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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3) 효율의 계산에 들려온 음성(요한복음6:7-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584 추천수:1 218.147.218.173
2026-05-03 13:04:21

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3) 효율의 계산에 들려온 음성

요한복음6:7-9

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3) 효율의 계산에 들려온 음성

요한복음6:7-9

 

목요일 소망 마을 어르신들과 꽃박람회를 갔다 왔습니다. 8할은 노인이고 그중 9할은 여성이었습니다. 한 권사님이 늙어서 슬프다고 했습니다. 또 한 성도님은 젊은 사람들은 모두 다 예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목요일과 금요일에 걸쳐 오늘 봄날은 가도 봄은 다시 돌아옵니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꽃구경 가는 길에

한 어르신이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 늙어 봄도 슬프다고

 

그 말을 듣던

더 나이 드신 어르신은

젊은 사람은 다 꽃 같다고 합니다

 

축제장에는

꽃보다 천천히 걷는 이들이 많고

흰 머리들이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그중에는

곱게 차려입은 여자 어르신들이

지는 꽃 앞에 오래 서 있습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꾸며 놓은 꽃 앞에서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누군가 함께 찍자고 하면

어르신들은 손사래를 칩니다

늙은 얼굴로 꽃 옆에 서기 싫다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걸음은 지는 꽃보다 더 천천하고

눈빛은 한철 햇살보다 깊은데

 

바쁜 일도 없다 하면서

듬성듬성 꽃을 보며

모두 앞만 보고 천천히 걸어갑니다

 

아마도 마음속에는

지나가 버린 봄날들이 있어

오늘의 꽃마저 서럽게 보이겠지만

 

봄날은 가도

뿌리 밑의 봄은 지지 않으니

영원한 봄은 다시 돌아옵니다

 

나이 들면 인생의 봄날은 지났다고 슬퍼하고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아직 진짜 봄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는 날 진짜 봄날이 우리에게 옵니다.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좋은 곳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완전히 함께하시는 나라, 눈물과 죽음과 불안, 질병과 고통이 끝나는 상태, 깨어진 인간 존재가 온전히 회복되는 세계입니다. 계속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능력도 증명해야 하고, 외모도 증명해야 하고, 경제력도 증명해야 하고, 심지어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까지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고, 성공해도 불안이 끝나지 않습니다. 얻어도 잃을까 두렵고, 올라가도 떨어질까 불안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가 성과로 평가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로 완전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더 이상 불안 때문에 자신을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더 이상 상실과 죽음이 관계를 끊어 놓지 못하는 곳입니다. 더 이상 억울함이 없고 불의가 판을 치지 못합니다. 더 이상 외로움이 사람을 잠식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더 이상 죄와 두려움이 인간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계셔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천국은 죽은 뒤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뒤에 천국에 들어갈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떻게 이 땅에서 인생의 봄날을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만 말한다면

 

첫째,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살아야 합니다.

노인이 되어 슬프다고 살 것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 더 재미가 있다고 의지적으로 기뻐하고 살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바울은 노년에 감옥에 있으면서도 빌립보서 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기쁨은 상황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으로 선택적 감정이 아니라 영적 명령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의 재미는 금방 휘발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 삶에 결코 마르지 않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도서 312~ 13)

거창한 성취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밥을 먹고 일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선물'이자 건강한 재미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예배드릴 때도, 찬양할 때도, 봉사할 때도, 아이를 양육할 때도, 부부 생활을 할 때도, 직장에서 일할 때도 의지적으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다가 기쁨만 있는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늙었다고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늙어도 삶은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사랑하며 살았던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의미는 허무를 극복하게 하는 소명과 목적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내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느낍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크고 영원한 목적과 연결될 때, 허무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밥을 먹는 일, 직장에서 일하는 일 등 지극히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이 부여될 때, 가장 숭고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늙었다고 의미를 상실하고 무의미하게 매일매일 인생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지난주에 설교를 들었지만 갈렙을 보십시오. 85세가 되었는데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칩니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거나 노화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험난한 아낙 자손의 거주지를 자신의 마지막 사명지로 선택하며, 노년을 '새로운 도전의 계절'로 만들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80세에 시작된 인생의 진짜 무대가 얼마나 의미 있는 삶입니까? 모세오경을 기록하였습니다. 노년은 인생이라는 원고의 마침표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황금기입니다. 예술의 봄날을 76세에 시작한, '모제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평생 농장에서 일하며 자녀들을 키운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관절염으로 더 이상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되자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이에 배워서 어디에 쓰겠나"라는 효율의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그저 붓을 드는 기쁨에 집중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76세에 처음 붓을 들고 101세까지 활동하며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늙어감은 성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털어버리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평생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투자 대비 효율(가성비)'을 따지며 가치를 매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썩어질 세상의 소유나 명예를 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보화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선언합니다.

