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5) 이 땅에 안주하려는 마음에 들려온 음성
요한복음14:1-6(
16세기에 성자라고 불리우는 필립 디 네리(Philip de Neri)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네리가 당시의 최고의 대학이었던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는 동안에 어떤 청년을 만났답니다. 그 청년의 말인즉 자기는 유명한 그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답니다. 네리는 그 청년에게 묻기를 "대학 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했더니 청년의 대답인즉 "박사의 학위를 얻겠다"고 했답니다. 네리는 계속 질문하길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무엇을 하겠는가?"했더니 청년은 답변하기를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처리 해서 뭇 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다고 "했답니다. 네리는 다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그 후에는 상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돈을 많이 벌고 드디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답니다. 네리는 계속해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고 했답니다. 청년은 답변하기를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하게 살 것이라"했답니다.
네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떻게 되지?“
그러자 청년이 대답하기를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라고 했답니다. 네리는 한 번 더 물어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는지 몰라하는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로 가 버렸답니다. <그다음에는 또 어떻게(윤영준 저)>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봄날을 기다립니다.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가 안정되고, 직장이 든든해지고, 재정이 조금씩 풀리고, 관계가 평안해지고, 마음에 숨 쉴 공간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런 날이 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제 됐다.” “이 정도면 괜찮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안정되면 좋겠다.” “이 평안이 오래 오래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던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곧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왕으로 등극하면 그들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생활을 끝내고, 더 이상 굶주림이나 전쟁의 위협이 없는 '가장 강력하고 부강한 지상 낙원'에 닻을 내리고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나 세리 출신이었던 그들은, 이제 곧 개국 공신으로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같은 최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움켜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치열한 삶의 바닥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호의호식하는 기득권층의 삶으로 완벽하게 신분 상승을 이루어 안주하려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 전, 배와 그물과 심지어 가족마저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 모든 포기와 헌신을 일종의 '확실한 투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그들에게 '투자금 회수의 날'이자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제 3년간의 고달픈 떠돌이 생활(순례길)을 끝내고, 예루살렘의 번듯한 궁전이나 대저택에 입성하여 안락하고 배부른 노후를 보장받으며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안주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순례자의 삶, 나그네의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안주해야 할 곳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봄날에 이 땅에서 안주하지 않고 분명한 목적과 재미, 가치, 의미를 갖은 순례자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이 땅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인생의 끝날 후'를 보아야 합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가 이 땅에 집착하고 안주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죽음'면 끝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근심은 헬라어 원어는 ‘타랏소’입니다. 이 단어는 내일 날씨를 걱정하거나 가벼운 염려를 뜻하는 일상적인 단어(예: 메림나)가 아닙니다. 본래 이 단어는 잔잔한 물에 큰 돌이 떨어져 흙탕물이 되거나, 폭풍우가 몰아쳐서 바다가 '거칠게 휘저어지고', '맹렬하게 요동치는' 물리적 상태를 묘사할 때 쓰였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5장 7절에서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천사에 의해 '움직일 때' 이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인간의 마음에 적용될 때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극심한 공포, 혼란, 절망, 슬픔이 뒤섞여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내면의 격동'을 뜻합니다. 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이런 상태에 빠졌을까요?
앞선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떠남)', '가룟 유다의 배신', '수제자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라는 충격적인 폭탄선언을 연달아 하셨습니다. 3년 동안 이 땅의 성공(메시아 왕국)에 모든 닻을 내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닻이 끊어지는 재앙이었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바로 그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영원(사후세계)을 부정하고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닫힌 세계관, 즉 철저한 유물론과 세속주의에 갇힌 사람들의 삶은 겉보기에는 합리적이고 세련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즉 내면적 동기와 삶의 방식은 4가지 뚜렷한 특징과 치명적인 한계를 갖게 됩니다.
첫째,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지상 낙원'을 세우려는 끝없는 소유에 집착합니다(물질주의). 이 땅의 삶으로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든 완벽한 보상을 받아내야만 합니다. 이들에게 통장의 잔고, 부동산, 사회적 지위는 단순한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과 평안의 대체재'가 됩니다. 내세의 상급이 없으므로, 살아있는 동안 무조건 남들보다 더 많이 움켜쥐어야 합니다. 늘 "조금만 더"를 외치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곳간을 허물고 더 크게 짓는 데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그것이 이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줄 것이라 착각합니다.
