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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 되는 신앙 생활(빌립보서 16; 빌3:17-4: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68 추천수:0 220.120.123.244
2019-09-22 14:46:37

본이 되는 신앙 생활(빌립보서 16)

빌3:17-4:1

 

세르주 시코티가 쓴 <심리실험 100>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989년 워싱턴 대학의 심리학자인 멜초프와 무어는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지 이틀 미만인 신생아 4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답니다. 실험자는 아기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답니다. 그리고 20초를 주기로 아기에게 혀를 내밀기와 고개를 흔들며 도리질하기를 반복했답니다. 이 실험은 8분 동안 진행되었답니다. 이 행동들에 대한 아기들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비디오 촬영도 했답니다. 그 결과 멜초프와 무어는 어른이 혀를 내밀 때보다는 도리질을 할 때 아기들 역시 도리질을 더 많이 하고, 어른이 도리질을 할 때보다는 혀를 내밀 때 아기들도 더 많이 혀를 내민다는 사실을 확인했답니다. 아기는 어른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을 위한 모델로 이용더라는 것입니다. 어른이 행동을 멈추고 난 뒤에도 아기의 모방 행동이 지속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방의 천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인간은 모방본능을 갖고 태어나 이를 통해 학습하고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듯이 거울 뉴런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누구나 탁월한 모방능력과 모방본능이 있습니다. 모방하여 언어를 배웁니다. 모방하여 옷을 입습니다. 모방하여 노래를 합니다. 모방하여 밥을 짓습니다. 모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모방하여 피아노를 칩니다. 모방하여 제품을 만듭니다. 모방하여 범죄를 합니다. 모방하여 자살도 합니다. 모방하여 욕도 합니다. 제품이나 예술품이나 창조물들은 다 모방의 산물입니다. 모방을 잘 하면 원하는 것을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게 합니다.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때로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누구를 모방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위대한 학자가 되려면 위대한 학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존경받는 스승이 되려면 존경받는 스승을 모방해야 합니다. 성자가 되려면 성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누구를 모방해야 하겠습니까? 신앙생활 잘 하려면 누구를 본받아야 할까요?

 

1.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으로서 계속하여 본받는 일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바울도 흠이 있고 단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 한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흠과 단점까지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사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모범을 자신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율법주의자들과 무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나 무 율법주의자를 본받지 말고 복음주의자인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무 율법주의자는 이제 구원받았으니 율법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도덕주의자들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은 선이고 육은 악이니 어차피 악인 육신 생활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자유를 방종의 의미로 잘 못 이해하고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음주의자입니다. 구원받은 후 율법이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성화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자신과 같은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도 한때 율법적 행위를 통하여 의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독사에게 물렸지만 죽지 않는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유일한 구세주인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나 무 율법주의자를 본받지 말고 함께 복음주의자인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도적주의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닮기 위해 열심히 푯대를 향해 달려나가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빌3:7-14)

그런 믿음을 가지니까 자연스럽게 그 예수님께 평생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신 있게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에서 3 번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고린도전서 4장 16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교주가 되어 자신을 본받으라고 우월의식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단의 교주처럼 신앙의 교만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교주들은 추종자 신도들에 신적이며 왕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요합니다. 이단 교주들은 자기애적인 인격장애를 가진자들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시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자랑에 빠진 자들입니다. 공감능력이 결핍되자들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착취하고 조정합니다. 모두 소시오패스들입니다. 자기애적, 자아도취적 반사회성 성격자애자들입니다. 양복을 입은 뱀이 되어 거짓말과 사기와 조종에 능숙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고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독단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대변자, 대언자, 목자, 보혜사 등 신의 계시를 받은 자로 숭배하게 만듭니다. 이들은 본받을 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17절을 다시 보기시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바로 누구를 눈여겨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여겨 보라는 말은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하여 자세히 관찰하여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있듯이 그와 동일하게 행하고 있는 자들을 너희들은 자세히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울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모범을 삼고 사는 가까이에 있는 신앙인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앞에 소개된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신앙과 헌신에 있어 누구를 본받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신앙과 헌신에 있어서 자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 할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목사로서 목사가 되려면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로로서 장로가 되려면 나 같은 장로가 되어라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권사로서 권사가 되려면 나 같은 권사라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안수 집사가 되려면 나 같은 안수 집사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가 되려면 나 같은 교사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가대가 되려면 나 같은 성가대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당당하게 자신을 본받으라 할 정도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삶은 전염되는 것입니다. 모이면 교역자 욕하고, 교인 흉보고, 서로 상처주고 흩어지면 험담하고 다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에 가면 자녀들 앞에서 교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역식구들 모여 놓고 구역예배 드리라고 하면 일부 예배 2부 흉보기 비평하기 잔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과감하게 멀리해야 합니다.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도 수차례 반도적주의자들에 대해서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권면에도 불구하고 아직 돌이키지 않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큰 슬픔을 느끼며 다시 한번 더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라는 말은 조용히 눈물만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고 애곡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단에 빠진 자식들을 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방송에 나온 신천지 이단에 빠진 자식들을 이단 무리에서 구출하기 위해 애쓰는 부모님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게 보입니까? 젊은 날 자식이 학교도 직장도 그만두고 이단의 교주를 위해 충성하는 모습을 모면 얼마나 부모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단에 빠져 지옥에 갈 것을 보면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원수라는 말은 ‘적, 대항자’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데 십자가의 원수들은 자기 의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은 의를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있고 영지주의와 같은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마침이 멸망입니다. 미래는 결국,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면 지상에서 방종을 일삼고 탐닉하며 풍요를 누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영원히 망하고 맙니다. 예수믿는 사람 같으나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교인은 될 수 있는데 신앙인은 아닙니다. 교회는 나와도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가라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구실을 대어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사람들입니다(마7:13; 계17:8,11).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계 17:8)” 죄인에 대한 형벌은 이땅에서도 시작되지만 사후에 절정에 달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불못입니다.(계20:15; 22:8) 그들은 사망 불못에 처하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그들은 배를 그들의 신으로 삶는 사람들입니다.

