 선한 일(빌2:13), 악한 일(욥1:11-12, 2:4-6), 등도 다 하나님이 주관하며 다스리십니다. 그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은 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일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에 의해 되어진다고 숙명론적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결정되어 진대로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창조해 놓고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칙과 윤리 법칙에 따라 살도록 방치해 놓고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신론, 자연신론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은 물리 화학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유물주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우연이나 숙명론이나 물질적 결정론을 섭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결코 자족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해 놓고 인간 마음대로 하라고 구경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을 던져진 시계처럼 스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물리 화학 법칙만 만들어 놓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은 창조물을 유지와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만드시고 빛을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 태양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 태양 주변을 지구나 달이 자전과 공전을 하며 돌고 있습니다. 창조 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궤도를 그 시간에 맞춰서 돌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법칙을 정하시고 법칙대로 돌게 하지만, 하나님이 그대로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에 변함이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오래되면 망가지고 기능을 잃는데 이렇게 엄청난 우주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물이 물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고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서로 섞이거나 변질됨이 없이 나무가 나무로, 원숭이가 원숭이로 물질의 특징이 그대로 유지되고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물이 어느 순간 갑자기 불로 바뀐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유지 보존하기 때문에 과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유지 보존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주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우주의 왕으로 만물의 존재 목적에 따라 통치하십니다.

3) 섭리의 대상에 따라 일반섭리와 특별 섭리로 통치하십니다. 일반 섭리는 우주 만물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고 특별 섭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것입니다.

4) 섭리 방법에 따라 통상 섭리와 비상 섭리로 통치하십니다. 통상 섭리는 물질세계의 자연법칙, 정신세계의 마음 법칙에 따라 섭리합니다. 물리 화학 법칙을 만들어 섭리하십니다.

비상 섭리는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떡도 물도 먹지 않는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시고 12 바구니를 거두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물리 화학의 법칙을 초월하기도 하고 역행하기도 합니다. 도끼가 물 위에 떠기도 하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비논리, 비합리가 아니라 초논리, 초합리입니다. 제 1 원인을 제 2 원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요셉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19절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형들에게 인신매매되어 애굽에 팔려 온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에 의한 섭리라는 것입니다. 형들이 해하려고 했던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긴 것도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이 시대에 사는 것, 이 땅에서 부모님을 통해 양육받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부모가 되어 자녀를 양육하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는데 이것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섭리는 믿은 사람들은 과거에 이해 못할 일, 억울한 일, 수치스러운 일,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무슨 말을 하는가 성경을 찾아 보십시오. 창세기 45장 5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절 8절을 보십시오.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 온 것이 형들이 인신매매해서 그 결과로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분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끝없이 남탓하고 원망하고, 트라우마에서 해어나오지 못하고, 보복하고 복수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으니까 숙명론에 빠져 무기력하게 인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섭리는 믿는 사람들은 과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합니다. 과거 이해못할 악까지도 다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합니다. 로마서 8:28은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사탄은 그의 최악을 행할지라도, 심지어 세상을 뒤엎는 악을 저지를지라도, 그 악까지도 더 큰 최종 목적을 이루는데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6~8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우연이나 팔자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밀한 것까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형들이 미워한 것, 웅덩이에 집어넣어 죽이려고 했던 것,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에 인신매매를 해 버린 것, 그것 때문에 노예가 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것 다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해석한 것입니다.

 

