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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삶(빌2:1-4 빌립보서 강해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195 추천수:11 220.120.123.244
2019-07-21 13:40:04

하나되는 삶

빌2:1-4(빌립보서 강해7)

 

닭은 서열 질서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물학자가 수탉 100마리를 한 울타리에 넣었답니다. 그러자 3일 동안 피 터지게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자 싸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서열이 정해진 것입니다. 동물들의 서열 싸움과 영역 다툼은 생존본능입니다. 동물은 생존과 생식을 위해 삽니다. 먹는 것 앞에서는 부모와 자식도 없고 힘이 지배합니다. 그런데 <휴머니즘의 동물학(비투스 B. 드뢰셔)>을 보면 야생닭은 서열 질서가 강하지 않다고 합니다. 닭들은 식량을 찾을 때 서로 돕고 알곡을 발견하면 식구들을 부른다고 합니다. 서열 질서는 두 마리의 닭이 동시에 한 알의 알곡을 먹으려고 하는 경우에만 강하게 발동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형 닭장에서 사는 닭들은 서열 질서가 강하여 만날 때마다 억압과 굴종을 강요한다고 합니다. 똑 같은 닭이지만 자유롭게 야생하는 닭과 갇혀 있는 닭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자기들끼리만 있으면 형제일지라도 주도권을 잡기위해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동생이 낯선 아이들에게 맞으면 누이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달려가 동생을 보호합니다. 집안에 갇혀 있을 때는 서로가 적이 될 수 있지만 밖으로 나오면 많은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서로 동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사는 어느 공동체에서나 나타납니다. 정치인들도 여야가 치열하게 싸우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한 팀이 됩니다. 회사원들도 평상시에 서로 승진하기 위하여 동료를 적으로 보게 되지만 회사가 위기를 당하고 경쟁사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동지가 되어 하나가 되어 경쟁 회사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종종 서열의식의 종이 되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투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빌립보 교회도 서열 싸움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이방 여인의 집에서 개척한 교회입니다(행16:14). 그 후 귀신들렸다 고침받은 여인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교인 되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이 출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빌립보 교회는 한 여성의 헌신으로 출발한 교회이기 때문에 여성 중심의 교회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의 부흥에는 헌신된 여성의 힘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세밀하고 모성적 사랑이 넘치고, 부드러운 배려가 넘쳤지만 하나됨이 약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말이 많고 말이 많다보면 아차 하는 순간에 일이 꼬여 알력이 생기게 됩니다. 샘이 많고 질투가 많은 두 여인이 서로 서열 싸움을 하느라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 더 잘 해보고자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되는 삶을 살으라는 것은 단순히 두 여인에게만 주는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 전체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2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성경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람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네 개의 구문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은 하나의 동사 구문인 마음을 같이하여’와 그것을 보완 수식하는 두 개의 분사 구문인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을 품어’와 하나의 형용사 ‘뜻을 합하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국, 서열의식으로 다투지 말고 하나가 되라는 연합의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기도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17:21). 성도가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된 것같이”라는 말씀과 같이 성자 예수님과 성부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되어 살게 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투고 싸우면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하나되는 것은 신자의 존재 양식입니다. 가정을 만들 때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만 둘이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루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도 예수님이 몸이고 우리가 지체가 되어 한 몸 공동체, 한 가족, 한 시민, 한 성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실상 원문은 2절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주 동사입니다. 하나가 되어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선교헌금을 하여 바울을 돕고 열심히 전도를 하는데 하나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이 감옥에서 얼마나 가슴 아팠겠습니까? 나이 들어 자식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싸우면 부모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하나 되지 못한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1. 우리가 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본절은 원문에 보면 “에이(만약 ...이면)”으로 시작합니다. 조건절처럼 보이지만 “...이 있기 때문에”와 같이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직역하면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권고가 (있)으면,만일 어떤 사랑의 위로가 (있)으면,어떤 영의 교제가 (있)으면, 만일 어떤 애정들과 자비들이 (있)으면’입니다. 그 안에 4가지 “권면, 위로, 교제, 긍휼과 자비”가 나오는 데 그것이 이미 있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그리스도 안에”입니다. 이런 덕목은 성도 개인의 윤리적 고상함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거든”이라는 말은 이미 예수 안에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출신, 신분, 학력, 성별, 성격과 신앙의 연륜, 나이, 신앙의 배경, 개성 등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서 하나되는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남남이었습니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거듭남 즉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같이 부르는 영적 형제가 되었습니다. 영적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할 구체적인 이유 인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네 가지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되어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는 권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권면으로 번역되 파라클레시스는 “곁으로 부르다.”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습니다. “격려, 권고, 위로, 위안”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과 어근이 같은 말로 부름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됨의 권면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하고 훈계가 이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삶은 우리의 필요나 우리의 목적 때문이기 보다는 우리 주님의 권고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0-21)”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위로는 “위로, 격려”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통과 고난에 처할 때 그 크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빌립보 교인들은 십자가의 아가페적 사랑에 근거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를 위로해 주지 않고 나를 격려해 주지 않는다고 분열되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위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의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영적인 교제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하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모두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한 몸을 이루고 있어서 사실상 다툼과 분열이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이노니아를 특정으로 하는 교회는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이익

단체나 영리를 목적으로 구성된 사단 법인과는 그 본질적 성격부터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익에 의한 교제가 아닙니다. 선호도에 의한 교제가 아닙니다. 취향에 따른 교제가 아닙니다. 성령에 근거한 교제입니다.

