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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갈1:11-2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344 추천수:4 112.168.96.218
2018-01-21 08:44:49

 

새해,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

갈1:11-24

 

새해, 셋째 주일입니다. 새해가 되어 갈라디아서를 보면 새해의 다짐을 해 보고 있습니다. 첫 주일에는 첫 주일에는 <새해, 출발하며 가져야 할 직분의식(갈1:1-5)>으로 새해 세 가지를 붙들고 출발하자고 했습니다. “일은 소명의식으로, 사람에게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붙들고 올해 살자고 했습니다. 둘째 주일에는 <새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신앙의 핵심(갈1:6-10)>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복음이 아니라 바른 복음을 붙들고 어떤 다른 복음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마침내는 저주가 아니라 복된 삶을 살자고 했습니다. 오늘 세 번째 주일에는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 <새해, 은혜로 부름 받은 사람(갈1:11-24)>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로 회심하고, 은혜로 소명받고, 은혜로 영광돌리자>라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1. 은혜로 회심(11,12)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구원받는 회심은 은혜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허황된 꿈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2장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데 그 사실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할례를 행하여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게 나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지시고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율법과 로마의 법, 헬라 철학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진리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의 형벌을 받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속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나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받아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교 동년배보다 지나치게 유대교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 사람입니다. 지금 터키 출신입니다. 당시 지중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온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대학자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율법에 열정적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구원을 받고,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예수님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복음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것도,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거나 학습하거나 연구하여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시”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장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세 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잡아 올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았고 다메섹(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밝은 빛으로 보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신비체험을 한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적 실재’에 의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사울아,사울아, 왜 너는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가 “주님,당신은 누구십니까?”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신앙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로 생각하느냐에 대한 답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받은 사람들인데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갈라디아 교인 중에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직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고전 9:1에서는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고전 15장 5-1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의도해서 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외적 객관적으로 바울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믿어졌다는 것입니까?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택정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고전 15장 8-11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은 은혜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고 믿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알려 주어야 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은혜를 받으면 이성과 과학과 경험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비늘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마담 귀용이나 존 웨슬리나 어거스틴처럼 회심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를 써서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의 회심 부모 덕분에 그는 17세에 카르타고로 유학을 떠나 수사학 공부했고 거기서 키케로와 같은 라틴어 학자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조금 배우니까 어머니 모니카가 전해준 기독교를 과감히 버렸습니다.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깊이가 없고 무식한 사람들의 수준 낮은 사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답니다. 타락하여 십대에 흑인 노예를 첩으로 취해 불우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병적인 성욕에 불타서 심각한 타락의 길을 걸었지만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했답니다. 평안을 얻기 위해 마니교를 기웃거렸는데 387년 어느 날 밀라노의 어떤 정원에 앉아서 묵상하고 있을 때, 그의 귀에 ‘취하여 읽으라, 취하여 읽으라’는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놓여있는 책을 취해 읽었답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 13:13-14절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주 예수로 옷 입으라’는 말씀을 읽는 중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고 과거에 있었던 부끄러운 삶이 기억나 눈물로 회개했답니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어린 아이들의 복음송을 통해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를 전격적으로 회심시킨 것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있다면 올해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말씀 듣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합니다.

