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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11 빌립보서 강해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00 추천수:1 220.120.123.244
2019-07-28 13:32:24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8)

빌2:5-11

 

지난 23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우리 영공을 침범했습니다. 외국 군용기가 우리의 ‘방공식별구역’(KADIZ)에 들어온 적은 종종 있었지만, 영공을 침범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공군 전투기가 출격해 360여 발의 경고사격까지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침범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한국과 경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은 이 사건이 발생하자 “자기 영토에서 이런 행위는 안 된다”고 한-러 간 분쟁을 틈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뻔뻔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최근 동북아에선 미·일과 중·러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한-일 갈등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 핵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고 또 미사일을 발사하였습니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좌관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정부의 방위비 분담금을 증액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지금 있는 상태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데 서로 도우며 살지 못하고,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립니까? 높아지려는 욕구, 확장욕, 패권력, 권력욕, 지배욕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상향의식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용어로 한 마디로 말하면 교만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교만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나라에 이익이 되고 그러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려는 교만이 서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고 평화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 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류의 비극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죄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 놓은 암 덩어리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라고 말씀합니다. 이 교만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공중 권세잡은 자, 속이는 자, 유혹하는 자, 참소하는 자, 사단에게서 나왔습니다. 이사야서 14장 13-14절에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자리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하며 타락한 천사가 사단이 되어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교만이라는 마음의 암덩어리는 심어 놓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고 유혹합니다. 자기 중심성, 즉 교만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 것입니다. 그 후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예수님의 겸손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교만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사단을 지금도 끊이 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끝없는 정복욕을 가지게 합니다. 자기 자랑, 자기 기만에 빠지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갈등하고, 분열하고, 전쟁하게 만듭니다. 약육상식의 논리로 무장하게 만듭니다. 힘을 숭배하게 하고 힘 만능론에 빠지게 만듭니다. 비교의식을 가지게 만듭니다. 의심과 불신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의 주신 축복의 도구인 자유의지를 끝없이 높아지려는 욕구를 자극하는 쪽으로 발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간의 불행한 역사입니다.

 

국제 사회나, 국가나 교회나 가정이나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트럼프의 마음이 아닙니다. 트럼프는 한반도 비핵화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며 패권국의 지위를 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북핵 문제를 푸는 것도 국제 사회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도 오직 권력의 연장인 자신의 재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징핑의 마음도 아닙니다. 시징핑은 북한과 관계 계선을 통해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견제하고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음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황제가 되어 자신이 진시 황제의 권력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푸틴의 마음도 아닙니다. 푸틴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미국과 대결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하여 화려했던 과거 소련의 영광을 다시 이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본심은 자신이 제정 러시아의 황제 차르가 되어 영구 집권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베의 마음도 아닙니다. 친미내셔널리즘자인 아베는 압박을 통해 북한 핵과 미사일을 제거하고 대한 민국을 적으로 만들어 기술 패권을 쥐고 대한민국을 무릎꿇게 하며 자기 나라도 헌법을 바꾸어 전쟁 가능한 나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의 본심은 군국주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보수 세력을 결집하여 자신이 5년, 10년 계속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김정은의 마음도 아닙니다. 김정은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면서 국제 제재를 풀고 핵을 보유한 경제 강국으로 영구 집권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 인류를 위하고 자기 백성을 위한 마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집권욕을 확대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와 자기 백성을 이용하는 사단이 준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세상이 이렇게 하나 되지 못하고 늘 긴장과 갈등 속에서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평화를 보장받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 국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로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공자는 세상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늘도 문제가 아니고 땅도 문제가 아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보가 문제다." 이태리의 문인 빠삐니라는 사람도 말하기를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다"라고 갈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라고 마음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한 마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어떤 겸손한 마음입니까?

 

