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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기뻐하라(빌3:1-6, 빌립보서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38 추천수:2 220.120.123.244
2019-09-01 08:33:46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립보서13)

빌3:1-6

 

일소일소 일노일노(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한 번 늙는다는 말입니다. 웃음 만복래라는 말도 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웃으면 젊어지고 웃으면 복이 올까요? 우리 몸의 근육 중 표정을 만들어 내는 얼굴 근육만이 뇌신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굴 표정이 뇌의 감정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유리창과 같다는 것입니다. 얼굴 표정에 대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했던 폴 에크만은 인간의 웃음 중에도 긍정적 정서가 반영된 환한 웃음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는 '뒤셴의 미소'라 이름 지었습니다. 광대뼈 근처와 눈꼬리 근처의 얼굴 표정을 결정짓는 근육을 발견해낸 뒤셴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따서 ‘뒤셴의 미소’라고 이름지었답니다. 하커와 켈크너는 뒤셴의 미소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무려 30년간 141명을 조사했답니다. 그들이 같은 대학을 졸업할 때 표정을 전문가들이 정밀하게 분석하게 했답니다. 분석 대상 중 50명은 뒤셴의 미소를 짓고 있었답니다. 91명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이 각각 27세, 43세, 52세 되는 해에 연구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비교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환한 긍정적 미소를 지었던 '뒤셴 미소 집단'은 뒤셴의 미소가 없는 집단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하였으며, 병원에 간 횟수도 적었고, 생존율도 높았답니다. 결혼 생활만족도도 높았으며, 이혼율은 낮았답니다. 평균 소득수준도 높았답니다. 같은 해에 졸업한 여대생 중에서 뒤셴의 미소를 지었던 여성들이 훗날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었답니다. 혹 뒤셴의 미소를 지은 여성들이 예쁘고 매력이 있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하여 연구하였지만 그러나 예쁘고 안 예쁘냐는 그 사람의 건강이나 행복한 결혼 생활 혹은 소득수준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 합니다. 김주환 교수가 쓴 <회복탄력성>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눈이 웃으면 얼굴이 웃고, 얼굴이 웃으면 뇌가 웃고, 뇌가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웃을 일 없다고 슬프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웃을 일 없어도 웃으면 기뻐할 일이 생기고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습니다. 내가 웃으면 이웃도 웃고, 내가 웃으면 집안 식구도 웃습니다. 웃으면 인생은 밝아집니다. 웃으면 행복이 옵니다. 그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16:24)". 기쁘게 살아야 행복하고, 부유해지고, 건강해집니다. 항상 찡그리지 말고 웃으시길 바랍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십시오. 복이 옵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웃을 일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읽은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번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를 통해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나이 늙었습니다. 자식도 없고, 경제적인 넉넉함도, 마음대로 말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 중에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분노하고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장 1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든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제로 드려져 자신의 수고와 헌신이 아무런 빛을 드러내지 않아도 억울하게 생각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2장 17-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이런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하게 산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까? 4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사는 사람들로 주 안에서 언제나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은 '종말로'라는 말을 편지를 쓰면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 종종 사용하였습니다(살전4:1 살후3:1). 그러기 때문에 이 말은 끝을 맺는말이기보다는 "이제, 더군다나, 더 나아가서"라는 말로 주제를 전환하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동역자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한 후 주제를 전환하면서 기뻐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사말 차원이 아닙니다. 권면이고, 명령입니다. 감옥에서 슬픔 가득한 얼굴을 하며 "나는 괴롭지만 너희들은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기뻐하며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가 있지만, 빌립보 성도들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주 안에서(엔 퀴리오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쓰는 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기뻐하라는 말을 계속 반복해도 수고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 생활하는데 이단에 넘어가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신앙인의 3대 원리를 말할 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기쁨은 하나의 감정입니다. 외부자극에 대하여 신체상태가 달라지는데 감정의 신체 상태에 대한 반응입니다. 감정 발달 이론에 의하면 생후 3개월부터 쾌와 불쾌가 나뉘게 된다고 합니다. 5-6개월 경 불쾌 정서가 분노, 혐오로 분화되고, 9개월경에 불쾌에서 공포가 분화되며, 10에서 12개월쯤에는 쾌 정서가 의기양양함과 애정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18개월경에 질투가 불쾌에서 떨어져 나오고 생후 2년에 쾌에서 기쁨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일종의 욕구충족의 기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욕구충족을 통한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일평생 살면서 몸부림칩니다.

