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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빌립보서5, 빌1:19-2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02 추천수:0 220.120.123.244
2019-07-07 17:54:35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빌립보서5)

빌1:19-26

 

오늘은 반년이 끝나고 반년이 시작되는 첫 주일에 지키는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단어 그대로 설명하면 과거 대부분 농사 짓고 살던 시절 신앙인들이 보리를 추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반년시 시작되는 첫 주일 지난 반년을 감사하고 반년을 감사를 다짐하면서 시작하는 감사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항상 감사절이 되면 감사 설교를 했는데 우리가 빌립보서를 강해하면서 얼마 전 감사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순서에 의해서 빌립보서 다섯 번째 강해로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얼마전 50대 한 배우가 호텔에서 자살을 하였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아들에게는 어머니, 부모에게는 딸, 형제에게는 누이인 그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 중 한 명이 죽었고,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우울해 했다고 합니다. 1990년부터 유명 연예인으로 자살한 사람은 33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연예인 자살률이 세계적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한해 매년 1만 2천 명이 넘게 자살을 합니다. 하루 36명, 40분마다 1명 자살하는 자살 대국입니다. 10대와 20대, 30대 청소년, 청년층 사망원인의 1위는 자살입니다. 2003년부터 16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한 번도 다른 나라에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3배, 산업재해 사망자의 6배 규모라고 합니다. 자살 주요동기는 첫째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문제, 둘째가 파산, 가난과 같은 경제생활 문제, 셋째가 불치병과 같은 신체 질병, 넷째가 이혼과 같은 가정문제, 다섯째가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한 고난을 넉넉히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냉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 자신이 겪고 있는 바로 그 일을 “나 혼자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며 죽음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더는 견딜 수 없고,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은 마치 감기를 핵폭탄으로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극단적인 고통이 다가 와도 자살로 인생을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살을 글자를 바꾸면 “살자”가 됩니다.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던 존스 홉킨스 대학교 의과 대학 정신 의학 교수인 재미슨은 “목숨을 끊기로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이 겪은 일을 해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 건강이 좋을 경우에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것이 자살을 정당화할 만큼 비참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한 우울증을 견디거나 인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 극한 고난이 다가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가 반기지 않은 수많은 어려움이 노크도 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이럴 때 어떤 극한 고난이라도 넉넉히 이기고 일어날 수 있도록 평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인생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죽음이라는 극한 고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택해야 할지, 삶을 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23절을 읽어 보십시오. 죽음과 삶 사이에 끼어있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했고, 고난을 넉넉히 이겼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극한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사도 바울의 인생관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관이란 우리말 큰 사전에 보면 "인생과 세상에 관하여 가지는 의견", "인생의 의의, 가치, 목적 따위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전반적인 사고체계" 등으로 풀어 놓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view of life로 표현하듯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입니다. 인생의 본질, 의미, 가치 등에 대한 총체적인 견해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고난이 다가오면 그 고난을 디딤돌로 삼고 일어날 수도 있고, 그 고난이 거침돌이 되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넉넉히 이기려면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평소에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려면 항상 희망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9).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이것(투토)’은 바울이 처해 있는 상황, 곧 환영과 배척을 받고 있는 처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 문장을 보면 감옥생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장 13절에 보십시오. “나의 매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도 “나의 매임”, 17절에도 “나의 매임”이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극한 고난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대 그리스말로 '아포리아(Aporia)'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절체절명의 상황을 말합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름'을 말하는 것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Lack of Resources)', 즉 '길 없음(Impasse)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No Exit)의 상태'를 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감옥에서의 석방 혹은 성결한 생활로 인한 영적 구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결국,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정신의 감옥, 질병의 감옥, 불치병의 감옥, 가난의 감옥, 실패의 감옥, 능력의 한계의 감옥 등 어떤 감옥이 와도 탈출하고 일어설 것이다는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늘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절망의 인생관을 가지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의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난관이 다가오면 10명의 정탐꾼처럼 우리는 그들에 비해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절망적 인생관을 갖지 말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넉넉히 이기는 희망적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19절을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2가지 이유 때문에 감옥에 풀려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너희의 간구”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오늘날도 기도하고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얼마든지 모든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살아서 빌리보 교인들과 함께 있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도 극한 고통 가운데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어떤 고난의 환경에서도 이런 인생관을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불치병으로 깊은 절망의 순간이 찾아 왔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치유받고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한나는 불임이라는 고난이 찾아 왔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은혜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민족 지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떡 한조각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던 사렙다 과부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선지 생도의 아내는 남편이 죽고 부채로 인해 파산의 위기에 처해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 처했지만 엘리사를 만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고난의 늪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얼마든지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인생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기 위해 타인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22-26).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나만 죽으면 끝나지”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이 땅을 떠나 속히 주님께 가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21절에서 죽은 것도 유익하다고 했지만 그가 살아서 복음 전파의 열매를 맺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죽음과 삶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운명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전개해 갈 때 바울 자신의 선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미래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다. 바울의 바람은 어떤 것입니까?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까? 첫째는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살게 되면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고 빌리보 교인들의 믿음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가 살아서 돌아가면 빌립보 교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셋째는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자랑이 바울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앞세우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믿음의 진보가 있게 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기쁨이 있게 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것이 많게 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감옥에서 놓이게 되면 그 모든 것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나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나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나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진보를 보여주고, 기쁨을 주고, 자랑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십시오. 홍해 앞에 서 있는 모세를 보십시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이 땅에 피해만 준다면 빨리 천국에 가야 하지만 한 사람이라고도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살아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인생관이 다른 것은 자기 중심의 인생관이 아니라 더 나아가 타인 중심의 인생관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극한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난을 넉넉히 이기고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리스도인의 황금율은 남을 돕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 성숙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를 생각합니다. 형제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생각합니다. 교인도 성숙하지 못한 교인은 자신밖에 모릅니다. 교회도 성숙하지 못하면 자기 교회밖에 모릅니다. 암 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예의도 없고, 도덕도 없습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성숙한 교회는 남을 위해 사는 교인이 많은 교회입니다. 자신이 가진 시간, 자신이 가진 재능, 자신의 언어, 자신의 물질, 자신의 건강, 자신의 믿음으로 얼마나 많이 남을 섬기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푸는 삶을 인생관으로 가진 삶이야 말로 참으로 고귀한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았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모았느냐가 아니라 남을 위해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주었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2-13)“