2. 섭리를 믿으면 악의 도구로 쓰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때는 악도 허용하고 섭리하십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작정적 허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1 원인이시고 섭리를 통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책임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로버트가 아닙니다.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따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의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모든 선택은 하나님에 의해 강요되거나 프로그램화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얼마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요셉을 해하려고 했습니다.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웅덩이에 집어넣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에 인신매매를 해 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오늘날도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잘살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회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악한 정권도, 악한 무리도, 이해하지 못할 인간도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원수 같은 인간을 만났는지, 왜 처절한 고통을 당하는지, 왜 이런 직장, 이런 가정, 이런 교회, 이런 나라에 사는지? 지금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나고 보면 요셉처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섭리를 이루는데 악의 도구로 쓰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악에 의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다고 요셉의 형들의 악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범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해도 다윗의 범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살인으로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었다고 해도 모세의 살인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악까지도 이용하여 선을 이루게 했을 뿐입니다. 다소의 사울은 고의적으로 교회를 박해 하였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가시채를 뒷발질(사도행전26:14)”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선택으로 고비용을 치르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은 악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었지만 그만큼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악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었다고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악한 도구를 쓰임 받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고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의 손해이고 고통이며 멸망입니다. 바울이나 요셉이 형제들처럼 사랑과 징계로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가룟 유다처럼 죄값을 치르고 심판을 받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형들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강요와 억압을 통해 개입하지 않고 섭리 가운데 그것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들을 로버트처럼 조종하지 않았고, 꼭두각시처럼 통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20절에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이 요셉이 형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어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했다고 요셉 형들의 행동이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이나 악행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일어나야 합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가 거짓말을 하고, 기만하고, 속이고, 훔치고, 마침내 주 예수님을 적들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비상 섭리를 통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데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22에서 이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악 역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인이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베드로도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가룟 유다의 악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유다의 행동이 절대 정당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2차 원인자인 인간의 책임이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 악의 도구가 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의 도구가 되었다면 요셉이 형제처럼 회개하고 돌아오면 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과거가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 되게 하면 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영화감독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투 운동의 대상이 되어 비난받자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미투 운동의 대상이 안 되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해외로 도피하지 말고 잘못이 있었다면 깨끗하게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깨끗하게 회개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악한 도구로 쓰임 받았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3. 섭리를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섭리를 이루는데 요셉은 어떻게 쓰임 받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형들이 요셉에게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과거 자신들이 행한 일로 요셉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보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때 요셉을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심판자가 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섭리를 믿은 사람은 자신이 악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처럼 될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심판자가 되지 않겠다는 확실한 보증을 어떻게 약속해 주고 있습니까?

보복할까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1절을 읽어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9절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복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확실하게 형들과 형들의 자녀까지 기르겠다고 말합니다. 선한 선택을 실제 행함하겠다는 것입니다. 악한 과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관계를 가지며 오히려 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래를 불안해하는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를 합니다.

 

보복하느냐 용서하느냐는 요셉의 선택 문제입니다. 보복이 섭리라고 우길 수 있습니다. 요셉은 절대 강자이지만 하나님의 용서처럼 자발적인 용서를 합니다. 인내하고 참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라는 복수할 막강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형들에게 정당하게 형벌을 가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힘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할 수 없는 그와 나 사이 그 중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자신이 온 것이 형들의 인신매매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15:13)"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형들 때문에 애굽에 팔려 왔다는 생각에 집중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원한만 쌓이고 복수할 것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 온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에 집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용서와 감사 및 평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창세기 45장에 나온 것처럼 처음 만날 때부터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울며 다 용서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하여 늘 선택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 선하게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섭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경계선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 인성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하심으로 인도합니다. 네게 유익이 없다고 해도, 나에게 편리함이 없다고 해도, 내게 기쁨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를 다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하게 말씀 붙들고 하나님이 섭리를 이루어 드리시길 바랍니다. 운이나 우연, 요행이나 재주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요셉의 이런 태도는 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나처럼, 다니엘처럼, 느헤미야처럼, 에스더처럼, 룻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임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가인처럼, 에서처럼, 이스마엘처럼, 바로처럼, 사울 왕처럼, 이세벨처럼, 헤롯처럼, 빌라도처럼 악의 도구로 쓰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선한 사람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지금 걱정거리, 근심거리가 있다면 다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다 맡기고 운명론자처럼 기다리지 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더욱 적극적으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시길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6,31,33)”

우리를 평안히 눕게 하시고 안전하게 살게 만들어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지켜 주시고 안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수들이 둘러싸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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