1.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동등될 수 없는 분이 스스로 동등하게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6).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직역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서 계시면서 하나님께 동등하게 계시는 것을 붙잡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여기지 아니하고(헤게오마이)”입니다. 이말은 “생각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생각지 않았습니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입니다. “취할 것(하르파그몬)”라는 말은 “붙잡다. 빼앗다. 잡아채다”는 동사에서 온 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것을 꽉 부여잡거나 고집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본체라는 말은 ‘모르페’를 번역한 말입니다. 사물의 실재나 본질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였다는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과 성품에서 동일하신 분으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요14:9; 요 10:30; 사 9:6).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단지 4대 성인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인간이 종교 지도자로 우상화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요8: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8:56절은 "너희 조상(祖上)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요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요1:3, 10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어느 날 인간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선재하신 분으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고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존재 방법이나 양식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포기하고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지배하려고 평생 사는데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어떤 신분이 되고 지위를 얻으면 그 권세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립니다. 겸손은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낮아지실 수 없는 하나님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으시고 포기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한 시골 처녀와 사랑에 빠진 왕의 이야기로 비유했습니다. 왕은 시골 처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처녀는 왕가의 혈통도 아니고 교육을 받은 일도 없는 누더기를 걸치고 시골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왕은 자문관들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우선 명령을 내려 그녀를 왕비로 삼으라고 건의했습니다. 왕은 강요된 순종으로 사람을 얻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참모의 건의는 단숨에 결단하지 말고 먼저 처녀에게 지위를 내리라고 했습니다. 선물을 보내고 공주의 옷을 입혀 보석으로 치장해 준 다음 교육을 시켜서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 왕비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물로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잠시 동안 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서민이 되어 소녀가 사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같은 옷 입고, 같은 음식 먹고, 같은 환경에서 살면서 그녀의 사랑을 얻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분을 버리고 모든 권세를 포기하고 낮아지기고 생각하신 것이 예수님의 겸손의 마음입니다. 겸손은 마땅이 누려야 할 권세와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목사의 목사의 대접을 받고 싶어하고, 장로가 장로의 대접을 받고 싶어하면 겸손하여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남편의 대접을 받고 싶어하고 아내가 아내의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면 가정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장이 투자한 만큼 대접을 받고 싶어하고 직원이 일한 만큼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으면 그 직장은 하라가 될 수 없습니다.

 

2.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비울 수 없는 분이 종이 되기까지 비우는 겸손입니다(7, 8상).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씀합니다. “비어, 가져, 되었고”라는 말을 연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오히려(알라)”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는 소극적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비어(에케노센)’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권적 권능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비우셨다는 말입니까? 바로 밑에 나오는 2개의 분사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종의 형제를 가짐으로 비웠다는 말입니다. 6절에 나온 “모르펜 데우(하나님의 본체)”였던 분이 “모르펜 둘루(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내적 본질을 가지셨던 예수님이 실제 종의 본질과 특성을 지닌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종은 모든 권리를 상실한 자인데 예수님은 실제를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종으로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둘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입니다. 되었고는 어떤 위치나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같은 상태 사람과 같은 위치로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같이라는 말은 원본과 동일한 복사본을 말합니다. 사람이 될 수 없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다시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라고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사람이었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나타나사(휴레데이스)”는 “발견되는”이라는 뜻입니다. 수동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발견되었다는 말입니다. 본질상 예수님은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람들은 역시 예수님을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시고 이 세상을 섬기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종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입고 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 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낮아 질 수 없는데도 스스로 모든 것 포기하고 낮추는 마음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같아 질 수 없는데 같아지는 데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고,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류 역사 속에 실제 실행하신 분이 겸손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같아 지는 삶을 실제 실행했습니다.

원리적으로 말하면 종이 될 수 없는데 종이 되었고, 인간이 될 수 없는 데 인간이 된 것처럼 같아질 수 없는데 같아지는 자리로 실제 내려오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문둥이가 된 성자>라는 책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다미엔 이야기입니다. 문둥이들을 집단 수용한 몰로카이 섬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도 다미엔의 마음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병든 우리를, 불쌍한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당신의 기쁨일 거라고, 취미일 거라고, 사치한 행위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자신이 한센시 병 환자가 됩니다. 그 때 그들은 감동하여 예수를 믿게 되고 섬 전체가 예수를 믿는 천국으로 변합니다.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인간이 되고 종이 되는 비움의 겸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3.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낮아 질 수 없는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낮아진 겸손입니다(8).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직역하면 “그분은 그 자신을 죽음에까지, 참으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복종하게 되셔서 낮추셨다”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는 헬라어 원문에는 앞절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주동사는 “낮추시고”입니다. 앞 절의 주동사는 “비어”인데 빈 것도 스스로 비우는 것을 말하고 낮추시는 것도 스스로 낮추셨다는 말입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어떻게 낮추셨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낮추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때만 복종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복종했다는 말입니다. 가장 극렬한 십자가 형 앞에서도 복종으로 낮추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비방과 모멸과 수치와 잔혹한 형벌과 죽음 앞에서까지 복종하는 낮아짐의 겸손입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철저히 복종하는 겸손입니다. 12영(약72,000명)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진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어느 것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창피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최용덕 선생님이 작사 작곡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라는 복음 찬송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욕쟁이 청년'으로 세상을 비뚤게 바라보며 살았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받고 찬양을 지어 불렀답니다. 어느 날, 대학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강의하러 갔답니다. 강당으로 가다가 화장실 청소하는 한 아주머니를 보며 약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청소를 마친 아주머니가 복도를 지나가는데 한 신사가 그 여인을 보며 너무나 놀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답니다. '사모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분은 대기업 총수의 사모님으로 자기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자원봉사를 왔던 것입니다. 그 날, 최용덕 선생님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깨닫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이 노래를 불렀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 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 주소서.”

