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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욘4: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00 추천수:0 220.120.123.244
2019-04-28 13:53:50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

욘4:11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2019년 3월 9일 신문에 요나처럼 고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수중촬영 잠수부 레이너 쉼프(51)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15년간 펭귄, 물개, 돌고래, 상어 등 많은 해양동물을 촬영한 베테랑 감독인데 촬영하다 바다 한가운데서 솟구쳐오른 거대한 고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몸길이가 14 미터인 브라이드 고래가 레이너를 집어삼켜 모두 겁에 질렸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고래는 분기공으로 물을 뿜어내었고 레이너는 기적적으로 고래 몸 밖으로 나왔답니다. 불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살아난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이야기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어낸 이야기,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891년 2월 제임스 바틀리라는 사람도 요나처럼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살아났답니다. 포경선을 타고 고래 사냥을 나섰다 추락하여 집채만한 향유고래가 삼켰답니다. 남은 선원들이 고 고래를 잡아 해를 갈랐는데 위가 꿈틀거려 갈라보니 제임스가 살아 있었답니다. 무려 15시간을 고래 뱃속에서 살아있었답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묘비에는 '현대판 요나'라는 문구가 새겨놓았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이를 붙들고 몸을 물 위로 올려 걷게 하면 그 아이는 아버지가 손을 놓지 않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얼마든지 홍해도 가를 수 있고 태양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지금도 행하십니다. 과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같은데 지금도 불치의 병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고 죽었다 살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기적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기적은 사실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요나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해 주셨는지 마태복음 12장 38-41절까지 읽어 보세요.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메시아라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많은 증거가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인류의 구원자이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또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때 또다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4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고 진실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시길 원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10-11절을 다시 한번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성경에는 아낀다는 말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낀다는 말은 “하쓰다”를 번역한 말입니다. 원형은 “후쓰”인데 “덮다, 측은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라는 말입니다. 연약한 존재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여 죄를 덮어주고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지금 우리나라처럼 이스라엘이 남북이 분단될 때 북쪽 나라에서 여로보암 2세가 왕이 된 때 산 사람입니다. 이 왕은 악한 왕이었는데 빨리 죽지도 않고 40년을 통치하였습니다. 독재자였지만 주변 국가인 모압, 암몬, 에돔을 모두 정복하고 다윗 이후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이 때 중동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향해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프리카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어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요나서 1장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요나는 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합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지금 말하면 이라크에 있는 땅입니다. 지중해 넘어 스페인에 있는 반대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나 스스로 입을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지 보시기 바랍니다. 4장 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서 회개를 외치면 망해야 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 원수의 나라는 망해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잘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대상입니다. 자기가 도망가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망해야 자신에게 유익인 것니다. 그의 배타적인 선민의식과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집단의식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상황과 의식적 상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동색(草綠同色)이라는 고사성어나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처럼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립니다. 학연, 지연, 혈연 등 됨됨이나 형편이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게 되어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사정을 보아주며 편을 들어 줍니다. 사회학에선 이런 경향을 ‘호모필리(Homophlily)’라고 합니다. 사람이 이질성보다 유사성에 의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호모필리에 한번 빠지면 점점 더 깊이 빠져 ‘나선형 하향 국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8년 10월, 조직 분석학자 발디스 크레브스는 아마존닷컴에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연결 관계를 분석했답니다. 연구 결과 공화당의 정치적 사상들에 관한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민주당의 정치적 사상들에 관한 책을 구입한 사람들과 전혀 연결되지 않았답니다. 신문도 자신이 좋아하는 편집 경향을 가진 신문만 보는 것입니다. 한쪽 날개만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 편에서만 보니까 다른 쪽을 보지 못하고 편견과 고정 관념, 아집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우리나라 지역주의처럼 요나가 속한 공동체의 집단정신은 니느웨에 대한 미움과 증오입니다. 말투만 달라도 거부감을 갔고 비호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내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논리적, 과학적, 이성적, 합리적, 신앙적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개 논증(man-who argument)’의 늪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파 좌파로 나뉘어 아주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처신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 기적이라는 방법을 통해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게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3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루 동안 다니면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잘 나가는 최대 국가에서 40일 지나면 망한다고 미친사람처럼 외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다섯 마디입니다. 그것을 반복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무엇을 합니까?