둘째, 이들은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라고 합니다(쾌락주의와 고통 회피)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나오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말씀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의 가장 논리적인 삶의 결론입니다. 죽음 이후의 심판이나 영원한 가치가 없다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됩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의 고난, 자기 부인, 좁은 문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이나 인내에 큰 가치를 두지 않으며, 당장 내 육신을 즐겁게 하는 자극적인 경험(여행, 미식, 소비 등)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쾌락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금세 지루해지므로, 이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아 헤매는 쾌락 중독 상태에 빠집니다.
셋째, 이들은 '소멸'에 대한 병적인 공포와 조급함을 가집니다.
이 땅이 전부인 사람에게 '죽음'은 그저 자아가 완전히 삭제되는 끔찍한 종말이자 가장 비참한 패배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나이가 드는 것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 본능적이고 깊은 공포를 안고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삶을 삽니다. 이들은 노화를 막고 수명을 연장하는 육체의 건강과 웰빙에 강박적으로 매달립니다. 또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극도로 아까워하며, 죽기 전에 모든 버킷리스트를 다 해보아야 한다는 지독한 조급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죽음은 수용할 수 없는 '절망의 벽'일 뿐입니다.
넷째, 절대 기준이 없는 철저한 '자기중심성'으로 살아갑니다(도덕적 상대주의)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없다면,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도 사라집니다. 사사기의 시대처럼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집니다. 이들의 삶에서 재판관은 '나 자신'이며, 최고 법률은 '나의 행복'입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혹은 법망만 피할 수 있다면 적당한 편법과 이기적인 행동은 오히려 지혜로운 생존술로 여겨집니다.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시기하거나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는 지옥 같은 내면을 갖게 됩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핏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죽음의 공포, 소유의 결핍, 쾌락의 갈증, 자기 중심성'이라는 4 명의 폭군에게 평생을 끌려다니는 노예와 같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말합니다. "뇌가 멈추면 다 끝이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인 메인보드나 모니터가 부서지면 프로그램이 날아가는 것처럼, 육체가 죽으면 마음도, 영혼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물질주의적 일원론에 빠지면, 인생의 끝날 후는 '무(無)'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서 최대한 즐기고 안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그러나 컴퓨터와 게이머 비유로 생각해 보세요. 친구와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친구의 컴퓨터가 갑자기 고장 났어요. 친구는 게임에서 사라졌죠. 그러면 친구가 세상에서 사라진 건가요? 아니죠! 친구는 여전히 자기 방에 있어요. 단지 컴퓨터라는 연결 도구가 망가졌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뇌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뇌는 영혼이 이 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입니다. 도구가 망가져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적 인간관은 인간이 흙(물질적 육체)과 하나님의 호흡(비물질적 영혼)으로 결합된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뇌는 이 땅에서 영혼이 외부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하드웨어)'일 뿐, 영혼과 자아를 발생시키는 '근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음의 통제권을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빼앗겨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명령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방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동을 당장 멈추라"는 뜻입니다. 너희 존재의 중심을 흔들리는 '상황'이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내어주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진리(믿음)로 마음의 통제권을 되찾으라는 뜻입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난은 닥쳐오겠지만, 그 상황이 너희의 영혼 중심까지 파괴하도록 허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요동침을 잠재울 유일한 길은, 너희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듯, 나 예수 역시 하나님과 동등한 구원자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허무함(근심)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독제는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뿐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육체와 영혼의 본질적 구별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드웨어가 부서져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부서졌다고 해서 중앙 서버나 클라우드에 저장된 데이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생명(Bios)과 영원한 생명(Zoe)을 엄격히 구분하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죽여 뇌의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세상의 물리적 힘이 결코 인간의 본질인 '영혼'을 건드릴 수는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둘째,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의식, 감정, 기억이 매우 선명하게 유지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아와 기억의 연속성에 대하여 뇌의 해마(기억 장치)가 썩으면 과거의 기억과 '나'라는 인식이 사라진다고 주장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의식, 감정, 기억이 매우 선명하게 유지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에 간 부자는 육체가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느끼며, 땅에 남겨진 다섯 형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슬퍼합니다. 뇌라는 물질이 없어도 자아의 연속성은 온전히 유지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누가복음 16:25)