 

1)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 살면서 감정을 자극하여 기쁨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입니다. 불나방처럼 기쁨을 찾아 물불을 안 가리고 덤벼듭니다. 마약을 먹습니다. 술과 담배를 먹습니다. 간음을 하고, 성폭력을 하고 동성애를 즐겨 봅니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봅니다. 찬송도 분위기 잡는 찬송을 하면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기쁨이 생기도록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약물을 복용하고 환경을 조작해 보고 환상, 공상을 통하여 마음을 기쁨의 상태에 놓으려고 합니다. 고통과 불행이 가득한 현실을 잊으므로 기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쁨을 느끼는 빈도와 강도는 10세 전후로 급작스레 감소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평균 400번을 웃지만 어른들은 불과 15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감정이 무디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극을 받을 때만 감정적 기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아무리 큰 자극도 그 자극이 없어지면 금방 그 기쁨은 사라집니다.

 

2) 자신에게 기쁨을 조건을 줌으로 기쁨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를 취득하고 우승을 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복권에 당첨됨으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긍정적인 어떤 일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소원을 이루었을 때,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을 때, 게임에서 이겼을 때, 월급을 받을 때, 반가울 때, 결혼할 때 등과 같이 바라는 무엇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흐뭇하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감정이나 느낌입니다. 기쁠 때 짓는 표정으로 미소, 웃음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 역시 오래가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룬 큰 기쁨은 대개 3개월 동안 유지된다고 합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환희(歡喜)'도 3개월이 지나면 시들어집니다. 결혼의 기쁨도 3년이면 바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보다 원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환희는 더 큰 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에 쉽게 허탈감에 빠지게 합니다. 지적 기쁨도 더 많은 지식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할수록 더 공허해질 뿐입니다. 윤리적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선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탄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했던 것입니다.

 

3)신앙인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 기쁨은 상대적이지만 주님 안에서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 누리는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지속적입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9-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신분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신분의 변화입니다. 죄용서함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신분이 변해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린도후서7:4)”라고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이 훈장받고 진급할 것을 생각하면 그 고난을 오히려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 만날 그날을 생각하면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질병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죽음 앞에서도 기뻐합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면서도 기뻐하며 순교를 했습니다.

이런 기쁨은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말씀했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 . .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누가복음 6:22-23).

이런 기쁨은 우리의 노력이나 성취로부터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 . . 희락과" (갈라디아서 5:22).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데살로니가전서 1: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17)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로마서 15:13). 이러한 기쁨은 어떤 환난도 막을 수 없고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뻐해도 되고 기뻐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하기를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35:9)"라고 한 것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사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주 안의 기쁨을 빼앗는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하면서 그 은혜를 망각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조심하라고 말씀합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조심하라고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개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 관찰하라. 안목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단지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신중하게 주목하여 그들로부터 교훈을 배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개는 야생 개를 말합니다. 경멸스러운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부패한 자나 악한 자 또는 이방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개를 돼지보다 더 더러운 짐승으로 여겼는데 이방인들이 바로 이런 개 같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는 문맥적으로 볼 때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자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로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자를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행악하는 자들은 악한 일꾼을 말합니다. 일꾼 숙련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을 말합니다. 바울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이단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심이라면 여호와의 증인들, 통일교인들,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 구원파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으스대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셋째로 몸을 상하게 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육체적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인간적 노력의 산물인 의식적인 행위를 중요시하는 자들입니다. 은혜의 시대에도 율법을 고수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주의 자, 행위 구원론자들, 율법 파괴주의자들, 완벽주의자들, 외식하는 자들, 형식주의자들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과 함께하면 이런 삶을 살면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상대를 정죄하고 자신을 정죄합니다. 인간의 힘이나 노력 또는 양심적인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 안에서 기쁨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기쁨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기쁨의 멘토이십니다. 율법주의자, 완벽주의자, 형식주의자를 모델로 삼으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3. 주 안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3절의 원문은 “왜냐하면 우리가 할례자이기 때문이라고 시작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진짜 할례 당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으로 예배함으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여기서 ‘봉사(라트류온테스)’는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되어 예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눅2:37 행26:7 롬9:4)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참 신자는 예배드릴 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므로 기뻐하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요4:24).