바울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8)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졌던 세상의 최고 스펙과 기득권마저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마지막까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사명을 붙들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20~ 21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땅에서 사라질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노년은 진정한 가치에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나를 위해 쌓은 것보다 주님 나라에 가져갈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마태복음 1344절에서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소유하려 한다는 '가치 추구'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사라질 것에 투자하는 가성비 인생이 아니라, 하늘 보화에 투자하는 가치 중심의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고도로 산업화되고 정보화된 세상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효율성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현대인들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넘어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따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 계산기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금요 기도 2시간씩 하는데 시성비가 있나?” “대심방 받으면 가성비가 있나?” “헌금하면 가성비가 있나?” “교회에서 봉사하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나?” “아이가 어린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배를 드리면 무슨 이익이 있나?” 머릿속에 효율성 자동 계산기를 넣고 계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6장의 들판에도 아주 성능 좋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봄날,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야 할 청춘의 시기에 '소유의 함정''완벽함의 환상'에 빠진 자들을 부르셨듯, 오늘은 '효율의 계산'에 갇혀버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1. 예수님은 우리가 봄날을 살기 위해 빌립처럼 '정확한 데이터'가 낳은 합리적 절망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5-7)

 

예수님 앞에는 장정만 5천 명, 여성과 아이들을 합치면 족히 2만 명은 될 법한 거대한 무리가 굶주린 채 모여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 빌립을 콕 집어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5)

왜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빌립이 어떻게 할지 다 알고 시험하고자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시험(페이라존)’은 함정에 빠뜨리려는 유혹(Temptation)과 다른 말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탄이 죽이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시는 것은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약점을 공략하여 죄에 빠지게 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악의적인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약점을 알게 하여 죄에 빠지지 않게 하고, 인간의 연약성을 깨달아 하나님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갖게 하는 선의적인 시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신 것은 그의 믿음의 질량을 달아보시는 영적 테스트(Test)였습니다. 빌립의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합리성)'가 하나님 나라의 기적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려는 '거룩한 장치'였습니다. 결과가 긍정적일 것을 기대하고 하시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본주의적 계산'이라는 민낯을 완전히 들춰내기 위해 강렬하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머리 회전이 가장 빨랐던 빌립의 뇌 구조는 슈퍼컴퓨터처럼 작동합니다. 어떻게 대답합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7)

 

빌립의 분석은 너무나 정확했습니다. 철저히 합리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당시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치 품삯입니다. 200 데나리온이면 한 사람이 아무것도 쓰지 않고 8개월을 꼬박 모아야 하는 거액입니다. 빌립은 현재 모인 인원수(Data), 필요한 최소 예산(Budget), 그리고 제자들의 재무 상태(Asset)1초 만에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리이다(불가능합니다)"라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냈습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 사회가 고도로 합리화되면서 인간이 결국 '합리성의 쇠우리'에 갇히게 되었다고 통찰했습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량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계산의 감옥에 갇혀 창조성과 기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빌립의 이런 상태를 분석 마비라고 부릅니다. 정보가 너무 많고, 문제점을 너무나 정확하게 분석한 나머지, 오히려 압도당하여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마비되어 버리는 현상입니다. 합리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구에서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보인 반응은 전형적인 분석 마비였습니다.(민수기 13-14)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분석하는 데 에너지를 다 썼습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엄격한 분)"으로 정의하고, 투자했을 때 발생할 손실(Risk)을 치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5:25)라고 했습니다. 그는 손실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했습니다. 완벽한 안전을 위한 분석이 결국 '게으름'이라는 마비를 가져온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엘륄은 인간이 효율성을 절대적 가치로 삼으면서 스스로 그 기술과 계산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통찰했습니다. 기술(효율성)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가?" "의미 있는가?"라는 도덕적 질문은 사라지고, 오직 "이것이 더 효율적인가?"라는 질문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발견되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방법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생존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계산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 감정, 예술, 신앙조차 수치데이터로 환산됩니다. 기술이 현대인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과를 기다렸다면, 현대인은 기술적 계산을 통해 결과를 통제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다림, 은혜, 신비라는 영적 가치는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됩니다.

