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요한계시록5:7-1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77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8-23 18:40:02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요한계시록5:7-14

 

사람은 일평생 동안 욕구 채우기 위해 애를 씁니다. 매슬로라는 사람은 인간의 기본 다섯가지 욕구를 말합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 졸리면 잠을 자고 싶은 욕구, 성욕 등과 같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강력한 욕구입니다. 2단계는 안전과 안정 욕구입니다. 육체적 안전과 심리적 안정 등에 관한 욕구로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욕구, 경제적이나 직업적으로 안정감을 갖고자 욕구입니다. 3단계는 소속과 애정 욕구입니다. 타인과의 대인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나 직장, 학교 등에 소속되어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4단계는 존중과 명예 욕구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극대화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추구하며 스스로 이러한 것들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런 욕구들은 대부분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숭배를 받고자 합니다. 위대한 인간 태양이라고 숭배받은 북한의 김정은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일반 사람과 달리 하늘이 내린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자신을 신격화해 버립니다. 그리고 절대권력에 아부하는 인간들은 세 살 때 7개 국어를 통달했다고, 모든 것에 능통한 비범한 식견, 천리 혜안의 예지와 과학적인 분석력, 비상한 통찰력을 가졌다고 우상화시켜 그를 숭배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이나 사물을 스스로 신처럼 믿고 숭배하는 것이고, 우상화란 백성들을 그렇게 믿도록 세뇌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기를 들면 신성모독으로 처벌해 버립니다. 옛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중국 마오쩌둥이 등이 그런 짓을 했고 지금도 북한의 김정은,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등과 같은 사람들이 우상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이야 민주화되고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들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많은 황제가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고 신격화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할 때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는데 그도 자신을 신격화시켰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주요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자신을 살아 있는 동안 신으로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신전에 찾아가 황제를 위해 향불을 피우게 하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주 “주인(도미누스)이자 신인 짐이 하찮은 너희들에게 이렇게 명하노라.”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아담의 후예인 인간들은 힘이 주어지면 누구나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하지만 양심이 본능을 자제하게 하는 것인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그는 형이 일찍 죽고 30살 젊은 나이에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가 되자 자신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고 섬기며 예수님께 예배드린 기독교인들은 그의 신전에 가서 예배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주라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5만명이 수용되는 콜로세움에 기독교인들을 잡아넣어 두고 사자에게 뜯어 먹히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기름을 붓고 밤에 어둠을 밝히는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우상화로 세뇌된 백성들은 그것을 보며 환호하며 기독교인을 반사회적이고 반권력적인 집단이라고 매도하며 그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권력자들은 마찬가지이지만 도미티아누스가 기독교 예배를 금하며 그들을 적으로 만든 것도 하나의 통치의 기술입니다. 자신들의 통치 이념을 실현하고 국민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싸우던지 내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허위의식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어용학자들을 통하여 허위의식을 만들어 국민을 우민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것인 ‘3 S’입니다. 스포츠, 스크린, 섹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독재자들이 늘 써먹는 방법입니다. 그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콜로세움이라는 곳에 스포츠를 통해, 그리고 동성애가 자유스러울 정도로 성적 방종을 통해 백성을 우민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반사회적 집단이라는 허위의식을 기독교인을 콜로세움에 세워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기독교인들이 반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집단이라는 허위의식을 만드는 처형함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기독교인을 증오하게 만든 것입니다. 공포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의 통치 이념에 충성합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두려워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코로나 정국에서 예배를 대하는 권력자들과 언론의 태도고 원리는 비슷합니다. 언론은 교회를 이야기할 때 전염병 예방보다는 예배 금지에 더 방점을 두고 예배 강행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고 있습니다. 예배강행이라는 말을 사용하므로 부정적 프레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예배 강행하는 집단으로 허위의식을 만들어 계속 보도하면 국민은 무의식 가운데 세뇌됩니다. 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미장원에서 거부당하고 병원에서도 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회 발 2차 3차 감염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코로나 19 발원지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중 한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감염이 되어도 교회발 감염이라고 합니다. 청년 한 명은 입대하기 전 친구들과 놀다가 감염되어 교회에 나오면 교회발 감염이라고 딱지를 붙입니다. 그런 말을 수시로 사용함으로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교회를 전염병 예방에 관심이 없는 비도덕적, 반사회적, 반지성적 집단처럼 호도하고 있습니다. 교인도 살다보면 걸리는 것이고 교회도 하나의 감염 경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즈음 되어지는 일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8.15 행사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민노총 집회도 있었고 의사들 집회도 수만명이 모였습니다. 왜 유혹 정부와 언론은 교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언론을 매일매일 보고하고 있습니까? 너무나 일부를 전체로 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은 상식입니다.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자신과 가족과 이웃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일부 교회로 말미암아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마치 코로나 19를 전염시키는 반사회적 집단처럼 만들어 기독교인들은 다수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집단처럼 만드는 것은 예배 공동체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통치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위해 교묘하게 권력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에게 예배드리지 않고 예수 믿으며 예수님께 예배드린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가 통치하는 15년 동안 무려 기독교인 1만 2000명을 정당한 방법으로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잔인하게 살육당했습니다.

