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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거와 우리의 사명(요한복음20:11-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60 추천수:0 220.120.123.244
2019-04-21 13:55:00

 

부활의 증거와 우리의 사명

요한복음20:11-18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부활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 부활했으니 나도 죽음을 이기고 결국 부활한다는 소망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죽음만큼 인간을 절망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슬프게 하며,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아있을 때 자산이 되는 것이지 죽으면 유산에 불과합니다. 호화로운 별장이 있다 한들 죽으면 쇼파에 한 번 앉아 보지 못하고, 최고급 승요차가 있다한들 죽으면 그 키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지위도 죽으면 그저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자도, 권력자도, 젊은이도, 미인도, 위대한 학자도, 늙으니도 죽음 앞에서 다 무너집니다. 죽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시체에 불과해 사흘 두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가장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신앙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면 죽음은 허무요 단절이며 고통일 뿐 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죽음을 맛본 후 12시간 이후에 소생한 600여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죽음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죽음 후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1.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고 결국 영원히 예수님 재림할 때 부활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 앞에 가서 대성통곡하였습니다. "크라이우사"라는 말은 대성통곡하는 울음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슬퍼하며 대성통곡했을까요?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통곡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해주었지만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16절을 보십시오. “마리아야”라고 부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를 보았다”고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왜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소개하는 성경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기록자의 진실성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달자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신화적 기록이고,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꾸며낸 신화적 이야기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역사를 평가할 때 현대인을 지배하는 사고 구조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비평의 원리입니다. 둘째가 유추의 원리입니다. 셋째가 상관의 원리입니다. 현재의 경험과 불일치가 되면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꾸며낸 이야기, 신화로 생각합니다. 과거 발생한 사건은 오늘과 상호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단회적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과거에 부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신화적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양식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기절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설을 말합니다.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도난설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환상설을 말합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 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신비설을 말합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에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나눌 때 크게 기록된 역사와 사실적 역사로 나눕니다. 기록된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역사가 사실이려면 객관성이 필요합니다. 많은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고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증거가 분명해야 합니다. 학자들은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으로 신뢰성이 있는가는 네 가지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첫째는 구전 전승 기간입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가르침이나 생애에 대하여 문서로 기록되기 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 짧을수록 사실에 가깝습니다. 단군신화는 일연이 삼국유사에 기록할 때까지 3600년 동안 전승되었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230-600년,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약 135년, 공자는 약 400년, 알렉산더 대왕은 사후 400년, 예수님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는 약 80년 후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약 30-60년에 후 복음서에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18년 후에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본 사람들이 남아 있을 때입니다. 둘째는 원본과 필사본의 시간 간격입니다. 간격이 짧을수록 원본에 가깝습니다. 타키투스 연대기는 1000년, 시저의 갈리아 전쟁은 900년, 호머의 일리아드는 500년이 걸렸지만 신약 전체는 300년 내에 다 완성되었습니다.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30-50년 차이 밖에 나지 않습니다. 셋째는 사본의 개수입니다. 사본의 수가 많을수록 신뢰성이 높습니다. 시저의 갈리아 전쟁은 10개, 플라톤의 4부극은 7개, 타키투의 연대기는 20개이지만 신약성경은 무려 2만 4천여개가 됩니다. 넷째는 사본들 사이의 내용의 일치성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75%의 일치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약은 99.5% 일치합니다. 그것도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의 순서 정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면 고대의 다른 인물들의 역사성도 함께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고대 종교들이나 다른 고대 문서들과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의 역사적 확실성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고대 역사자료에도 45개나 나오며 예수님의 생애, 인격, 가르침, 죽음, 부활 등에 대하여 총 129가지나 기록되어 있다고 게리 하버마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정신병자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도 바울입니다. 믿지 않을 정도가 아닙니다. 요즈음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찾아 다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나 서기 55년 경에 예수님은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4-8)”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죽어서 무덤에 묻혔습니다. 사흘 후에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6-7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을 감은 세마포가 그대로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부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 마치 증발하듯 그것들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전에 살아 계실 때 우리와 동일하게 갖고 계셨던 몸과는 확연히 다른 상태임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와 세마포를 푼 것과는 다른 차원의 부활입니다. 죽은 나사로는 부활했지만 수족을 세마포로, 얼굴과 머리는 수건으로 감싼 상태였으므로 다른 이가 풀어 놓아야 맘껏 자유로이 다닐 수 있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가 풀어주지 않아도 세마포와 수건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몸만 쏙 빠져나오셨습니다.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8,9).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라면 복음서에 부활의 처음 목격자가 마리아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인들을 증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적 기록이기 때문에 첫 목격자가 여성 마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곱 귀신들렸다 낳은 여인 마리아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라면 제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화형을 당하면서 부활을 증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역사성을 변증하는 논객으로 잘 알려진 ,예수의 부활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책을 쓴 리코나박사가 있습니다. 그동안 무신론자 리처드 캐리어, 이슬람교도 새비어 앨라이, 불가지론자 바트 어먼 등 여러 회의론 자들과 자주 토론을 벌이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유신론자, 이신론자, 무신론자 할 것 없이 누구도 예외 없이 편견을 떨치면 부활을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이 부활에 관하여 1975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어, 독일어,영어로 쓴 자료를 하버마스가 2,200편 이상 모아 부활이 사실인가를 연구하였답니다. 니코나는 최소한 다섯가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 둘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믿었다는 사실, 셋째,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회심했다는 사실, 넷째 예수님의 동생인 회의론자 야고보가 회심하고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 다섯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부활을 실제 체험하고 믿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활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간 자들입니다.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낙담하고 뿔뿔이 흩어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 걸 수 있지만 거짓과 사기를 위해 누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어 놓겠습니까?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쉽게 희생제사와 율법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불과 5주 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안식일 제사 대신에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5천 명이 3천 명이 그렇게 갑자기 1500여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전통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확실하고 큰 사건, 인생관을 바꾸어야만 하는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기록하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1:1)”라고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유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희생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로마가 부활신앙으로 정복되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부활을 전하는 사명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여 마리아에게 부활을 믿음을 확신시켜주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붙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붙들다라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주님을 붙들고 늘어지는 행위를 말합니다.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을 중지하라는 말입니다(마28:9). 우리 말에서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번역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이 임박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붙들고 다시는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마리아의 태도를 황급히 막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막9:5)했던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감격에 겨워 그분을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생각에 빠져 주님이 하실 일과 자신의 사명을 놓치고 있는 그의 무지한 태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곧바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 형제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승천을 말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과 곧 아버지 하나님께로 승천하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 말씀대로 부활하였으니 사명을 붙들고 이 부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의 장소에 증인으로 있었고, 빈 무덤을 맨 먼저 발견했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으로서 부활의 증인으로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사명과 직결됩니다. 누구의 사명입니까? 부활을 직접 목격한 여인들과 제자들과 오늘날 부활을 믿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죽음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목격하고 직접 대면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어떻게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전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본 것을 전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간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였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부활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것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하신 주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고 최초로 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패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귀신들려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산 사람입니다(눅8:2).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어디에서나 부활을 전하는 소명자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 우는 자가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부활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고 믿지 않는 도마에세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 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9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가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침묵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신문사에 알리고 일가 친척에게 알리고 친구에게 알리지 않겠습니까? 보통 평범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는데 어찌 그냥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삶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입술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활을 확신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부활을 확신하면 부활이라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고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자연히 부활의 사명르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 아침이 되면 즐거운 낯빛으로 인사를 나누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 다시 사셨네" 이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도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정교인이 많은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이 혁명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한 공산당 이론가가 사람을 모아 놓고 예수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사기꾼인가를 열심히 입증하면서 "이 중에 누구든지 내 이론을 반대해서 이야기할 사람 나오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한 젊은이가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공산주의자는 당황해서 "5분 밖에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제한을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가 "나는 5분도 필요 없고 5초면 됩니다."라고 하더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전회중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장악하여 아무리 세뇌를 시켜도 부활을 확실하게 체험하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였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지금도 수십억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실로 살아 역사하십니다.