 

엘륄이 말한 효율과 계산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적 사건은 다윗의 인구 조사입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해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갑자기 요압 장군을 보내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통계 조사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적 효율성과 국가적 역량을 수치화하여 확인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보다 눈에 보이는 병력의 수치가 더 확실한 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엘륄이 말한 계산의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요압 장군조차 이것이 영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직감하고 만류했지만, ‘국가 통치와 전쟁의 효율성이라는 합리성에 사로잡힌 다윗은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이 인구 조사를 마친 후, 그는 즉시 심한 자책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숫자가 파악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 자리가 사라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온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효율성을 확인하려다 생명을 잃게 된 역설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기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식해서가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절망합니다.

"내 학벌과 스펙으로는 저곳에 취업할 확률이 3%."

"우리 가정의 수입으로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수천만 원의 적자야."

선교를 계획할 때, "이 사역에 투입되는 예산과 인력 대비 몇 명이나 새로 등록할까?"를 먼저 따집니다. 소위 '전도 효율성'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효율이 떨어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보다는, 교회의 이미지 제고에 '효과적인 사업'에 예산을 집중합니다. 숫자가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길이 멈췄다고 생각하며 쉽게 낙심하고 사역을 포기합니다. 숫자의 노예가 되어 '한 영혼의 천하보다 귀함'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녀가 주일 예배나 봉사에 시간을 쓰는 것을 보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것이 나중에 대학 입시에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자녀가 신학을 하거나 헌신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면 "그 힘든 길을 왜 가니? 일단 성공해서 돈으로 헌금하는 게 더 효율적이야"라고 말합니다. 자녀의 영적 성숙보다 세상적 스펙을 쌓는 것이 인생의 '안전장치'라고 믿는 것입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모험' 대신, 학원과 과외라는 '기술적 시스템'에 의존합니다. 결국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기회를 잃고, 부모의 계산서 안에서만 움직이는 기계적인 신앙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고난이 닥치면 가장 먼저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손해를 봐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신앙을 '복을 받기 위한 확실한 투자처'로 생각하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하면 즉시 신앙의 가성비를 의심하며 원망에 빠집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사귐이 아니라 '요구 목록을 제출하는 과정'이 되고, 예배는 '축복을 받기 위한 의무적 지출'이 됩니다. 계산이 앞서니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Gratia)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 영혼은 메말라갑니다.

 

빌립의 계산서에는 2만 명의 사람도 있고, 200 데나리온의 돈도 있고, 떡의 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완벽한 기획서에 단 하나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여러분, 합리적 이성과 효율의 프레임이 우리의 시야를 지배할 때, 우리는 내 곁에 서 계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 되고 맙니다. '정확한 진단''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계산기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빌립처럼 '정확한 데이터'가 낳은 합리적 절망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함께 진정한 봄날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어떤 경우도 봄날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가 봄날을 살기 위해 안드레의 시선을 가지고 결핍의 프레임이 아니라 자산 프레임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8-9절 상반절)

 

빌립이 완벽한 계산을 돌리고 있을 때 안드레가 무슨 말을 합니까? 8절과 9절 상반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는 셈이 빠른 빌립과 달랐습니다. 그는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없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있는가'를 찾았습니다. 탐색하는 것입니다. 연결점을 찾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찾아낸 것은 대단한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원문에서 이 소년은 청소년이 아니라 '파이다리온', 즉 아주 어린 꼬마였습니다.

그가 쥔 보리떡 다섯 개는 '크리티노스'입니다. 이는 고운 밀가루 빵이 아니라, 주로 당나귀나 먹던 가축용 사료이자 가장 가난한 빈민들이 생존을 위해 억지로 삼키던 거친 빵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큰 연어나 도미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옵사리온', 빵에 곁들여 먹는 비린내 나고 볼품없는 소금에 절인 아주 작은 잡어를 뜻합니다.