4장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읍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성읍이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습니다. 그늘에 앉아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 지켜보는 것입니다. 북한이 망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처럼 앗수르가 망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폭삭 망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처럼 니느웨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의 심판이 임하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장 5절을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고 회개합니다. 악에서 떠납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부흥의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은 그때 일어난 일을 밝혀냈습니다. 기원전 763년 6월 13일, 마침 개기일식이 있어서 태양이 사라지는 현상이 생겼답니다. 이 발견은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후 앗수르가 잠시나마 정복전쟁을 하지 않고 달라졌답니다. 열왕기하 14장 25에 보면 여로보암 2세가 앗시리아와 싸워 하맛과 아라바까지 영토를 넓히는 내용이 나온데 그때 요나를 통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나가 돌아와 앗시리아 상태를 알렸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전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그 위대한 나라가 망한다고 미친 사람처럼 외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외침과 함께 갑자기 태양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자 당연히 공포를 느꼈을 테고 그로 인해 왕부터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며 금식해가며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시계를 돌리고 계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망해야 할 사람이 망하지 않자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합니까?

4장 1절을 보십시오. 싫어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떤 물건을 조각조각 내다. 갈기갈기 찢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슬픔이나 근심 시기심 등을 말합니다.

노하다는 말은 "불타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감정이 몹시 상하여 맹렬히 화를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나가 단순히 불만스럽게 느낀 정도가 아니라 극렬한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알아주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죽을 각오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4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잘되는 꼴 보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났겠다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당하게 대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재앙을 내려야 하는데 왜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느냐는 것입니다. 니느웨라는 도시는 어느 도시보다 화려하고 웅장했습니다. 나훔서 3:1에 보면 "사람을 죽인 피로 얼룩진 니느웨 도성은 멸망하고야 만다! 도성 전체가 온갖 거짓으로 가득 찼고 폭력과 불법이 온통 들어차 있다. 사람을 끌어다 죽이는 일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의 단적인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 살인과 불법으로 얼룩진 니느훼성,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이런 것입니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되지만 원수는 용서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회개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 배신자입니다. 도망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받아 주십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죄에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은 용서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려면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라고 말씀합니다. 성의 성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니느웨 성에 좌우를 분별치 못한 사람들이 12만 명이나 있고 가축도 많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 생명을 왜 아끼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요나는 무엇을 아낍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박넝쿨을 아낍니다.

