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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18 빌립보서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90 추천수:4 220.120.123.244
2019-08-11 13:11:07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2:14-18(빌립보서10)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나가는 한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사지원서를 냈답니다. 1차 서류 전형에서 뽑은 사람들에게 면접하러 오라고 했답니다. 면접시간은 1시간이라고 공지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정한 시간에 갔는데 면접관이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여름철인데 에어컨도 없었습니다. 덥자 처음부터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5분 동안 대기하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겠지”하고 기다렸답니다. 어떤 사람은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고 어떤 사람은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조해했답니다. 어떤 사람은 짜증을 내기도 했답니다. 10분이 지나자 누군가 말했습니다. “잘나가는 회사라며 에어컨도 없이 회사가 이게 뭐야”라고 하자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이 동조하며 수군거렸답니다. 15분이 지나자 한 사람이 “이거 뭐 하는 거야?, 무슨 회사가 이 모양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아무리 취업난이라도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우리를 어떻게 보는 거야 개 무시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며 그 말에 동조하며 불평을 쏟아 놓았답니다. 20분이 지났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 “갑시다. 이것도 회사입니까?”라고 나가 버렸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 “그래도 왔으니 기다려 봅시다. 회사에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요?”라고 동료들을 설득했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당신이나 잘 기다려 보시오. 이런 회사는 다녀봤자 뻔합니다.”라고 나가 버렸답니다. 한 시간 동안 면접관이 나타나지 않자 어떤 사람은 일어나 적극적으로 회사를 변호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아주 말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원망하며 선동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구시렁거리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그 선동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면접관이 나와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한 시간 약속한 면접은 다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답니다. 알고 보니 면접관들은 CCTV로 기다리는 그 장면을 다 지켜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를 점검했답니다. 그 시간이 면접시간이었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고 사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이 땅에서 죽지만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가고 천국에 가면 이 땅의 삶에 대한 결산을 받을 것이라고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CCTV로 우리를 다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모든 것을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14).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중생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이고 천국에 갈 때까지 날마다 죄악을 벗어버리고 거룩해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소원을 주십니다. 죄악을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끊임없이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면 됩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뜻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성화의 삶을 사는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한 모든 것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있는 곳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원망과 시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쉽게 범하고 빈번히 범하는 범죄가 원망과 시비입니다.

 

1)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공귀스몬)”이라는 말은 “불평, 불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림”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평을 품고 수군거리 것입니다. 투덜대거나 비밀스럽게 말하고 그리고 누군가에 관하여 험담하는 ‘불평”이나 “불쾌”를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원이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이용물이 되는 것입니다. 남이 한 일들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이 왜 원망합니까? 소원이 없으면 원망도 없습니다. 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원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늘 원망하는 교인들은 무엇이가 잘 하고자 하는 열심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원망의 올무에 걸려 나도 죽고, 상대도 죽이고, 공동체도 파괴해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이유가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원망입니다. 40년 동안 기회만 있으면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여행하면서 원망을 쉬지 않았습니다. 공장도 식료품 가게도 없는데도 40년이나 한 번도 굶지 않고, 못 먹어서 죽은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신발 한번 해지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물 못먹어 죽은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허구한 날 40년 동안을 원망하고 살았겠습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에 보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질적으로 원망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망해야 기가 살아나고 살맛이 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와서 목회해도 원망하고, 바울이 와서 목회해도 원망할 사람들입니다. 원망함으로 자기의 바름과 잘남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망함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원망의 전염자가 되지 말고 원망에 전염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원망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1등 못한다고 원망하는데 누구나 다 일등 되고 싶지만 1등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부자 되고 싶고, 누구나 다 성공하고 싶고, 어떤 목사나 다 설교 잘하고 싶고, 어떤 학생이나 다 공부 잘하여 출세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세상입니다. 자신도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가 낳은 자기 자식도 자신 마음대로 못 하는 것이 인생인데 어떻게 남이 내 마음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허구한 날 원망합니까? 원망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나 원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언론을 보십시오. 날마다 국가 정책에 대하여 원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만 보고 살면 금방 원망이 전염됩니다. 만나를 원망할 때 원망의 전염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는 ‘섞여 사는 무리’였습니다. 가라지들이 있습니다. 열심있는 사람이 이단에 빠지기 되기 쉬운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도 거짓선생들이 있었습니다(3:2).