셋째, 예수님은 인간을 진정으로 살게 하고 의식을 부여하는 근원은 물질적인 '육'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생명과 의식의 진짜 근원을 이 땅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의식은 물질(고기)의 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물학적 고깃덩어리(뇌)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물질(단백질 덩어리)이 어떻게 고차원적인 도덕성, 영성, 사랑과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습니까? 물이 스스로 끓을 수 없듯, 물질은 스스로 생명과 의식을 낳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진정으로 살게 하고 의식을 부여하는 근원은 물질적인 '육'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3)
넷째, 예수님은 영혼을 임시 상태로 두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날에 결코 썩지 않고 고장 나지 않는 새롭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새로운 하드웨어)'을 입혀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죽음은 영원한 끝이자 완전한 종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가 수명을 다해 부서지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임시 상태로 두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날에 결코 썩지 않고 고장 나지 않는 새롭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새로운 하드웨어)'을 입혀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뇌가 멈추면 다 끝이다"라는 주장은 인간을 짐승이나 기계와 다를 바 없는 '단순한 물질'로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뇌(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사람의 본질인 '영혼'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그 자아와 의식을 유지하며 심판이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로 넘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군인들이 확인했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봤어요(고린도전서 15:6). 만약 죽으면 정말 끝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여기서 "첫 열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과나무에 첫 사과가 열렸다는 건 곧 다른 사과들도 열린다는 뜻이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거라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시선을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그날 이후'로 넓혀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9-20절에서는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80년, 100년이면 끝이 나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을 살아갑니다. 이 짧은 임시 텐트의 삶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투자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이 땅에 완벽하게 안주했던 부자는 인생의 끝날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파산자였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끝날 후, 창조주의 심판대 앞을 직면하십시오. 그 엄위하신 현실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의 헛된 안주의 유혹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2. 이 땅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천국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인생의 끝날 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곳에 확실한 영광의 처소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죽음 앞에서 폭풍처럼 요동치는 제자들의 마음에 왜 그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근심의 원인은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신다(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떠남은 너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를 영원히 머물게 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구원 사역이다'라고 역설하십니다. 죽음 후에 영원히 머무는 "내 아버지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으로 번역된 '오이키아'는 단순히 벽돌로 지어진 물리적인 건축물을 의미하기보다,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친밀한 가정(Household)'을 뜻합니다. '거할 곳'으로 번역된 '모나이'는 잠시 머무는 텐트나 여관이 아니라 '영원히 훼손되지 않고 머무는 영구적인 처소'를 의미합니다. 천국을 말합니다. '영구적인 처소(모나이)'는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 '충분히(많도다)'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앞으로 걸어가는 십자가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 사역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리고 이 땅에서의 계획이 무너진다고 해서 마음을 폭풍우처럼 요동치게 내버려 두지 말라. 오직 하나님과 나를 굳게 믿으라. (1절)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떠나 십자가로 향하는 이 길은 너희를 버리는 실패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앞서가서 십자가의 피로 죄의 장애물을 치우고, 너희가 임시 장막 같은 이 땅을 떠나 '가장 안전한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연합하여 머물 수 있는 영구적인 처소'를 마련하는 가장 위대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2절)" 예수님은 십자가의 참된 목적과 천국의 실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천국을 비웃습니다. "천국은 현실의 고통이 무서워서 만들어 낸 심리적 위안이야. 빛을 봤다는 임사체험도 그저 산소가 부족해진 뇌의 환각일 뿐이지. 사진이나 증거를 대봐." 그들은 천국을 인간의 결핍이 투사된 한낱 동화책처럼 취급합니다.
