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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1) 완벽함의 환상에 들려온 음성(요한복음3:1-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1374 추천수:2 218.147.218.173
2026-04-12 13:56:33

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1) 완벽함의 환상에 들려온 음성

요한복음3:1-5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누렸습니다. 수치심의 감옥, 절망의 감옥, 죄책감의 감옥, 죽음의 공포라는 감옥, 버림받음의 감옥, 무덤의 감옥에서 들려오는 복음의 음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린 부활절이 지난 첫 주 오늘부터는 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이라는 시리즈로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복음은 인생의 겨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잘 나가는 인생의 봄날에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완벽함의 환상을 깨뜨리시는 음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인생의 겨울에 예수님을 만나기는 쉬워도, 인생의 봄날에 예수님을 만나기란 비례적으로 훨씬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의 봄날, 즉 건강하고 손에 쥐어진 것이 많아지며, 통장 잔고가 든든해지고 세상의 박수갈채가 커지면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는 통제력의 환상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은 결핍의 때에는 살려달라고 주님을 찾다가도, 무엇인가를 손에 쥐게 되면 마치 자신이 인생의 주관자인 것처럼 착각하여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얄팍한 연약함은 성경의 역사 속에 아주 뚜렷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사기에 나타난 '풍요의 저주'입니다.

신명기 3215절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타락을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여수룬'은 이스라엘을 부르는 가장 영광스러운 애칭(의로운 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 하나님을 발로 찼습니까? 광야의 굶주림 속에서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찌고 윤택해졌을 때, '인생의 봄날'을 맞이했을 때 배은망덕하게도 창조주를 버렸습니다. 이 패턴은 사사기 350년 역사 내내 쳇바퀴처럼 반복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을 보십시오. 그는 젊었고, 관원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졌으며, 흠잡을 데 없는 율법적 도덕성에, 엄청난 재물까지 소유한 완벽한 '봄날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에 대한 갈급함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결국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고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9:22).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완벽한 조건들, 그 찬란한 '봄날의 소유'가 도리어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무서운 장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금융업과 모직물, 안약 제조가 발달한 당시 아시아 최고의 부자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외쳤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3:17 ). 교회의 재정은 넘쳐났고 핍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영적 파산을 아주 매섭게 진단하십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 ). 통장 잔고가 넉넉하고 삶이 평탄하니 내 영혼도 안전할 것이라는 지독한 '착각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굴러가는 화창한 인생의 봄날은, 역설적으로 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영적 위기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앞서 말씀드린 부자 청년이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이 쌓아 올린 완벽한 스펙 속에서 영혼의 길을 잃어버렸던 또 한 명의 1세기 지식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1. 사람은 완벽해 보여도 거듭나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습니다(완벽한 스펙 뒤에 숨겨진 실존적 공허)

오늘 본문 요한복음 31절과 2절 상반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본문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그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도덕과 지성의 최고봉에 선 엘리트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결코 무지한 사람이 아닙니다. 방탕한 사람도, 도덕적으로 문란한 사람도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구별하며, 구제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누가 보아도 저 정도면 정말 훌륭한 사람, 본받을 만한 신앙인이라고 칭찬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아르콘)'였습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를 향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라고 부르십니다. 원문을 보면 헬라어 정관사 "(ho)"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 여러 선생 중 한 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우러러보는 바로 그 탁월한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71명으로 구성된 국가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공회원, 오늘날로 치면 대법관이거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루살렘 3대 갑부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부와 권력, 명예와 지식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입니다. 젊음, 건강, 권력, 재력, 명예, 종교적 존경심까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구비하고 인생의 화창한 봄날을 만끽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의 삶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것도 ''에 찾아옵니다.

성경은 왜 굳이 ''이라는 시간을 명시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도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서 '밤과 어둠'은 영적인 무지와 결핍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니고데모의 이 ''은 그의 내면 상태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인간이 사회적 역할을 위해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원래 고대 그리스 연극배우들이 얼굴에 쓰던 '가면'에서 유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황에 맞춰 여러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며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아무리 화가 나도 웃어야 하는 '친절한 김 과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집에서는 피곤해도 든든해 보여야 하는 '부모'라는 가면을 씁니다. 소셜 미디어(SNS)에는 행복하고 잘나가는 사진만 올리며 '행복한 나'라는 화려한 가면을 씁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올 때는 어떨까요? 세상에서 아무리 치이고 속이 상해 눈물이 나도, 주일 아침 예배당 문을 들어설 때는 '믿음 좋은 성도', '인자한 장로님', '온화한 권사님'이라는 아주 거룩하고 예쁜 가면을 씁니다. 사람들은 내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지 모른 채, 겉으로 보이는 그 화려한 가면을 보고 박수를 보냅니다.