하나님이 박넝쿨로 요나의 머리를 가리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땡볕에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크게 기뻐합니다.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어 햇볕이 내리쪼이자 요나는 어떻게 합니까? 죽는 것이 났겠다고 합니다. 왜 박넝쿨로 성내냐고 하니까 죽기까지 성내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감정에 치우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오직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논리학에 오류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형식적 오류론, 언어적 오류론, 자료적 오류론이 나옵니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부분과 전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아무리 악한 무리일지라도 그 가운데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북한에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있습니다. 특수적인 것을 일반화시키는 오류입니다. 목사 한 사람이 잘 못 하면 목사 전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라도 경상도 다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아담처럼 말씀을 잃고 감정의 노예가 되면 실패합니다. 불충분 통계의 오류(불충분 자료), 편향 통계의 오류(표본을 잘 못 선택)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생명을 아끼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을 왜 불렀습니까? 창세가 12장 3절을 보십시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땅까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아니라 온 인류의 하나님입니다. 아담은 유대인의 시조가 아닙니다. 온 인류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시조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은 곧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이스라엘만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수많은 잡족”들이 함께 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주적인 계획을 가지고 인류를 통치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사 생명을 구원하시길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 진리를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표적이 있지만, 대표적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할 것을 요나의 사건을 통해 이미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인 선장이 심판했는데 예수님은 이방인 총독이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요나의 제비뽑기는 당시 재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빌라도 법정과 유사하고, 요나가 바다에 던짐 받은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으며,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을 통해 폭풍이 잔잔해진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 세상에 평화와 구원이 임했습니다. 40일 동안 요나가 앗수르에서 기다리는 것처럼 예수님은 40일동안 부활하여 세상에 계셨습니다. 요나는 40일 후에 망한다고 했는데 앗수르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지만 회개하지 않는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였고 예수님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것을 전했지만 유다는 40년 후에 결국 로마 장군 디도에게 AD 70년에 망했습니다. 2장에 나오는 기도는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장을 모형처럼 보입니다. 깊음 속 바다에 던져진(3) 것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욕보임을 당한 모습이고, 주의 목적에 쫓겨나심(4),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심(5)은 무덤 속에 계신 예수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도(7)응답,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8)는 유대인 등은 금방 십자가를 연상하게 합니다. 2장 기도의 결론은 9절에 나온 것처럼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와 약속을 통해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과 역사를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요나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부터 구원의 완성까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예언해 주시고 이루시는데 요나를 통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 우리를 아끼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아껴 왜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렀습니까?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아낀다는 사실을 전하길 원합니다. 그 어떤 생명도 생명은 온 천하보다 고귀한 것입니다. 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했습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연간 150만 명이 낙태로 죽는다고 합니다. 인구비례로 보면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합니다. 반려동물의 학대는 처벌하면서 태아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생명권을 빼앗아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기술의 발전으로 생명이 더욱 경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생명도 생명은 생명입니다. 자살로 생명을 끊는 사람의 수가 하루에 40여명으로 세계적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멀쩡한 청년이 한줌도 않되는 말초적 쾌락을 위해 가냘픈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합니다. 삼십대의 가장이 죽으면 아푼도 가지고 가지 못할 돈 때문에 술 먹고 들어와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영원하지 않는 잠깐 있다 살아질 사랑의 욕정 때문에 애인과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동성 간에 결혼해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여자 사위, 남자 며느리를 왜 비난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딸만 설거지시키면 인권침해라고 신고방법을 교과서에서 알려준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장애인이라고, 피부가 다르다고, 가난하다고, 여성이라고, 열등하다고, 질병에 걸렸다고 생명이 경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누구에게 빌릴 수도 없는 유일하고 고유한 가치입니다. 대체 불가능한 것입니다. 생명은 상하의 귀천 없이 존귀한 것이며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 천국 백성이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하여 이 땅의 낙을 취하며 천국보다는 지옥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끼는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1904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구세군을 창설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복지혜택을 준 윌리엄 부드를 왕실로 초청해 격려했답니다. 왕은 격려 끝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때 그는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답니다. "국왕 폐하, 제가 바라는 것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저의 희망이요, 야망입니다. 그리고 최대의 기쁨입니다"

제가 2008년에 대만 선교지를 방문하였습니다. 해발 800 미터에서 사는 원주민 마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교회가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모두 돌로 되어 있고 강대상은 큰 나무뿌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 앞에 낯익은 글자가 있었습니다. 한글로 기념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셔서 23년 동안 선교한 한 선교사님을 기리는 기념패였습니다. 그분은 영어 교사를 하시다가 선교에 부름을 받고 대만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 원주민은 글이 없어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만들어 주고 그 언어로 신약 성경 전부를 번역하고 완성한 것입니다. 무려 23년 동안 그곳에서 선교하면서 그들의 글을 만들어 주고 신약성경을 완전히 그들의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선교사 한 분의 밀알이 떨어져 참으로 많은 열매를 맺히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생명을 사랑하는 복음 전하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사람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훈련시켰고, 유언의 말씀으로 생명을 구원하라고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아끼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아껴 생명 구원의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과 지역, 세계를 향해 생명 구원의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루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권리이고 의무입니다. 대상자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도 들이고, 물질도 드리고, 재능도 드려야 합니다. 사랑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문둥이가 된 성자>에 나오는 다미엔을 보십시오. 나병 환자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이 나병에 걸립니다. 그때 그들은 감동합니다. 온 섬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전투함입니다. 영적 생명을 살리는 곳입니다. 나의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요나같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0,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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