천국을 부정하는 자들은 "천국 봤어? 사진 있어? 증거가 있어야 믿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랑 비유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님들 자녀를 사랑하시죠? 그 사랑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나요? 저울에 잴 수 있나요? 사랑이 몇 그램인지 측정할 수 있나요? 못 하죠.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건가요? 절대 아니에요! 세상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랑, 우정, 정의, 아름다움, 양심, 수학 공식… 이런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진짜로 존재합니다. 볼 수 있어야 믿는다는 것은 철저히 경험주의적이고 물질적인 인식론(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만 진리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이성과 감각만으로는 영적인 실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물리적 세계를 뛰어넘는 창조주의 영역을 한낱 피조물의 감각 기관(시각, 촉각 등)이나 과학 기계로 증명하라는 것 자체가 범주를 착각한 요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도 이와 똑같이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하던 사람들에게 매우 단호하고 명확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더 차원이 높은 복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믿음은 증거가 없어서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눈이 열려 '물리적 시각'을 초월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29)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십시오. 증거가 없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서 내 형제들에게 가면 그들이 믿을 것"이라며 확실한 기적(증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완악해서(죄성)'입니다. 이미 주어진 가장 확실한 증거인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거부하는 자는, 천국 사진을 보여주거나 기적을 보여주어도 결국 다른 핑계를 대며 조작이라고 치부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성경 말씀)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천국이 있다는 기적이나 표적을 보여라."라고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악한 세대의 특징으로 규정하십니다. 기독교는 증거 없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역사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인 '요나의 표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3일 만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천국과 영생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하고 충분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12:39)
천국을 부정하는 자들은 "망원경으로 우주를 다 뒤져봐도 천국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3차원의 우주 공간 어딘가에 숨겨진 물리적 행성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영적 실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빛을 볼 수 없듯, 영적으로 죽어 있는 무신론자의 눈에는 천국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증거가 없어서 못 믿겠다"는 주장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의 문제는 증거의 부재가 아니라, 영적인 맹인 상태와 완악한 마음이다"라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 말씀'과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충분하고 확실한 증거를 주셨으며, 성령의 은혜로 마음의 눈이 열린 자만이 그 압도적인 증거를 보고 천국을 소망하게 됩니다.
천국을 부정하는 자들은 천국은 "사람이 원해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는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죽기 무서우니까, 위로받고 싶으니까 천국이라는 걸 상상해서 만들어 낸 거야. 그냥 어른들이 보는 동화책 같은 거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채워주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을 인간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천국은 인간이 현실에서 채우지 못한 쾌락과 욕망을 사후에 보상받으려고 만든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상상으로 만든 타 종교의 낙원(예: 이슬람의 잔나,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은 넘치는 음식, 성적 쾌락, 재물 등 철저히 인간의 '육신적 욕망'을 채워주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그런 세속적 욕망이 연장되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의 물리적 관계와 욕망이 종결되고, 온전히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결코 이런 '거룩함'을 스스로의 위안거리로 상상해 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30)
천국을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천국은 현실의 고통을 잊고 마음 편하게 믿기만 하면 갈 수 있는 도피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가 사람들을 모으고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라면, 누구나 들어가기 쉽고 편안한 길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철저한 '자기 부인'과 세상의 미움을 받는 고난의 길, 즉 '좁은 문'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아를 죽여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위안거리로 발명해 냈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천국은 천국은 내 소원과 내 뜻이 다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이 발명한 신(우상)은 철저히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판기'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자신이 왕이 되어 통치하고 싶어 하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나라를 스스로 상상하여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천국은 인간의 상상력(세상)에서 기원한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을 인간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국은 이 땅의 통치 체제나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본떠서 만든 가공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의 물리적, 정치적, 심리적 기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세상의 원리로 작동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실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천국은 인간이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만들어낸 동화"라는 주장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은 결코 이토록 철저히 자아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거룩한 나라를 스스로 상상해 낼 수 없다"고 논박합니다. 성경의 천국은 인간의 결핍이 투사된 거짓 위안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통치의 실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고작 유한한 인간이 심리적 도피를 위해 상상해 낸 가상의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만들어 낸 곳이라면, 이 땅의 쾌락과 세속적 욕망이 무한히 주어지는 곳으로 묘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천국을 가리켜 "내 아버지의 집(엔 테 오이키아 투 파트로스 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이기심이 채워지는 곳이 아니라, 거룩하신 창조주를 온전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역동적인 교제를 누리는 완벽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곳에 "거할 곳(모나이)"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잠시 머무는 정거장이 아니라, 영원히 훼손되지 않는 '영구적인 처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떠나시는 것은 제자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처를 예비하시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진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우리도 영원히 연합하여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듯,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이 영광스러운 실재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합니다. 뇌의 환각이나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보증하신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이 압도적인 천국의 실재를 가슴에 품을 때, 우리는 썩어질 세상의 유혹을 미련 없이 털어낼 수 있습니다.