니고데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낮에는 '완벽한 율법학자',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라는 아주 무겁고 화려한 금테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면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찾아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앉아 그 무거운 가면을 벗어 내려놓았을 때, 거울에 비친 그의 '진짜 맨얼굴'은 어땠습니까? 세상의 성취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영혼의 갈증 때문에 쩍쩍 갈라져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페르소나를 화려하게 가꾸는 데는 평생을 바쳤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할 '진짜 내 영혼의 얼굴'은 돌보지 못한 채 곪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낮의 환호가 밤의 허무함을 결코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종교는 있었지만 '생명'은 없었습니다. 형식은 완벽했지만 구원의 '확신'은 없었습니다. 머리에는 지식이 가득했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빛 가운데 있지 못한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 없이 잘 살 수 있습니다. 명함도 좋고, 이력도 화려하고, 사람들의 평가도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 홀로 남겨지면, 마음속에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서늘한 빈자리가 느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성공으로 구원받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취로 새로워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속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절대적인 빈 공간이 있습니다. 성경의 솔로몬을 보십시오. 지혜, 부유함, 권세, 쾌락의 정점을 찍고 완벽한 인생의 봄날을 살았지만, 그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세상의 성취를 아무리 쏟아부어도, 그 영혼의 밑빠진 독은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내가 이 진급만 하면, 내 통장에 이 정도 액수만 찍히면,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취업만 잘되면 평안할 거야.”

물론 귀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런 성취들은 삶의 '조건'은 조금 편안하게 바꿀 수 있어도, 우리 존재의 '본질'은 결코 바꾸지 못합니다.

예수님 앞에 선 니고데모는 바로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데 속은 지독하게 목마른 인간.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얻지 못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마음에 새겨야 할 진리는 분명합니다.

완벽해 보여도,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녔다고, 성경 지식이 많다고, 세상에서 교양 있고 인격이 훌륭하다고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평생을 종교적 성취와 세상의 성공으로 무장한 니고데모의 폐부를 찌르며 묻고 계십니다. “너는 겉보기에 많은 것을 가졌는데, 네 영혼 깊은 곳에 진짜 하늘의 생명이 있느냐?”

오늘 주님은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에게도 똑같이 물으십니다.

너는 인생의 화창한 봄날을 위해 많은 것을 붙들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정작 너의 영원을 책임질 나, 예수를 붙들고 있느냐?”

오늘 이 시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썼던 그 모든 종교적, 사회적 페르소나를 십자가 앞에 벗어 던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내 영혼을 향해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나에게는 진짜 완벽한,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새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영원한 삶에 대한 목마른 갈망이 있으십니까? 이 땅의 봄날 뿐 아니라 영원한 봄 날이 있습니까? 오늘 지금 이 땅을 떠나도 천국에서 부활하진 주님과 영원한 봄날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2. 예수님은 인생의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한 '거듭남'을 요구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아주 공손한 태도로 예수님께 말을 건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 말은 최고의 존중과 인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아주 훌륭한 분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정중한 인사말 속에 니고데모의 치명적인 영적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탁월한 선생(Mentor)”으로는 보았지만, 아직 죽어가는 나를 살리실 유일한 구원자(Savior)”로는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내 삶을 윤택하게 할 '좋은 교훈'은 얻으려 했지만, 자신이 쌓아온 완벽한 존재가 예수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박살 나야 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이 얄팍한 기대를 단번에 깨뜨리십니다. 요한복음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충격적인 선언입니까?

예수님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종교 지도자인 그에게 너 참 잘 살아왔다. 여기서 율법 지식을 조금만 더 쌓아라”, “구제를 조금만 더 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듭나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들려주시는 기독교의 진짜 복음입니다.