 

넷째는 긍휼과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과 자비는 중언법으로 간주하여 하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를 입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의역하여 해석하자면 긍휼과 자비로 우리가 죽을 죄, 지옥 갈 죄에서 용서받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무자격자인데 과분한 은혜를 입어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서로가 용서하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엄청난 용서를 받았는데 작은 잘못을 보면서 용서해 주지 못하고 정죄하고 갈라서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 이 네가지를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고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비신앙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미 이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이”라는 접속사는 없는 사실을 가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객관적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어떻게 하나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억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절에 '마음을 같이하여'는 문자적으로 '생각을 같이 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무려 10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프로네오”는 단순히 지성적인 요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정, 태도, 의지가 그리스도 한 분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한 가지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들 모두가 그리스도 한 분만을 생각하면 마음은 자연히 같아집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생각하면 시간 지나면서 자연히 하나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는 사랑의 대상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아가페 사랑을 실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연합해서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바울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게바를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아볼로를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설정하면 파당이 생겨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 아가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교회는 분열과 분쟁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뜻을 합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한 호흡의, 같은 마음을 지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서 교회를 이룬 성도들은 각각 개성이 다르고 출신 배경이 다를지라도 마치 듀엣 가수가 호흡을 같이하듯이 하나된 호흡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획, 뜻, 생각 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역시 내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뜻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생각과 목표가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는 뜻을 같이 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눈은 눈대로 뜻을 가지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마음을 품어”는 앞에 나온 “마음을 같이 하여”를 반복하는 표현으로 어떤 것 하나만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회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엠 4-6)”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도 한 성령을 받고 세례도 한 이름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믿음의 대상도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생각과 목표에서 일치된 마음을 가져야 하나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사한 의미의 말을 네 차례나 반복함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되는 것도 남편을 중심으로, 아내를 중심으로, 자식을 중심으로, 돈을 중심으로, 놀이를 중심으로, 권력으로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죽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을 중심으로, 헌금을 많이하는 장로님을 중심으로, 말을 잘하는 권사님을 중심으로, 인기있는 집사님을 중심으로, 친한 친구인 친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으로 하나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면 결코 하나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명령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뛰어나겠지’ 라는 식의 막연한 추측에 그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무 일에든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여기라”는 말은 “계산하다. 셈에 넣다”라는 말로 매사에 신중하게 검토하고 판단해 보아 상대방의 뛰어난 점을 발견했을 때 그 점을 구체적으로 인정해 주고 그 사람을 높여주라는 말입니다. 매사 내가 높고 너는 낮다고 생각하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고 하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선악과를 먹고 인간은 타락하였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뱀을 옳지 않다고 합니다. 선악의 기준을 자신이 정하고 남의 그름을 찾아내고 들추어 내어 공격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데 방해하는 것이 2 가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내부적으로

첫째는 다툼입니다. “에리데이안”을 번역한 말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구, 천박한 이기주의, 당파심, 돈을 기대하는 정신, 이기적인 야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정치적인 지위를 구추하는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1장 17절에서도 이미 말씀했는데 성령의 교제와는 대조적인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 사탄은 아담 이후 끊임없이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천박한 이기심으로 당파를 만들게 하고 분쟁을 일으켜 교회를 분열시겼습니다. 천박한 이기심을 내려 놓지 않으면 분열은 멈추지 않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기업도, 국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일본이 경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데 조선 시대처럼 사색당파를 만들어 천박한 자기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맨날 남의 허물만 들추어 내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내 이익만 충족되면 나라는 망가져도, 교회는 망가져도, 가정과 직장이 망가져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비판하고, 직분자를 비난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교회가, 그 가정이, 그 기업이, 그 나라가 하나가 되어 잘 되겠습니까? 남을 비판함으로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하면 교회는 늘 파당이 생기고 분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남을 비판함으로 자신의 옳음이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고 자신은 더 추해지는 것입니다. 더러운 물은 휘젓는다고 깨끗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맑은 물을 넘치도록 흘러 보내면 결국 깨끗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근거 없는 생각을 고집하거나 관철하려 한다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석가인 바클레이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무엇에 열중한다든지, 자기의 신앙을 중요시한다든지, 자기들의 계획과 제안을 열심히 성취하려고 할 경우이다. 열심이 증가하면 할수록 대립의 위험이 그만큼 더 커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자만심을 가진 사람 역시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분열을 만듭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하는 곳에 하나된 삶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허영입니다. “케노독시안”을 번역한 말로 “공허한 견해, 잘못된 생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망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헛된 영광 즉,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되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헛된 허영심’, '천박하고 근거 없고 가식적인 자부심', '자신에 대한 헛된 생각' 등은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생각하는 과대 망상이나 그렇게 보이 려고 하는 헛된 생각입니다. 허영심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보고, 자신은 신앙의 차원이 다르다는 영적 교만에 빠지게 하여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갈라지게 만듭니다. 대형교외에 나가야 수준 있는 신앙인으로 생각하고, 수준 있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다녀야 대단한 교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헛된 허영심으로 얼마든지 헌신하고 베풀고 자비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동굴 안에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하늘을 보며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을 근거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보는 적극적인 자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입니다.