인류사에 있어서 분열의 역사도 마찬가입니다. 가장 큰 분열 중의 하나인 공산주의와 분열에 공산주의의 창설자 카를 마르크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교 교구 학교를 다녔고, 10대 소년 시절에는 요한복음 15장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내용의 아름다운 수필을 쓴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망의 선동자가 되어 공산주의를 만들어 세상을 두 쪽으로 분열시켜 버렸습니다.

러시아 정교를 믿고 살았던 러시아를 공산화시킨 스탈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제(목사)가 되기 위하여 소련 티프리스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열심 있는 소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다가 원망의 주동자가 되어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해 선동자가 되어 사람들을 공산주의 늪으로 빠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라지들은 본색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먹거리를 가지고 원망하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원망을 전염시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원망을 전염시켜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평안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영적 만나를 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처음부터 영적 만나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들은 그 교회에 등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감격이 없어지는데 그 원인이 자신의 익숙해져 감동을 잃어버린 입맛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엄마가 요리 솜씨만 탓하는 자녀와 같은 것입니다. 원망은 실패와 멸망의 인생의 지름길이 됩니다(고전 10:10; 약 5:9).

원망은 아주 고약하고 나쁜 습관입니다.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불행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시켜 버립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합리화하여 자신이 최고 잘 신앙생활한다며 그렇지 못한 사람을 원망하는데 원망은 하나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원망을 하게 되면 저주의 바이러스로 복이 떠나고 불행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성도들에게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원망하게 만듭니다. 욥을 보십시오. 사탄이 욥을 원망하게 하려고 재산을 잃게 했습니다. 자녀가 죽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하며 자신을 떠났습니다. 심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욥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욥 1:22). 그래서 욥은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늘 원망을 달고 살면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심각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사단은 원망을 통해 우리 신앙 공동체의 성숙과 성화를 파괴합니다. 최초로 성령 충만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에도 구제문제로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6:1). 은사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10:10). 구제에 정성을 다했던 빌립보 교회에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에도 원망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성화를 방해하는 원망 바이러스를 주의해야 합니다. 원망은 가벼운 범죄가 아니라 무서운 범죄입니다.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공동체는 침체되고 분열되고 결국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원망의 말이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 달콤한 유혹이라고 생각하며 원망에 동조하며 원망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비(디알로기스몬)”은 “의심, 논쟁, 알력, 소동, 토론”을 의미하는 말로 악한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불안한 생각이나 의심, 논쟁이나 다툼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 말 사전에는 “옳음과 그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이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원망이 발전하여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의심하고 논쟁을 벌여 연합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망이 싹이 트면 모든 일에 의심하고 논쟁하며 옳고 그림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원망은 내적 불만을 외부로 표출된 상태를 말한다면 시비는 내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논쟁하려는 태도와 행동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시비 거는 이에게 설법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늘 시비거는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어떤 좋은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비거는 사람은 선교지에 교회를 건축하면 먼저 의심부터 해 보고 옳고 그름을 좋고 나쁨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바자회를 해서 구제를 해도 왜 그것을 하느냐고 시비부터 합니다. 제직회를 해서 결산을 해도 먼저 의심하고 시비부터 걸며 논쟁을 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사실인 것처럼 전재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당회를 하든, 제직회를 하든, 공동의회를 하든 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영논리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금방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시비를 겁니다. 무엇을 위한 시비입니까? 진정 국민을 위한 시비가 아닙니다.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살기 위한 시비입니다. 관중인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시비입니다. 상대 당이 잘 되면 다음에도 상대 당이 집권을 하니까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 상대는 잘 못되었도 나는 잘났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흔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됩니까? 자녀가 부모가 하는 일에 늘 시비를 하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사에서 직원들이 모든 일에 시비를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겠습니까? 늘 시기와 다투는 공동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교회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혼란과 악한 일만 나타납니다. 시비하는 사람은 크게 세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내만 옳다라 독선 주의입니다. 어떻게 세상이 나만 옳겠습니까? 다 허물이 있고 내가 보는 견해는 수많은 견해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내가 이길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자기의 정당한 논리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논리라는 오늘 주보에 제가 “이해관계의 사슬과 주장”이라는 글에서 자세히 써 놓았지만 사람은 쉽게 일부의 사실을 가지고 일반화를 시키고 이해관계의 사슬에 묶여 자기 이익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로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지만, 핵심은 이해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편에 서 있느냐입니다. 내가 고칠 수 있다는 그릇된 자신감입니다. 내가 나도 못고치는데 어떻게 상대를 고칩니까? 아베 수상님하면서 사죄하는 엄마부대를 보십시오.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면 못 고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이 없으면 객관적 판단을 하는 사람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면 대부분 이해관계에서 초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논리는 입장에 종속되고, 입장에 따라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거창한 논리적 명분은 거대 이익과 연결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말씀해도 고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인간이지 않아요. 사람 고치는 것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잠언 17장 1절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시비하지 말고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3)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까지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까?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일(판타)’입니다.