 

3.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려면 항상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20b-21).

극한 고난 가운데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투옥이나 배척 등과 같은 외적인 환경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어떤 말로 수식되어 있습니까?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면 사는 대로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을 존귀하게 하고, 죽으면 죽음으로 주님을 존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고난이라도 넉넉히 이기게 하는 그의 인생관입니다. 그의 생명이 지금 끝이 나든 더 살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달에 죽든, 6개월 살다 죽든, 10년 살다 죽든, 50년 살다 죽던 그에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죽도 좋습니다. 자신은 감옥에 갇혀도 좋습니다. 자신은 체면이 깎여도 좋습니다. 자신은 손해를 보아도 좋습니다. 자신은 비난을 받아도 좋습니다. 자신은 자존심이 상해도 좋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편할 때만, 자신이 대접을 받을 때만, 자신이 잘 나갈 때만, 자신이 출세할 때만, 자신이 건강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 감옥에 갇혀 극한 고난을 받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에서라는 말은 내 삶을 통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되 그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이 생각이나 말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으로 그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주체이고 자신은 도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시대 바울을 사용하여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 의견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면 그만입니다. 자신을 도구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일을 하시면 그만입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동기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삶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 일에 열심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원리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21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말은 앞에 “가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21절이 20절의 이유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행동의 동기요, 힘이요, 목적이요, 그의 생각이요, 비전이요 그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이 짤막한 말 속에 그의 인생관 모두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뿐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그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바라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에 의미를 주고 그리스도만의 그의 삶에 목적을 주고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조차도 그리스도와의 관계하에서 의미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는 것이 철저히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면 죽음이란 불안의 대상도 공포의 대상도 아닙니다. 죽음은 그리스도를 잃은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이요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광스런 날이요 상급을 받는 시상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두 가지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선한 양심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행20장 17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면서 그들에게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는 것을 봅니다. 33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으로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끄럼이 없는 담대한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았다고 강조합니다(행 23:1; 24:16; 딤후 1:3)”

둘째는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고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죄로 석방되든, 유죄를 받고 사형을 당하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땅에서 얻는 것에 인생을 바친다면 죽어 무엇을 얻겠습니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결국,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고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이고 가치였다면 죽음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가치 없는 것 모두를 놓아두고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음의 순간에도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미련이나 후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세상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갈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생관을 가지고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땅 살면서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체면도, 물질도,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쾌락도, 출세도 아닙니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에게 주어진 건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질, 자녀, 환경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경을 받으시고 사랑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여지고 알려지고 들려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려면 항상 희망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9).

2.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기 위해 타인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22-26).

3.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려면 항상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20b-21).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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