지옥가는 인간들에게 부활을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과 명예와 지식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와 죽음과 슬픔과 환란, 질병, 사탄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리 스트로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예수는 역사다”다는 영화로 나왔습니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으니까 시간될 때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분은 다양한 반기독교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많은 변증책을 썼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 <부활의 증거>라는 책을 썼습니다. 기회되면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일대 법대 출신의 명 저널리스트였던 리 스트로벨라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답니다. 냉소적 회의론자였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믿었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막연히 희망이나 얻어 보려고 신과 천국을 지어냈다고 생각했답니다. 신앙은 굳이 시간들여 알아볼 가치조차 없는 말짱 허튼소리였답니다. 기자로서 최대의 쾌락을 얻는데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설이거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제자들이 다 짜고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자로서 최대의 쾌락을 얻는데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고 자연스럽게 몹시 부도덕하고 술에 찌는 삶이 연속되었답니다. 자아도취에 빠졌고 설명하지 못하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고 아내와 싸우고 홧김에 발길질 하여 거실 벽이 구멍이 뚫릴 정도였답니다. 아내와 어린 딸은 눈물을 흘렸고 어린 딸은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오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숨었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중대 발표를 했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예견했으나 아내의 성품과 가치관이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답니다. 어느 주일날 아내가 교회를 가자고 해서 아내가 보여준 변화에 감동된 탓도 있지만 사이비 집단에 빠져 있는 아내를 건져내려고 교회에 나갔답니다. 첫날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다는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는 그날 신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전공인 언론학과 법학적 지식과 기자 정신으로 21개월 간 예수님이 진짜 부활했는가를 추적하였답니다. 예수님이 자칭 신인가 진짜 신인가는 부활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추적 결과는 예수님의 부활은 가능성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 속에 그 어느 누군가에게 여덟 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만조분의 1이다."라고 합니다. 이 확률은 미국 텍사스 주(한반도의 세배 넓이) 전체를 은화 동전으로 덮는데, 그냥 덮는 것이 아니라 동전을 60cm 높이로 쌓아 덮고, 그 중에서 미리 표시한 단 한 개의 동전을 단 한 번에 정확하게 집어낼 확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구약성경에 약 300개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창3:15) 했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갈4:4-5). 베들레헴에서 탄생과(미5:2; 마2:1) 탄생의 때(단9:25; 눅2:1-2), 동정녀 탄생(사7:14; 눅1:27), 헤롯의 학살(렘31:15; 마2:16-18), 애굽으로 피난(호11:1; 마2:14-15), 하나님의 아들(시2:7; 마3:17), 친구에 의해 배반당함(시41:9; 눅22:47-48), 은 삼십에 팔림(슥11"12; 마26:15), 손과 다리가 찔림(시22:16; 요20:27), 조롱과 모욕당함(시22:7-8; 눅23:35), 뼈가 꺾이지 않음(시34:20; 요19:32-33), 옆구리가 찔림(슥12:10; 요19:34),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냄(사53:9; 마27:57-60), 부활하심(시16:10; 막16:6-7), 승천하심(시68:18; 막16:19) 등 수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었습니다.