어려운 장애물이 앞에 있어도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 될 때는 원망과 시비가 없다가 장애물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원망과 시비를 합니다.

광야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준 10가지 기적으로 애굽의 포로에서 해방되자 기뻐하고 감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이 추격해 오자 홍해 앞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 버리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출14:11).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까지 이끌어 내어 죽게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애굽에서 이끌어 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적을 통하여 그들을 홍해를 건너게 했고, 이집트 군인들을 홍해에서 수장시켰습니다.

 

먹는 것으로 원망하고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기뻐하였습니까? 그런데 3일 지나 먹을 것이 없자 또 모세를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을 때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처음 만나를 먹을 때는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고 소리치며 놀라워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영적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 지나자 고기달라고 원망하는 광야 백성처럼 허구한 날 왜 맨날 만나만 먹냐고 특별행사 해달라고, 애굽에 있을 때 먹은 생선과 오이, 수박과 부추, 파와 마늘을 먹게 해달라고 원망하고 시비합니다.

‘정신적인 흥분’은 뇌과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대체로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사람과 살아도, 아무리 예쁜 여인과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연예인들이 해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말씀을 듣는 것도 연애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며 원망하고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 백성들은 처음에는 모세를 대단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살다 보니 모세도 인간인지라 허물이 보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하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그 내막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반역하다 250명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자 모세와 아론이 저주해서 그 사람들이 죽었다고 원망합니다(민16:41-42). 자신이 잘못해 징계를 받았는데 그것이 지도자 탓이라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늦게 일어나 시험을 잘 못 보아 놓고 어머니가 일찍 깨워주지 않아 시험 망쳤다고 원망하는 자녀와 같은 것입니다.

 

남의 원망의 말을 듣고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이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부정적인 말을 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게하려고 애굽에서 이끌어냈냐고 따지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14:2-4).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되어지지 않는 경우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에돔 땅을 통과해 가면 지름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돔왕이 에돔 땅을 지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 백성들은 쉽게 가지 못하고 어렵게 가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21:4-5). 예배 방법, 기도 방법, 찬양 방법 등이 다르다고 원망하며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정을 보며 속단하고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라에서 쓴 물이 나와 마시지 못합니다. 또 원망합니다. 낙타로 2시간만 가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하나님이 준비해 놓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원망은 이런 유형들의 원망입니다. 서로 화합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하는 대표적인 악성 바이러스가 원망과 불평 바이러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해야 합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구제하든 선교하든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일에도, 안내하는 일에도, 예배 방식에도, 기도방식에도 원망과 시비 없이 해야 합니다.

모세오경에는 ‘원망’이란 단어가 무려 21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 내내 원망을 합니다. “물이 없다. 만나가 싫증 난다. 물이 쓰다. 고기가 없다. 편하게 걸어갈 길도 없다. 모세가 잘못되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힘들다” 줄기차게 원망합니다.

그 원망의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면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7)”라고 말씀했겠습니까? 원망하는 순간부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원망의 대상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시는 길은 보이지 않고 내가 옳다고 바르다고 하는 길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라고 했습니다. 우리 열린교회 성도님들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우리가 빛으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 없이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우리가 본 성경에서는 잘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접속사 “히나”로 시작되는데 ‘히나’라는 말은 ‘ ... 하도록’, ‘ ... 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15절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할 목적이나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빛들로 나타내며”입니다. ‘이는’이 연결되는 문장이 ‘빛들로 나타내며’입니다. ‘나타내며’ 로 번역된 ‘파이네스데’는 수동형으로 나타나게 되도록이라는 말입니다. 빛이라는 말은 발광체라는 단어로 태양, 달, 별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밝혀주는 빛으로 보내었기 때문에 빛의 역할을 잘 하려면 원망과 시비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드러내야 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어그러지고(스콜리아스)”라는 말은 “굽은, 삐뚤어진, 성실치 못한, 사악한, 불공평한, 무정한”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곧바로 가지 않는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갈퀴 같아서 여기가도 죄로 걸리고 저기가도 죄로 걸리게 되어있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거스르는(디에스트람메네스)”라는 말은 “왜곡하는, 그릇되게 하는, 타락시키는, 돌아서다”라는 말입니다. 정도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의 길을 왜곡된 상태를 말합니다. 곡해하여 순수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진실을 믿어주지도 받아주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순수하게 사는 사람들을 바보처럼 취급받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신앙인들이 그들과 똑같이 원망하고 시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살게 하려고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세상과는 구별된 사람으로 원망하고 시비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삶으로 삶의 방향이 전환된 사람들입니다.