그중에는 자신의 사촌과 자신의 누나의 딸도 있었습니다. 사촌과 자신의 누나의 딸이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낳았답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황위를 이을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가 낳은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황제는 “너희들이 나를 주라고 시인하면 살려 주겠다. 나를 신처럼 섬겨라”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촌이었던 클레멘스는 사형을 시켰고 누님의 딸인 조카딸 도미틸라는 섬으로 유배를 시켜 버렸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황제를 숭배하면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막강한 권력으로 존경받으면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차기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예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 이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드리기 참으로 힘든 요즘같은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예배드린다는 이유로 이런 불이익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사람들은 예배를 목숨으로 지켰습니다.

 

기독교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기독교인이고 예배드리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누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합니까?

어린양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 어린 양에게 예배드리는 모습이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렸습니다. 예배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라고, 주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내려 놓는 것입니다.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장로들이 예수님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어린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한 것처럼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거문고는 구약시대 찬양을 드리기 위한 대표적인 악기입니다.

대접은 구약 시대 때 회막이나 성전에서 제사할 때 불이나 향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속에 향이 들어 있는데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상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신다고 했습니다(시34:18).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예배 때 나와 우리의 상함 심령을 기도로 내 내려놓고 치유받고 용서받고 회복되어 새롭게 일어나야 합니다.

천상 예배의 찬양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네 생물과 장로들과 많은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말합니다. 셀수 없는 많은 천사를 가리킵니다(히12:22). 천군 천사들의 대합창이 들여옵니다. 만만 천천의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실로 장엄한 광경입니다. 2장 3장에 나오는 지상의 7교회의 예배는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당시 어마어마한 신전 예배에 비하면 얼마나 촌스럽겠습니까? 지상에 드리는 예배가 두 세 사람이 모여 드리는 초라한 것같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얼마나 고귀한가를 장엄하고 웅대한 천상 예배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찬송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 예수님의 속성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완전수입니다. 천사들이 찬양하며 경배하자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찬양하여 경배합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립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자유롭게 찬양도 기도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염병 예방을 잘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대면예배를 드리든 비대면 예배를 드리든 기도와 찬양이 있는 예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주 만물에 있는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도미티아누스 치아에서도 그들은 지하에 굴을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우리나라 훌륭한 신앙인들은 공산 치하에서도, 일제 치하에서도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19를 핑계로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월남 전에서 포로가 된 미군 장교 수기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답니다. 성경책도 찬송도 없었는데 월맹군 장교 한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시간씩 베껴 쓰도록 허용해 주었답니다. 돌아가면서 요한복음을 필사하고 서로 나누어 외웠답니다. 소리 내어 찬양할 수 없으니 입 모양으로만 찬양하였답니다. 찬양하다 보면 서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답니다. 포로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화려한 예배당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렸는데 마음대로 성경도 읽지 못하고 찬양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 받고 예배를 통해 죽음같은 고통을 견디면 소망을 얻게 되었답니다. 성만찬을 할 수 없으니까 빵과 수프를 1/10씩 모아 성만찬을 했답니다. 그들을 예배를 통해 모든 고난과 환란을 극복하며 새 힘을 얻고 회복되었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다 차기까지 기다리며 역사의 마지막을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수가 다 차면 역사는 끝이 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한복음 4:23)”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부한자 권력 있는 자, 화려하고 능력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예배하는 자입니다. 세상은 예배하는 자와 예배하지 않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신앙인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까?

 

1.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6장부터 심판이 시작되는데 누가 심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환상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오른손 위에 두루마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인동형 동성론적 표현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때 인간이 알 수 있도록 인간의 유비나 은유적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능력과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팎으로 쓰여 있고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장차 있을 종말론적 환난과 심판에 대한 기록입니다. 4장 1절에서 “이 일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일곱이란 계시의 완전성, 비밀성을 상징합니다. 인류와 우주의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과 집행은 하나님 손에 있고 하나님 보여주지 않으며 인간은 절대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은 주역이나 정감록, 영계의 비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같은 것으로 미래를 알려고 하지만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같지만 미래는 인간에 의해 인간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달 전 차기 대통령을 꿈꾸던 분이 하루 아침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힘 있다고 교만하게 자신들이 인을 떼는 자, 모든 것을 조정하고 만들어 간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자다가 혈관 터지면 모든 것 다 놓고 가는게 인간입니다.