 

이 압도적인 초라함 앞에서 안드레 자신도 흔들리며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9절 하반절). 2만 명의 굶주림(문제)과 도시락 한 개(자원)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큽니다. 안드레의 이 질문은 '결핍 프레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냉소''자괴감'을 보여줍니다. 안드레는 아이를 주님께 데려오는 '믿음'을 보였지만, 다시 무리(환경)를 보자마자 '계산기'가 돌아갔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게 얼마나 되겠어?"라고 묻습니다. "늙어서 사진 찍기 싫다""이 늙은 얼굴이 꽃 앞에서 얼마나 되겠어?"라는 결핍의 음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빌립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자기 머리로 "안 된다"고 결론 내렸지만, 안드레는 "얼마나 되겠느냐"는 의문을 품은 채 그 의문과 도시락을 통째로 '예수님의 손 위로' 던진 것입니다. 이것을 '정직한 항복'이라고 부릅니다. 내 자산이 초라함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 초라함조차 주님의 손에 있으면 달라질 수 있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칼럼니스트가 혐오와 갈등이 가득한 인터넷 세상에 '사랑과 화해'를 주제로 짧은 글 한 편을 기고하려 합니다. "지금 정치적 대립과 전쟁, 혐오의 물결이 이토록 거센데, 내가 밤잠을 설쳐가며 쓴 이 2,000자 남짓한 원고 한 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건 바다에 떨어뜨리는 잉크 한 방울조차 안 되는 것 아닌가?" 나의 문장(보리떡)이 세상의 굶주림(문제)에 비해 너무 작아 보여 펜을 놓으려 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주님을 의지하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평생 거창한 선교지가 아닌, 자신의 정원에서 나무를 가꾸듯 묵묵히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거나 작은 공동체에서 이름 없이 봉사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하고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데, 나는 그저 매주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고 아픈 이웃을 위해 죽 한 그릇 끓이는 것이 전부네. 주님, 제 평생의 헌신이 고작 '보리떡 다섯 개' 정도의 흔적뿐인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때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기부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까?" 기후 위기로 지구가 병들어가고 전 세계에 기아가 넘쳐나는 뉴스를 보며, 한 성도가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매달 커피 몇 잔 값을 아껴 작은 구호 단체에 보냅니다. "기업들은 공장을 돌려 탄소를 배출하고 있고,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굶고 있는데, 내가 분리수거를 좀 더 꼼꼼히 하고 몇만 원 기부한다고 해서 지구가 살아날까? 주님, 이 작은 정성이 저 거대한 비극 앞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문제의 규모는 '태평양'인데 나의 대처는 '조약돌' 같을 때 느끼는 자괴감입니다. 그때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작은 것을 초라하게 여기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그 작고, 거칠고, 냄새나고, 부끄러운 현실을 숨기지 않고 예수님께로 가지고 나아와 연결했습니다. 안드레는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탄식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탄식을 '예수님 손 위에서' 했다는 점입니다.