강남 성모병원에서 말기 암환자들 돌보았던 이경식 박사는 미국에서 10 여 년간 말기 암환자들을 진료하면서 현대 의학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암환자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심한 좌절감과 낭패감에 사로잡혔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명을 받아서 미국생활을 마무리하기 전에 예배에 참석했답니다. 거기에서 말씀을 들으며 죽음은 부활에 이르는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깨달고 믿게 되었습니다. 설교 중에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답니다. 갑자기 하늘 위에 있는 불덩이가 보였답니다. 그 자리에 쓰러졌고 주위 사람들이 부축하여 의자에 앉히자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고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신의 눈앞에 찬란한 빛이 비쳐왔고 자신도 모르게 ‘아, 빛이 보인 다.’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초등학문의 노예가 되어 있고, 죽음과 죄의 속박에 매여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전통과 유전의 노예가 되어 있다면 은혜로 부활을 믿고 새로운 삶으로 출발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올해 전도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은혜로 회심하여 천국 백성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은혜로 소명(13-20)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렀다는 것입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던진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주님 누구십니까?(행22:8)”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22:10)”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를 통해 눈을 뜨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하나님의 은혜로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세움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은혜로 나를 불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이방인이게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전하는 것은 은혜로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것은 은혜라는 말이 아니면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교회를 심히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조상의 전통에 더욱 열심이었던 자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했고, 반기독교, 비기독교인 정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선봉에 서서 신앙인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15,16절에 나온 것처럼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은혜로 그 아들을 전하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소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혈육과도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소명이 가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사도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신 이가 그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알기 전 은총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그를 불렀습니다. 이 길은 바울에게 있어서 환영받는 길이 아닙니다. 험한 길입니다.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핍박과 고난이 있는 길입니다. 갈라디아 일부 교인들이 인정하지 않았듯이 인정받지 못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주신 소명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올 한 해 은혜로 주어진 소명의 길을 바울처럼 어떤 역경과 반대와 고난이 있더라고 걸어가야 합니다.

“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길을 가리 이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지고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길은 고난의 길 이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가지고 가신 길”

아버지의 길, 어머니의 길, 사장의 길, 부장의 길, 목사의 길, 장로의 길, 권사의 길, 집사의 길 은혜로 주신 소명임을 알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지난 1월 17일자 국민일보를 보니가 서울대 출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장철호 선교사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198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91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고 합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개원을 하고 신앙을 가진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중동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단기 의료선교도 다녔답니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 의료 선교를 갔는데 무슬림 여인이 울고 있는 어린 자녀를 그에게 데려왔답니다. 진찰했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잘 먹지 못해 배가 고파서 우는 거였답니다. 사실을 얘기해 주었더니 어머니는 주머니에 하나 있는 비스킷을 물에 개서 먹였답니다. 아이는 양에 차지 않아 계속 울었답니다. 그 때 '내가 대체 누구를 위해 이곳에 와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마음에 강한 울림이 와서 귀국 후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기도 끝에 그는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은혜로 소명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 기쁨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익이 없어도, 불편해도, 고통스럽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동행하며 짐을 나누어지기 위해 부와 명예의 길을 다 내려놓고 중국 단둥(丹東)과 미얀마에 가서 400여명의 구순구개열 무료수술을 해 주었답니다. 중증 화상, 선천성 심장병, 항문 폐쇄 등 현지에서 수술이 어려운 환자는 한국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초청수술을 주선해 주었답니다. 올 한 해 어떤 일을 하던 하나님의 은혜로 소명의식을 가지고 전진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은혜로 영광을(22-24)