 

그때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5장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역사의 예정된 종말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합당한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인을 뗄만한 직위와 인격을 가진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3절 보세요. 그런데 세상에 아무도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땅의 피조물 중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갈 것같은 도미티아누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요한이 통곡을 합니다. 계속해서 크게 슬퍼하며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합당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자신이 섬겨던 교인들이 처절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데 장차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계획이 이행되지 않을 것같아 통곡한 것입니다.

그때 장로 중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을 합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울음을 멈추라고 하시며 울지 않을 이유를 말씀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 9절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라고 했고 에스겔서 19장 2-6절에서는 유다 왕실을 사자로 표현했는데 오실 메시아를 말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14절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뿌리도 이사야서 11장 1,10 절에서 말씀한 ‘이새의 뿌리’와 관련되어 있는데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메시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마1:1; 롬1:3). 예수님께서 계시록 22장 16절에서 다윗의 뿌리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 그 인을 떼신다는 것입니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로 예언된 그 예수님께서 인을 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이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었다’는 말은 ‘정복했다, 격파했다’는 말로 부정과거형으로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의 머리를 무너뜨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고 콜로세움에 세워져 조롱과 저주를 받으면 죽어가지만 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해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망에 빠진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인류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는 분은 로마의 황제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마호케트도, 돈도, 권력도 아닙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의롭게 해 주신 자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승리했고 마침내 심판주로 오신다면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롱합니다. 비웃고 멸시합니다. 요즈음 언론을 보십시오. 얼마나 교회를 조롱하고 비웃고 멸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은 무기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6절을 보시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일곱뿔은 완전한 권세를 상징합니다(민23:22 단7:7) 일곱 눈은 성령님의 전지성을 상징합니다(슥3:9;4:10) 예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으로 세상을 이기고 심판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할 때 문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천국가 지옥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행4:12). 사랑과 희생의 상처야말로 사라지지 않는 영광의 훈장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예배하다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 영원한 훈장이 됩니다.

계시록 1:1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 사실을 믿습니까? 세상의 어떤 권력도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해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지 못합니다. 권력의 힘으로, 부의 힘으로, 과학의 힘으로, 지식의 힘으로, 미모의 힘으로, 건강의 힘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이기시고 승리하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그 책을 취합니다. 다니엘서 보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온 우주의 권세를 가지고 종말존적 심판을 하는 모습입니다(단7:13,14)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힘 앞에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같고 조롱받고 비난 받는 것같지만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가지고 역사를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울음을 멈추라고 합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분으로 하나님의 비밀한 목적을 따라 세상을 통치하는 책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하신 분이십니다.

6장 1절을 보십시오.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니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타나 심판을 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린양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치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우주의 미래를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새노래로 찬양하며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숭배를 받으며 대단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부인을 유배시키고 형 티투스 황제의 딸 줄리아를 임신시켜 유산하게 했답니다. 군인들의 월급을 1/3 올려 주며 영원히 통치할 줄 알았지만 그는 44살의 젊은 나이에 시종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되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칼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고 침실을 탈출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답니다.

모든 문이 굳게 잠겨 있고 그는 죽지 않으려고 칼에 손이 베인 상황에서 처절하게 저항하며 암살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후벼 파려고 했지만 한방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통치 행적을 로마의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는 기록 말살형을 받았습니다.