“오직(알라)”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입니다. 자기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며(왕상18:23, 시118:67) 비천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시112:4-6; 시17:28).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이야 말로 기독교 공동체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엡3:8)”자라고 하였고,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조금 헌신한다고, 조금 열심이라고, 조금 많이 알고 있다고, 조금 많이 가지고 있다고, 조금 높다고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됨을 파괴하는 독소일 뿐 아니라 사탄이 하나됨을 파괴시키는데 사용하는 최첨단 무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이 돕는 배필로 하나됨을 살지 못하게 만든 것도 사탄이 사용한 교만의 덫에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다는 교만의 유혹에 넘어져 인류에게 이렇게 분열이라는 비극이 찾아 온 것입니다. 잘 나갈 때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여 하나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잘 나가지도 않는데 교만하면 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16:18)”라고 말씀합니다.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교만은 추해집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망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잠언 15장 25절에 보면,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울왕도 교만하여 망했습니다. 골리앗도 교만하다 죽었습니다. 솔로몬도 교만하다 망했습니다. 웃시야 왕도 교만해져서 대제상만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다 나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히스기야도 대단한 은혜를 체험받은 사람이지만 교만하다 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미덕은 겸손의 바구니에 담길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타툼 물리치고 남을 나보나 낫게 여기는 하나 된 삶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허영을 접고 남을 나보나 낫게 여기는 하나 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겸손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하나 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3) 우리가 남의 일을 돌아봄으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에 나온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원문은 2절에 나오는 말로 2-4절의 주절 역할을 합니다. 4절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라는 말인데 공동 번역은 본문을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로 번역했습니다. NIV는 “너희들 각자는 너희 자신의 이익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이익을 생각해 주고, 타인의 관점을 인정하고, 타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나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자신의 일은 내버려 두고 타인만을 돌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일만 또는 타인의 일만 돌아보는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라 둘 다의 일을 돌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자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만 간섭하는 것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된 교회 공동체가 하나됨을 방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남의 일을 참견하기 이전에 자기가 받은 사명과 직분에 우선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신앙 상태를 늘 돌보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단점과 장점은 무엇인지, 자신의 본분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잘 성찰하지 않으니까 늘 다른 사람과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끌만 보며 자기 잘났고 남 못났다고 비판하며 하나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자기 일에만 충실히 한다고 남의 일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면 세상 사람처럼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약육 강식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신을 배로 삼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세상이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과 타툼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까? 몸이 손만 충실한다고 다리는 외면하면 결국 몸 전체는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만 관심의 영역, 관심의 범위를 제한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된 삶으로 화합하려면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일이나 형편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인 몸입니다. 위만 좋다고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간이 나쁘면 결국 환자가 됩니다. 나 한 사람만 잘 산다고 교회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위가 자기 자랑하면서 간이 나쁘다고 드러내면 결국 자기 몸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나만 관심을 갖는다면 결코 하나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차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로 도움을 주고 기도로 사랑으로 웃음으로 물질로 도움을 주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세워주도록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남을 내 몸과 같이 여기고 돌아볼 때 참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을 함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것입니다. 권면은 “곁으로 부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이 약하거나 시험에 빠진 성도가 있으면 소외시키지 말고 곁에 불러 권면하여 세워줌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랑의 위로로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위로는 설득하고 격려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육간에 고통에 빠진 사람을 격려해 주고, 잘 못된 길로 가는 사람을 사랑으로 설득하여 바른 길로 가게 만들어 줌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교제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성령 없는 교제는 파당을 만들고 교회 공동체를 해치게 만듭니다. 성령 안에서 교제함으로 지역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정치 색깔이 다르고, 생활 정도가 달라도 얼마든지 교제하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로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이웃의 사정과 형편을 마치 나의 일처럼 여기는 긍휼과 자비로 용서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는 하나되고 불신자들은 세상 사람과 다른 신앙인의 하나된 삶을 보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우리와 하나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된 삶을 사는 것은 신앙인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이고 사명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권면과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으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일을 돌아봄으로 하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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