바울이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은혜로 소명의식으로 복음을 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러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바울의 얼굴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은 퍼진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멸하려고 했던 부활의 복음을 지금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절 한 목소리로 크게 읽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바울은 자신의 맡겨준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열심을 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은 은혜로 말하고(롬12:3), 은혜로 말씀을 기록하고(롬15:15), 은혜로 감사하고(고전1:4), 은혜로 위로하며, 은혜 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은혜로 사역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 인생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애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 떨어지면 천사도 악마로 변합니다. 은혜 떨어지면 성자도 사기꾼으로 변합니다. 은혜 떨어지면 대단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 달란트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20세기 지성인이라는 버트란트 러셀은 "왜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할머니는 독실한 청교도였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 안에서 자랐습니다. 7살 때 라틴어를 끝내고 헬라어에 능통하여 성경을 원문으로 거침없이 읽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뛰어난 그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하루에 보통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교육· 역사· 정치학· 논쟁술에 이르기 까지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하였습니다. 1950년 노벨 문학상도 받은 사람입니다. 캠브리지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11살 때 이미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 교회 생활을 잘 하다가도 대학을 들어가 조금 배우게 되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말은 배타적이고 편협한 사고라고 말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하다면서 세상에 고통을 허락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과 고통을 끝장내 줄 만큼 선하지 않거나 악을 제거할 만큼 힘이 없는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오랏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보면 불신자보다 더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훨씬 친절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러셀이나 니체,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같은 진화를 믿는 사람의 책을 읽으며 신앙은 쓸모없는 것이고 기독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라고 말하며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무엇인가 주어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은혜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러셀은 그의 책에서 "불교·힌두교· 기독교·회교·공산주의 등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진실이 아닐 뿐 아니라 해로운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진보에 종교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조금 지식을 가지게 되니까 윤리적인 삶,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회발전에 종교는 언제나 해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종교는 재혼을 금하거나 무조건적인 산아제한을 반대하는 비윤리적인 교리로 사람을 옭아맨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4명의 아내를 맞이한 사람이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그는 기독교인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과 불멸을 믿는 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가장 지혜롭게 믿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부터가 잘 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안을 때는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순교를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때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러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러셀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좋은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팡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성적 신앙을 증거한 파스칼을 보십시오. 파스칼은 수학자요, 물리학자 • 철학자 • 문인으로 천재의 명성을 누린 사람입니다. 파스칼도 서른에 접어들면서 한편으로는 신앙에 대한 불가지론으로, 또 한편으로는 세속에 대한 환멸로 영적 시련을 겪었답니다. 그러다가 31세가 되던 1654년 11월 23일 한밤중에 은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직 한 분 참 하나님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죽음의 순간까지 복음을 증거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터넷 유튜브에서 볼 수 있으니까 꼭 시간 내어 보시길 바랍니다. 리 스트로벨가 쓴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그는 예일대 법대 출신의 명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냉소적 회의론자였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믿었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막연히 희망이나 얻어 보려고 신과 천국을 지어냈다고 생각했답니다. 신앙은 굳이 기간들여 알아볼 가치조차 없는 말짱 허튼 소리였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설이거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제자들이 다 짜고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자로서 최대의 쾌락을 얻는데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고 자연스럽게 몹시 부도덕하고 술에 찌는 삶이 연속되었답니다. 자아도취에 빠졌고 설명하지 못하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고 아내와 싸우고 홧김에 발길질 하여 거실 벽이 구멍이 뚫릴 정도였답니다. 아내와 어린 딸은 눈물을 흘렸고 어린 딸은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오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숨었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변화된 아내를 보고 교회에 함께 가자고 해서 따라갔답니다. 그는 그날 신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전공인 언론학과 법학적 지식과 기자 정신으로 21개월 간 추적한 2,200여 편의 자료에서 그는 부활은 가능성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 속에 그 어느 누군가에게 여덟 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만조분의 1이다.”라고 합니다. 이 확률은 미국 텍사스 주(한반도의 세배 넓이) 전체를 은화 동전으로 덮는데, 그냥 덮는 것이 아니라 동전을 60cm 높이로 쌓아 덮고, 그 중에서 미리 표시한 단 한 개의 동전을 단 한 번에 정확하게 집어낼 확률이라고 합니다. 수학자 피터 스토너는 어떤 한 사람에게 총 48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조의 13승분의 1(1/1조¹³)이라는 거의 측정 불가능한 통계 수치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구약성경에 약 300개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들은 단 한 가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재림 예언만 제외하고 모두 2000년 전 다윗의 동네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승천하셨으며, 언젠가 이 세상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는 <부활의 증거 : 5가지 부활의 증거와 확신>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뒤바꾸는 최고의 핵심적 사건이 될 것이며, 만약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법률을 가르치는 교수로 여러 기록 문서의 증언을 철저히 검토하고, 빈 무덤이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결론은 부활이 사실이다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천재이며 캠브리지의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인 'C.S 루이스'는 기독교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마다 연구를 하다가 자기가 가장 협오했던 복음서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과 그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 스트로벨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에 대한 증언과 증거의 수량은 압도적으로 많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을 목격한 증인들을 한 사람씩 법정에 세우고서 각 사람마다 15분씩 시간을 들여 반대 심문을 한다고 해보자. 쉬지 않고 종일토록 심문하면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금요일 저녁 때까지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연이어 129시간 동안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후에도 믿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심많은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땅의 삶은 잠깐 있다 가는 것입니다. 올 해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시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흔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야 합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져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하던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들이 벌어져야 합니다. 자녀를 통해, 사업을 통해, 교회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들이 벌어져야 합니다.

셋째 주일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오늘 말씀이 내 게 주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올 한 해 <은혜로 회심하고, 은혜로 소명받고, 은혜로 영광돌리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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