세상에 조금 돈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잠깐 포기하고 낮은 자리에 내려와도 이렇게 감동을 주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모든 권세와 권리를 포기하고 죽기까지 낮아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이렇게 겸손하신 예수님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낮아질 수 없는 분이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낮아지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었습니다(9).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주었습니다. 낮아 질 수 없는 분이 스스로 죽기까지 낮아 지시니까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었다(휘페륍소오)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말로 오직 예수님께만 사용하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런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여주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높여 줍니까? 사람이 아닙니다. 상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높여 주는데 지극히 높여 주십니다. 어떻게 높여 주었습니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 11절에 나오는 것처럼 주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하는 위치에 세움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명해졌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최고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명예입니다. 낮아 지실 수 없는 분이 죽기까지 낮아지니까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높아지려고 하면 높아질 줄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망합니다.

바로가 교만하다가 망했습니다(출 5:2). 웃시야가 강성하여 지매 제사장만이 하는 분향을 하다가 망한 것입니다.(대하 26:16) 히스기야가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고침 받고 전쟁에서 이기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니까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입니다.(대하32:25) 느브갓네살이 잘 나가니까, 승승장구하니까 제힘으로 능력과 권세를 차지한 줄 교만하다가 망한 것입니다(단4:30) 사울이 왕이 되니까 세상 못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제 자리 망각하고 제사장이 들여야 할 번제를 제멋대로 드리다 망한 것입니다(삼상13:8-15). 아마샤(왕하14:7-14)가, 웃시야(대하26:16-23)가, 헤롯이 망한 이유도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10)"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2)"

 

둘째는 비울 수 없는 분이 종이되기까지 비우니까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채워주었습니다(9).

9절 말씀을 보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말씀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과 권능과 실제적인 본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인간과 종이 되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은 주(퀴리오스)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사(에카리사토)”라는 말은 “값 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워 인간이 되고 종이 되신 예수님에게 기꺼이 가장 뛰어난 이름 주라는 이름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영예를 주십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 29:23)“

 

셋째는 포기할 수 없는 분이 권세를 포기하고 동등해지하니까 하나님이 예수님 앞에 모든 피조물이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10.11).

모든 권세를 포기하고 낮아지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십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직역하면 “하늘의 그리고 땅의 그리고 지하의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끓도록”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히나(...을 위하여, ...하도록)”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 주되게 하신 목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포기하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님께 그 권세 앞에 복종하게 한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 땅에 있는 자, 땅 아래 있는 자는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님의 권위 앞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할 때 우주의 모든 곳에서 모든 피조물로 경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원문에 보며 “그리고(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앞 문장과 연결된 말입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을 고백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예수님께 주라를 이름을 주신 또다른 2번째 목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모든 피조물이 그 권위 앞에 복종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가 주라고 숭배를 받았는데 로마의 권력으로 죽인 예수님 참된 통치자로 주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 영공을 돌리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한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를 포기하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경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 생활도 자존심 포기하지 못하니까 늘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가정에 평안과 평화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십시오. 자존심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의사가 하라는 대로 다 합니다. 자존심 내세우며 입 벌리라고 하는데 입 다물고 있습니까? 배 내밀라는데 그냥 감추고 있습니까? 죽으면 그것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60-70이 되었는데도 끝까지 자존심 내려 놓지 못하고 싸움하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 결혼 다 시킨 60대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몹시 화가 났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답니다. "나가 버려!" 아내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답니다, "나가라고 하면 못 나갈 줄 알아요!" 그런데 잠시 후 아내가 다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남편은 왜 다시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갔어요!" "그게 뭔데?" "바로 당신이에요!" 남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답니다. 그 후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뭐해! 이혼을 해도 당신이 위자료로 나를 청구할 텐데..." 라며 여유 있게 웃고 말았답니다. 자존심만 내려 놓아도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그 위치에 오래 머물도록 해 주십니다.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17:20)"햇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 147:6)"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받아 주신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므낫세가 크게 겸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대하33:10-13), 요시야 왕이 겸비하여 기도할 때에 들어 주셨고(대하34:27), 에스라가 겸비한 자리에서 기도하니까 들어 주셨습니다(에스라8:21-23).

오늘날과 같이 1등이 최고 있고, 자기 PR시대에 예수님처럼 어떻게 겸손하게 사느냐고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면 바보취급 받고, 무시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하나가 되어 평화스럽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사단이 주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참된 평화와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첫째 낮아질 수 없는 분이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낮아지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신 것 처럼(9) 우리도 하나님이 높여 주시도록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비울 수 없는 분이 종이되기까지 비우니까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채워주셨던 것 처럼(9) 우리도 하나님이 뛰어나게 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기 위해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포기할 수 없는 분이 권리를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예수님 앞에 모든 피조물이 무릎을 꿇게 했던 것 처럼(10.11) 우리도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 마음 가지고 끝까지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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