진정한 기쁨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먼저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진정한 할례당은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시 51:17). 예배란 건물이나, 화려한 장식, 기계적인 형태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의 예배가 주는 영향력은 일종의 건물이 주는 영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의무적으로 드리면 주안에서 기쁨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드리지 않으면 예배드리는 것이 고역이 되고, 억지가 되고, 지루함이 됩니다. 성령에 의지하는 예배가 아니라 건물이나 의식이나 성직자 등 수단에 의지하면 진정한 예배의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존재, 철학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면 우리에게는 참된 기쁨이 솟아 오릅니다. 예배를 구경하면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를 형식주의자가 되어 드리면 진정한 기쁨이 없고 시비만 걸게 됩니다. 성령으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찬송과 기도는 의미 없는 입놀림에 불과하고 말씀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성령으로 드리지 않으면 감격과 기쁨이 없고 예배는 알맹이 없는 의식과 형식의 연속에 불과합니다. 예배 속에 하나님 만나는 감격과 치유와 회복과 용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기쁨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에는 물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크리스천들도 이 아프리카의 물 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많이 본다."라고 개탄을 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무신론주의 철학자이며 니체는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진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살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

지난주에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모임을 갔는데 강사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자기 교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를 크게 지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는데 교회를 건축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한 성도님이 등록했답니다. 그래서 왜 등록했냐고 물어보니 예배당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표정이 환하게 웃고 있고 행복해서 등록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아 등록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등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인이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와 교회를 새로 건축하자고 제안을 했답니다. 그냥 제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50억을 준비해 놓았는데 그것을 헌금할 터이니 건축하자고 하여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여 수천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배함으로 기쁨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함으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율법주의자, 형식주의자, 완벽주의자들을 자기를 자랑함으로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쁨을 즐기는 방법으로 3절에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기뻐하는 유대주의자들은 할례, 율법의 준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은 자랑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유대주의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은 개인의 선행이나 노력이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갈6:14). 모든 만족과 소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자랑하며 기쁘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구세주이기 빼문입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14:6).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고백했습니다. 육신의 내세우면 자랑하는 기쁨, 외모를 자랑하는 기쁨, 학벌, 신분, 부를 자랑하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님을 자랑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

 

셋째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음으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육체에 신뢰의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신뢰의 근거를 두고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육체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를 받지 않는 옛사람의 성품을 말합니다(롬8:1-17).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무엇인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 보려고 하면 은혜로 주시는 참 기쁨이 없어집니다. 안됩니다. 쉽게 지치고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바울도 은혜 받기 전에 육체의 신뢰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이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참 기쁨을 주었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핍박자로 포행자로 살게 하였습니다. 자기 잘난 맛으로 살다 무너졌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가 영원히 신뢰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거리를 바울은 어떻게 여겼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고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7-8).

이런 기쁨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고차원적인 기쁨, 영적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을 가진 성도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일치를 기뻐함으로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생물학적 기쁨이나 윤리적 기쁨이 아니라 영적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조건으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기쁨의 어원은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은총을 의식할 때 옵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의식적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의 샴페인>이라는 책을 쓴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였답니다. 우울한 성격 때문에 20대 후반에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하루하루 기쁨이 없는 암담한 삶을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제 앞으로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다.'라고 결단을 하였답니다. 90일 동안 무조건 주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기로 했답니다. 무조건 기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점검하기 위하여 90일 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90일 동안 억지로 기뻐하기로 실험해 보니까 실제로 기쁨이 밀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자기 내면 안에서 지속해서 작동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가 앓고 있던 우울증이 치료되었답니다. 입이 웃으면 얼굴이 웃고, 얼굴이 웃으면 마음이 웃습니다. 마음이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조건이 있어 기뻐하는 것보다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기뻐하다 보면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열린편지/열린교회/2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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