수학자 피터 스토너는 어떤 한 사람에게 총 48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조의 13승분의 1(1/1조¹³)이라는 거의 측정 불가능한 통계 수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 예언들은 단 한 가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재림 예언만 제외하고 모두 2000년 전 다윗의 동네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승천하셨으며, 언젠가 이 세상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는 <부활의 증거 : 5가지 부활의 증거와 확신>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뒤바꾸는 최고의 핵심적 사건이 될 것이며, 만약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법률을 가르치는 교수로 여러 기록 문서의 증언을 철저히 검토하고, 빈 무덤이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결론은 부활이 사실이다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천재이며 캠브리지의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인 'C.S 루이스'는 기독교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마다 연구를 하다가 자기가 가장 협오했던 복음서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과 그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리 스트로벨은 침대 옆에 털썩 무릎을 꿇고 여태껏 부도덕하게 살아온 삶을 다 쏟아 놓고 회개하였답니다. 그리고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갔답니다. 아이가 있어 얼른 끌어안았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잽싸게 빠겨나갔답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답니다. “여보,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 계셔, 방금 막 그분께 내 삶을 드렸어” 울음을 터뜨리며 내 목을 끌어안았답니다. 사실 아내는 정말 막막했었답니다. 아내가 울먹이며 그에게 말했답니다. “내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기도해주는 동료들에게 ‘제 남편은 가망 이 없을 것 같아요. 남편은 <시카고트리뷴>지 법률 쪽 편집자인데 아주 완고하고 냉정한 사람이거든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그중 한분이 아내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레슬리, 가망 없는 사람이란 없어요.’’ 그러면서 에스겔 36장 26절 말씀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로운 영을 줄 것이다. 내가 너희 육신으로부터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너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기도하자고 했답니다. 아내는 2년 동안 그 구절을 붙들고 남편을 위해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그 주일 오후를 기점으로 하나님은 아내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시작했답니다.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답니다. 가치관과 도덕성과 태도와 철학과 세계관과 대인 관계와 우선 순위도 달라졌답니다. 시간이 가면서 내 삶 전체가 변했답니다. 사람이 어찌나 확 달라졌던지 어린 딸도 알아차릴 정도였답니다. 딸이 알던 아빠는 집에 없거나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저속하고 술에 찌든 사람, 말투가 사납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던 아빠가 전과 다르게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모습이 다섯 살 난 어린아이의 눈에도 보였다는 것입니다. 딸아이는 학자를 인터뷰한 적도 없고 역사서를 분석한 적도 없고 고고학을 공부한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자기 아빠한테 미치고 계신 긍정적인 영향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답니다. 마침내 어느 날 딸아이가 자기 주일학교 교사와 엄마에게 차례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나님이 아빠한테 해주신 일을 나한테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딸아이는 다섯 살 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현재 앨리슨은 활기가 넘치는 그리스도인, 여러 권의 기독교 소설을 펴낸 작가, 기독교 아동 도서를 쓰는 신학교 졸업생의 아내, 그리고 내 소중한 두 손녀의 엄마, 아내과 지신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답니다. 아들 카일은 역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 학부에서 성경학을 공부한 뒤 종교철학과 신약성경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에서 신학박사를 했답니다. 아들의 인생 목표는 예수를 따라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꼭 이 가정이야기로 끝나겠습니까? 부활 증거의 사명자로 사는 우리 성도님과 저의 가정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부활을 증거하면 오늘 이 시대의 가정이 이렇게 변할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언젠가 한 번은 갑니다. 가장 가치있는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통해 부활의 증인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9.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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