빛을 드러내는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흠이 없고 순전하여 ...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도록’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흠이 없고 순전하여’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 사이에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라는 표현이 들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흠이 없고 순전하여’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 사이에 컴마(,)가 있어 동격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흠이 없고(아맴프토이)’는 ‘책망할 것이 없는, 흠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나 사람들로부터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것이 없는”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시비하면 신앙인으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시비하는 삶을 살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에게 얼마나 손가락질을 하며 흠을 잡겠습니까? 교회 목회자나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집사님이나 교인들을 원망하고 시비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순전(아케라이오이)’은 ‘혼합되지 않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나무랄 데 없는’, ‘교활하지 않은’이란 의미입니다. 물을 섞지 않은 포도주나 합금되지 않은 철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강조한 말입니다.

원망과 시비를 하는 것은 죄입니다.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을 의로운 행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해 보아서 알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부모를 원망할 때 모든 것 보고 원망합니까? 100개 잘 해주다 한 가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보고 원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원망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심각한 죄라를 사실을 가볍게 여기면 쉽게 원망하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원망만 하는 아들이 있었답니다. 어떻게 대학까지 졸업시켜 놓았는데 취업을 하지 않고 아버지가 취업을 시켜 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했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부탁하여 회사에 취업을 시켜 주었답니다.

얼마 다니다가 아들이 하는 말 “발바닥이 닮도록 뛰어다니며 홍보물 돌렸는데 과장이란 작자는 자기는 회전의자에 앉아서 전화 안 받았다고 화를 내며 잔소리까지… 세상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요.!”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아들을 주유소에 취직을 시켜주었답니다.

그러자 조금 다니더니 아들이 "누구는 서서 하루종일 기름 넣고 있는데 차 안에서 기다리는 녀석들은 앉아서 껌이나 씹고 있고... 참,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원망을 견디다 못해 조금 깨달으라고 아들을 공동묘지 무덤지기로 취직시켜주었답니다. 아들이 조금 다니다 아들이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요. 나 혼자 의자에 앉아 있는데, 모두들 누워 있잖아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망하고 시비하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원망하며 잘 잘못을 가리기에 혈안이 된 세상에 복음의 빛을 우리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7절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여 흠이 없게 함으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으로 세상을 밝게 만들고, 빛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빛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서로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보다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15절 “히나”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의 말씀’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밝혀(에페코)”라는 말은 굳게 붙들다는 의미와 드러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는 바울이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 마치 육상 선수가 전력을 다해서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애썼으며, 지쳐서 피곤해질 때까지 수고하기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로 원망과 시비 없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화되어 마지막 날에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15절에서 나타난 ‘히나’와 연결되어 궁극적인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기 위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살아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여 성숙한 신앙인으로 서로에게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면서 원망하고 시비하며 살았습니까? 빌립보 교인 중에 사도 바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유별나게 싸워서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면서 20절을 보십시오.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허구한 날 빌립보 교인들을 원망하고 시비하며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섬기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더라도 원망과 시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奠祭)고하는 것은 주된 제물이 바쳐진 뒤에 포도주를 부음으로 제사의 끝마무리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된 제물이 아니기 때문에 부어지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원망하거나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죽음 자체가 주된 제물이 아니라 주된 제물(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해 나중에 부가되는 관제와같이 드려진다고 해도 원망하고 시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빌립보 교인들도 함께 기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를 벗어난 성숙한 신앙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일 설교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집에서 했답니다. 허구한 날 똑같은 반찬에 똑같은 밥을 해주니까 밥상을 앞에 놓고 사모를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사모가 말했답니다. “나도 허구한 날 당신 설교 그냥 듣고 있으니 아무 소리 말고 밥 잘 드시오”

천국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성숙한 인격을 가진 성화를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험한 세상에서 서로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원망과 시비를 그치고 기쁨으로 섬기며 주어진 일을 감당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빛으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 없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보다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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