인류를 심판하시는 분, 만물을 신판하시는 분, 모든 피조물이 어느날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찬양과 기도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세상 권력이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고 호언장담하였던 나폴레옹은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나와 시저는 칼로 세상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 제국은 영원히 멸망해버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병졸 하나 없이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의 제국은 아직도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부하는 온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권력이 대단하고 탐스럽게 보이지만 권력은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토록 살아계시면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은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역사를 통치하시고 섬리하시며 심판하실 예수님이십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구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천상에서 예수님을 보았는데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사자와 어린양의 이미지는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도살당했다. 살육당했다’는 말입니다. 같다는 말은 마치 어린양이 도살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승리한 예수님, 심판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권력이 협잡하여 예수님을 처절하게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인봉한 두루마리 책을 취하신 어린 양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질적으로 새노래로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인봉을 떼시에 합당한 이유는 첫째가 일찍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대속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혈족 관계, 동족 관계로 이루어진 나라와 민족, 각각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와 민족, 각각의 정치와 법률 아래 있는 나라와 민족, 각각의 일정한 법과 영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피값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자나 노예나, 여자나 남자나 온 인류의 구속주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피로 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당이 이 용어들은 황제나 왕을 찬양할 때 쓰여진 것들입니다. 이 말은 황제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정치적 선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이렇게 선포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구속사를 성취함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에게 인정받으시는 진정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을 입은 우리에게 뿐 아니라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는 천사들로부터 왕이심을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귀신들도 우리 주님이 왕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8:28-31; 막1:24)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을 취해서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지상의 성도가 왕 노릇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계 20:4.6).” 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천년 왕국의 일원이 되는 축복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아래로는 땅을 다스리는 왕적 권위를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땅에서 쓰레기처럼 취급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참으로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물건을 만원주고 사면 만원어치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어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을 섬기고 온 우주를 다시리며 심지어는 천사들까지 심판할 권세를 받을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높여주신 우리 예수님께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은 6장부터 나올 심판과 구속에 대한 일곱 인의 재앙이 내리기 전 그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 보좌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4장은 성부하님께, 5장은 성령 하나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세속 권력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4장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아무라도 예배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아무라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라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볼 때는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지난 10년 90여만 명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6분마다 한 명의 크리스천이 예배드린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주일 회중예배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핍박 가운데서도 6.25 전쟁의 포탄 가운데서도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6세기 당시 칼빈과 베자를 포함한 제네바 목사회 목사들은 주일예배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흑사병이 무서워 맡은 양떼들을 버리고 도망친 목사들은 면직시켰답니다. 수천 년의 기독교 수난사는 예배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사였습니다. 과거 권력자들은 자의적 판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대역병의 화살을 약자인 마녀에게 뒤집어 씌워 대중의 분노와 두려움, 책임을 처리했습니다. 과학이 발달된 현대에도 정치꾼과 정치지향적 언론, 기독교 안티들은 대중의 욕망을 관리하기 위해 신앙인을 콜로세움의 사자밥으로 던지고 싶을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회중 예배는 액세서리도 선택과목도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이 예수님이 예배받으시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유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내 걸었고, 로마의 알량한 권력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헤롯왕은 100년도 가지 못할 권력으로 예수님이 예배받지 못하도록 어린 예수님을 제거하였고, 프랑스 혁명 후 무신론자들은 주일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 10일 휴일제를 시행했고, 무신론자 레닌은 8일 휴일제를 시행했지만, 그들은 예배를 영구히 금지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마약처럼 취급하며 대대적인 핍박을 가했던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예배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도 예배자를 죽였던 도미티아누스는 44살에 죽었고 로마는 그 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무신론 철학자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과학주의 자들은 진화론으로, 물질주의 자들은 물질만능으로, 쾌학주의 자들은 쾌락으로 예수님이 예배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라고 예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예배를 못드리게 하면 잘 될 것같지만 세계의 역사를 보십시오. 예배드리지 않음으로 잘되는 나라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예배 드리지 않고 진정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죄용서의 기쁨과 죽음을 이긴 행복을 누리며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미국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 모든 장관이 크리스천이었던 때!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던 때! 주일이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온 가족이 교회로 가서 예배드렸던 때! 각급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로 수업을 시작했던 때!가 바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였다고 합니다.

그는 예배의 사람이었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기도로 시작하였답니다. 그래서 2차대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노르망디 승리의 주역이 되었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쳤고 아이젠하워의 가족들은 그 지방에서 온 가족이 교회 봉사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가 연합군총사령관의 임무를 맡고 영국으로 가려고 비행기에 올랐을 때 그는 단 한권의 책만 휴대했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대통령 재임 8년 동안 철저히 주일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한번은 당시 소련수상이었던 후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답니다. 같이 교회 가자는 요청을 거부하여 아이젠하워는 혼자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답니다. 화가난 후루시초프는 '예배를 마치고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라고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에 아이젠하워가 말했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을 제가 초청해서 귀한 손님이지만 예배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이젠하워는 예배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예배 신앙으로 급성패혈증으로 다리절단의 위기를 기도로 극복했고, 군입대후 14년간 진급이 안됐을때도 철저히 인내하며 예배를 드렸다고합니다. 예배의 사람 아이젠하워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고 화려하게 살수 있었지만 그는 말년에 거의 전재산을 기부하고 낡은 포드자동차 한대와 하루세끼 식사가 가능한 정도의 재산만 남기고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죽을 때 한 사병이 죽었을때 묻히는 평범한 관에 잠든채 전세계인의 애도속에 검소한 장례식을 치루며 인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주일 예배가 대통령 취임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토저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예수님을 우리를 예배드릴 수 있도록 구원해 주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를 소홀이 하지 않고 예배를 소중히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든지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주님께 예배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주님께 예배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마땅이 주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8.23.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