"주님, 이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라도 주님께 드립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필요한 자세는 내 도시락의 '크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락을 '누구의 손'에 얹느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드레에게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초라한 '옵사리온(작은 물고기)'을 가장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안드레의 탄식은 불신이 아니라 '정직한 항복'입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의 손에 맡기는 그 항복의 지점에서 진짜 오병이어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심리학의 개념 중 결핍 프레임(Scarcity Frame)’자산 프레임(Asset Frame)’이 있습니다. 결핍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내게 없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나는 돈이 없어, 배경이 없어, 건강이 없어." 반면 자산 프레임은 "비록 초라하지만,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빌립은 '결핍 프레임'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엇이 모자란가'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을 때, 200 데나리온을 꽉 채웠을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는 자산 프레임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비록 당나귀나 먹는 보리떡(크리티노스) 같고, 비린내 나는 작은 물고기(옵사리온) 같을지라도, 그것을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손에 '연결'할 때 기적의 톱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안드레는 계산을 뛰어넘어, 작고 부끄러운 나의 현실을 은혜의 식탁으로 가져가는 훌륭한 다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실 때 양을 치는 물매와 물맷돌로 골리앗을 이기게 하여 그의 인생의 봄날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40년간 양을 기르던 지팡이를 사용하여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었고, 목마른 백성에게 물을 제공하며 봄날을 만드셨습니다.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삼갈의 손에 들린 소 모는 막대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보잘것없는 막대기 하나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봄날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마더 테레사를 보십시오. 안드레처럼 '압도적인 초라함' 속에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948, 그녀가 인도의 빈민가로 들어갔을 때 그녀의 수중에 있는 돈은 단 '5루피(100원 미만)'뿐이었습니다. 거대한 가난의 태평양 앞에 5루피는 잉크 한 방울도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누군가 조롱 섞인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에게는 5루피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5루피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5루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5루피를 주님 손 위에 얹었고, '조약돌' 같은 시작은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 '사랑의 선교회'라는 기적의 떡이 되었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를 보십시오. 그는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당시 교계 어른들은 그가 세계 선교를 가겠다고 하자 "젊은이, 앉게나. 하나님이 이방인을 개종시키려 하신다면 자네 도움 없이도 하실 걸세"라며 비효율적인 일이라 치부했습니다. 캐리는 구두를 수선하며 벽에 세계 지도를 붙여놓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낮은 신분과 부족한 학벌을 보지 않고, '복음을 향한 열정'이라는 자산을 주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그의 유명한 표어는 안드레의 심장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삼갈의 막대기, 다윗의 물맷돌, 테레사의 5루피, 그리고 오늘 본문의 보리떡... 이들의 공통점은 '부족함'이 아니라 '연결됨'에 있었습니다. '잉크 한 방울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펜을 놓으려 하는 칼럼니스트 성도님 계십니까? '죽 한 그릇이 무슨 보탬이 되나'라고 힘 빠져 있는 권사님 계십니까? 안드레처럼 그 초라한 진심을 주님 손 위에 얹으십시오. 주님은 그 '잉크 한 방울'로 천국의 문장을 쓰시고, '죽 한 그릇'으로 생명의 잔치를 배설하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핍 프레임으로 지옥 같은 겨울철을 보내지 말고 자산 프레임으로 천국 같은 봄날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소년처럼 계산을 초월한 순수한 헌신으로 영원한 봄날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9절 하반절 - 11)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봄날을 선물한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어린 꼬마(파이다리온)를 보십시오. 수많은 어른이 굶주림에 지쳐 예민해져 있습니다. 소년의 품에 안긴 이 도시락은, 이 들판에서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유일한 생명줄입니다. 만약 이 소년이 현대의 경제학을 배웠거나 합리적 이기주의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몰래 혼자 구석에 가서 먹는 것이 가장 가성비 높은 선택입니다. "내가 이걸 내놓는다고 저 2만 명이 배부를 리도 없고, 나만 굶어 죽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하지만 소년은 주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뉘앙스를 안드레를 통해 느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꺼내놓았습니다. 반을 잘라 자신의 몫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계산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조건 없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노동자 1년 치 연봉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부었습니다. 유다에게는 이 행동은 최악의 비효율적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낭비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될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셨습니다. 사랑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옥합을 깨뜨립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동인, 동신)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손 목사님의 삶은 효율성이나 가성비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인 거룩한 낭비가 한 영혼을 변화시키고 한국 교회에 거대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지난주와 어제 최 집사님과 김 집사님이 옥상 방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업체를 부르면 편하고, 집사님 전문 분야도 아닌데 왜 고생하시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시성비)을 따지지 않고, 아무런 보상이나 직분이 주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이 헌신은 현대판 오병이어의 소년과 같습니다.

촉망받는 전문의가 자신의 휴가 전체를 반납하고 사비를 들여 오지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으로 떠납니다. “그 시간에 세미나를 가거나 쉬는 게 다음 학기 성과에 훨씬 효율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경력 관리를 계산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합니다. 보상받지 못할 곳에 자신의 재능을 쏟아붓는 것이 바로 조건 없는 헌신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면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명성이나 세제 혜택(가성비)을 거부하고, 수십 년간 익명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대로, 인간적인 보상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는 행위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드림입니다.