3. 이 땅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천국 가는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사모한다 할지라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면 도마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5절에서 도마는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지극히 현대인과 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지도상의 경로, GPS 좌표, 철학적인 방법론을 요구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종교들은 저마다 하늘로 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고행을 통해, 선행을 통해, 도덕적 깨달음을 통해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늘에 닿으려 했던 바벨탑의 결말은 무너짐뿐이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반문 앞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아닙니다. "내(I AM)가 바로 그 길(The Way)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구원은 어떤 공식을 깨닫거나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유일한 길이요 참된 진리이시며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말씀 앞에는 어떠한 타협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대단한 학식과 재물을 쌓아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다리를 통과하지 않고는 단 한 사람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절벽에서 떨어지는 우리를 향해 던져진 유일한 구명조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얻은 것들로 구원의 길을 포장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만 그 영광스러운 거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봄날,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야. 뇌가 죽으면 끝이니까, 이 땅에 견고한 성을 짓고 마음껏 안주해." 그러나 우리는 보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의 나무도 언젠가 시들고, 아무리 정교한 컴퓨터도 결국 고장 나듯, 이 땅의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폭풍우처럼 요동치려 할 때,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우리는 이 세상에 닻을 내리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끝날 너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친히 닦아 놓으신 영원한 아버지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안락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흔들리는 상황에 존재의 중심을 내어주지 마십시오.
천국을 향한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머물 자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자신의 젊음과 건강을 다 바쳐 헌신했던 '헨리 모리슨(Henry C. Morrison)'이라는 노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은퇴할 나이가 되어 병든 몸을 이끌고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했는데, 항구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습니다. 군악대가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고,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수많은 취재진과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속으로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아, 교단에서 내가 4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고 이렇게 성대하게 환영식을 준비했구나.'
그런데 그 환영 인파는 선교사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아프리카로 길게 사냥 여행을 다녀오던 미국의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항구의 모든 환호와 영광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레드카펫을 밟고 지나간 후, 인파는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항구에는 낡은 트렁크 가방 하나를 든 늙고 병든 선교사님만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환영하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거리를 혼자 걸어가며 허름한 숙소를 향하는데, 선교사님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섭섭함과 원망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저 사람은 자기 취미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짐승 몇 마리 사냥하고 왔을 뿐인데 저렇게 대단한 환영을 받습니다. 저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청춘과 생명을 다 바쳤는데, 저를 반겨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군요. 제 인생은 철저히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그때, 성령님께서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세미하고도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 아들아,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참된 고향인 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는 날, 세상의 어떤 왕과 대통령이 받은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내가 천군 천사들과 함께 친히 마중 나가 너를 환영해 주마."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노선교사님의 눈에서 원망의 눈물이 마르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이 땅은 제 고향이 아니지요. 제 진짜 고향은 주님이 계신 그곳입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이 땅의 보상에 안주하거나 섭섭해하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마쳤다고 합니다.
인생의 봄날을 지날 때나 혹은 캄캄한 겨울을 지날 때, 이 땅에서 우리가 원하는 보상과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섭섭해하거나 무너지지 마십시오. 반대로 이 땅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이곳이 내 집이오" 하고 닻을 내리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아직 고향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뇌가 멈추고 심장이 멎는 그 인생의 끝날, 우리 주님께서 친히 나오셔서 우리를 끌어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천국,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이 땅에서의 남은 순례의 길을 끝까지 승리하며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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