배는 상징적 의미로 미각의 쾌락이나 대식에 몰두하는 인간의 욕망을 말하고 있습니다(롬16:18). 당시 "로마는 식탁에서 망했다"라고 할 정도로 로마 귀족들은 오후 4시에 시작하여 자정이 넘도록까지 식사를 즐겼다고 합니다. 배가 차면 새의 깃털을 목구멍에 넣어 토해 내곤 또 먹곤하였답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첩들이 부채질을 하고, 소년 노예가 나무가지로 파리를 쫓으며, 여자 안마사는 사지를 주무르고, 거세된 노예들은 변기를 들고 생리 사인을 기다리고 서 있곤 했답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들인 돈은 노예 하나를 판 값과 맞먹었답니다. 오늘날 말하면 물신주의자들입니다. 물질이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반도덕 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미각의 쾌락과 포만감을 주는 저급한 육체적 욕망을 우상으로 삼고 사는 삽니다. 이들은 육욕의 만족보다 더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무절제하고 재갈 물리지 않은 욕구와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그들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요 소망인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그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자랑으로 여긴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반 도적주의자들은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수치스럽고 불명예로운 일을 저지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도되어 선과 악, 자랑스러운 일과 수치스러운 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재미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단들은 남의 교회에 들어가 교인들을 거짓으로 복음방에 데려가 성경 공부시키면서 거짓을 일삼지만, 그것을 모략이라고 악한 일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교회를 빼앗는 산 옮기기 작전을 하면서도 마땅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여성 성도를 성추행하여 감옥에 간 죄를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고난이라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넷째는 그들은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 분사형으로 “땅의 일에 마음을 쏟고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으므로 단지 이 땅의 일에 대해서만 몰두할 뿐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땅의 것을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물질, 명예, 쾌락, 세상적인 인기, 성공 등이 그들이 삶의 목표 전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본받아서도 안 되고 우리가 이런 자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결국, 멸망으로 인생은 끝나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3.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주 안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4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촉구했던 것처럼’이라는 말입니다. ‘서라’라는 말은 ‘확고히 서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잠자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초소를 지키고 서 있어야만 하는 군인들처럼, 혹은 우승한 경주자에게서 발견되는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처럼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 있으라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면 본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누구를 본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철저히 예수님을 신앙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닮은 꼴이 되었으니 이제 나의 닮은 꼴이 되면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으니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철저히 자신의 유익 대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고전8:13, 10:23,24,33) 항상 자신을 쳐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고전9:27)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빌2:7-8) 그리스도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고후11:23-27) 옥에 갇혔고, 수없이 매를 맞아 여러번 죽을 뻔 했습니다. 39대 태장 다섯 번 맞았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로마서 8장 29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본받았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표정짖는 것도 우리를 보면 예수를 보는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자신있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으니 너희들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신분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분을 변화시키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이 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이제는 거지를 따라다니면 거지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속이 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해적 선장이 될라면 열심히 해적 선장을 본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모범적인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대한민국의 모범시민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시민권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충성을 바치는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아래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무와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당당하게 여겼던 로마 시민권보다 천국 시민권은 더 당당한 것입니다.

 

둘째는 소망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20-21).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은 누구를 기다립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날에 우리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약하고 죄에 빠질 수밖에 없고 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몸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만물을 복종케하는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가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성도는 변화된 몸으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살전4:13-18 고전15:51-5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날에 나 때문에 고생하였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너의 욕심대로 못하고 나 때문에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고 나 때문에 건강도 잃었고, 나 때문에 화려하게 살지 못하였고, 나 때문에 먹을 것 재대로 못먹었고 나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지고 갔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 장식만 하고 다니지 않고 고생을 하였다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잘 먹고 살다 왔다는 말보다 주를 위해 고생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어느 주일날, 주일학교의 한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해주고 난 뒤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면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 중의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하기를 “선생님, 죽기 전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은 다음에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영광스러운 그 날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외치며 삶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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