사람에게는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십니다. 초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작은 헌금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작은 재능을 초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물질, 재능을 통하여 이 땅을 어떻게 봄날로 만들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정년이 되어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설계도를 그동안 가지고 있던 당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건축을 하게 했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년이 되었기 때문에 적당히 했답니다. 적당히 그린 설계도를 가지고 회장에게 갔답니다. 회장은 그동안 수고했다고 하면서 그 설계도를 가지고 집을 지어 내가 주는 선물이니 당신이 가지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이 땅에 쌓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을 향해 나아가길 바랍니다. 인생의 봄날일수록 주님께 작은 것이라도 드리시길 바랍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하면 잘해야 내 능력 한계입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맡기면 2만 명이 먹고도 12바구니를 거둡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극단의 굶주림과 죽음이 지배하는 수용소 안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빵 조각을 병든 동료에게 건네주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능력은 동물적 생존 본능을 뛰어넘어 타인과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자신을 내어던지는 자기 초월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소년은 철저한 생존의 계산을 넘어, 자기 초월의 위대한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소년의 이 투박하고도 순수한 헌신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세상의 수학은 오직 '더하기(+)''빼기(-)'로만 작동합니다. "지금 내 자본에 얼마를 더해야 200 데나리온이 될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학은 '곱하기(x)'입니다.

 

예수님은 200 데나리온이라는 완벽한 사업 기획서가 아니라, 소년의 초라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담은 보리떡과 물고기를 쥐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효율을 따지는 세상에서는 미련하다고 손가락질받을 그 '자기 초월'의 헌신 위에 창조주의 축복이 임하자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거룩한 잉여', 풍성의 기적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효율로 일하는 곳이 아니라, 계산 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일하는 곳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이 소년처럼 계산을 초월한 순수한 헌신으로 함께 누리는 영원한 봄날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들판에 서 계십니까? 내 인생의 문제, 가정의 위기, 자녀의 진로, 텅 빈 재정이라는 수많은 굶주린 군중 앞에서 두려워 떨고 계십니까?

우리의 손에는 스마트폰보다 더 빨리 돌아가는 '빌립의 계산기'가 들려 있습니다.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새로 시작합니까."

"이만큼 상처받고 헌신했는데 돌아온 게 없으니, 이젠 교회 봉사도 가성비 따져가며 해야겠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우리 성도님의 계산이 백번 맞습니다. 그러나 그 계산의 끝에는 빌립이 경험했던 '절망과 불가능'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인생의 봄날을 걷는 우리 성도님에게 완벽한 스펙이나 200 데나리온의 재력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안드레처럼 내게 있는 가장 작고 초라한 것(옵사리온)을 숨기지 않고 주님께로 가져와 연결하는 용기입니다.

둘째, 어린 소년처럼 내 생존의 본능과 이기적인 계산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나의 전부를 기꺼이 내어드리는 순수한 드림입니다.

 

나의 재능, 나의 물질, 나의 시간을 내 손에 꽉 움켜쥐고 있으면, 그것은 기껏해야 나 하나의 허기진 배를 면하게 할 당나귀 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숨 막히는 '효율의 쇠우리'를 부수고 나와 그것을 주님의 손에 얹어 드릴 때, 그 투박한 헌신은 창조주의 손끝에서 여러분의 가정을 살리고, 이 교회를 회복시키며, 굶주린 세상을 배불리는 열두 바구니의 넉넉한 기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예배당 문을 나서실 때, 우리 성도님의 머릿속에 돌아가던 모든 세속적 계산기, 가성비의 우상을 십자가 밑에 과감히 던져버리십시오. 주님께서 "너의 보리떡을 내게 주겠느냐"라고 기회를 주실 때, 핑계 없이, 계산 없이, 기쁨으로 여러분의 삶을 드려 하늘의 기적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살아계신 하나님, 매 순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나 자신만을 위해 철저히 가성비와 시성비를 따지며 살아왔던 우리의 영적 인색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빌립처럼 완벽한 계산 뒤에 숨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했던 우리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안드레의 영적 안목을 허락하사 내게 있는 작은 것을 주님께 연결하게 하시고, 어린 소년과 같이 나의 안전과 생존을 뛰어넘는 순수한 헌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의 초라한 옵사리온이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질 때, 세상을 먹이고도 남는 열두 바구니의 기적이 우리 삶과 가정 가운데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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