복음은 고장 난 인간을 조금 손보는 '수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성능을 조금 높여주는 '업그레이드'가 아닙니다. 복음은 죄로 죽은 인간을 근본부터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사역입니다. 세상의 성취가 아무리 대단해도,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가졌는가? 그것으로는 안 된다. 거듭나야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권력이 있는가? 그것으로는 안 된다. 거듭나야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지식과 학벌이 있는가? 그것으로는 안 된다. 거듭나야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도덕성과 평판이 있는가? 그것으로도 안 된다. 거듭나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다라는 말은 단순히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거나, 새해 첫날 다이어리를 사며 다짐하는 '새 출발'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에 사용된 헬라어 아노텐은 아주 놀랍고 깊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시간적으로 다시(Again)’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공간적이고 기원적인 의미로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화창한 봄날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아래로부터' 자신의 스펙을 쌓아 올린 사람들입니다. 내 땀, 내 노력, 내 학벌, 내 굳은 의지라는 벽돌을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 거대한 바벨탑을 완성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의 가장 뼈아픈 곳을 찌르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평생 땅에서부터, 네 힘으로, 아래로부터 쌓아 올린 그 완벽해 보이는 업적과 종교적 열심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문턱도 넘을 수 없다. 너의 존재는 약간 고쳐 쓰는 리모델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세운 성을 완전히 허물고,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으로 처음부터 다시 창조되어야 한다."

니고데모는 이미 율법과 명예, 부와 지위로 자기 인생의 거대한 성을 완벽하게 지어 놓았습니다. 다만 영혼의 미세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이라는 탁월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벽돌 한 장처럼 내 인생의 지붕에 얹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 근사한 인생에 약간의 '리모델링'만 거치면 더 완벽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도 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리모델링'하며 살아갑니다. 새벽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을 하고, 베스트셀러를 읽으며 교양을 쌓고, 헬스장에서 몸을 가꾸며, 주식과 부동산으로 통장 잔고를 업데이트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성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아주 중요한 일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조차 이런 '자기계발'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불손한 태도로 주님을 찾습니다.

"예수님, 내 인생의 운전대는 어차피 내가 쥐고 갈 테니, 주님은 조수석에 타셔서 내비게이션 역할만 좀 해주십시오. 내가 목표를 향해 달릴 때 멘탈이 흔들리지 않게 위로나 좀 해주시고, 내 사업과 자녀의 미래에 '축복'이라는 페인트칠이나 좀 예쁘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뼈대가 하얗게 썩어가는 집은 겉에 최고급 실크 벽지를 새로 바른다고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엔진이 완전히 타버려서 망가진 자동차는, 세차를 아무리 깨끗하게 하고 겉에 최고급 광택제를 바른다고 해서 단 1미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던 세상의 방식 그대로 영적 생활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조금 더 헌금하고, 조금 더 봉사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나를 예쁘게 보시고 구원해 주시겠지."

아닙니다! 구원은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구원은 자기수양이 아닙니다. 구원은 자기개선이 아닙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어 냄새나는 시체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생기를 불어넣어 살리시는 전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네가 교회에서 받은 직분으로 안 된다. 수십 년 믿어온 연륜으로 안 된다.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으로 안 된다.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으로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겉모습의 화려한 단장이 아닙니다. 속사람의 완전한 새 창조입니다. 내 인생에 신앙이라는 그럴듯한 페인트칠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운전하던 인생의 핸들을 놓고,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뒤, 성령의 호흡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묻고 계십니다. “리모델링으로는 안 된다. 아노텐,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오늘 이 시간, 정직하고 진지하게 내 영혼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을 그럴듯하게 '리모델링' 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 은혜로 완전히 '거듭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3. 진정한 완전함은 인간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선언 앞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황당한 질문은 니고데모가 영적인 진리를 철저히 육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당대 최고의 종교 지식인조차도 '거듭남'이라는 하늘의 비밀을 자기의 얄팍한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눈앞에 명작이 있어도 미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물감 자국에 불과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울려 퍼져도 음악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소음일 뿐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돈과 세속주의에 완전히 세뇌된 사람들은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단 신천지 같은 거짓 교리에 중독된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비춰주어도 오히려 화를 냅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혀, 그 너머의 차원을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살이와 메뚜기와 개구리' 우화를 아십니까?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재밌게 놀았습니다. 해가 지자 메뚜기가 말합니다. "하루살이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화를 냅니다. "내일이 어딨어! 오늘이 전부지!"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번엔 메뚜기와 개구리가 신나게 놀았습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개구리가 말합니다. "메뚜기야, 이제 추워지니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 그러자 이번엔 메뚜기가 화를 냅니다. "메뚜기도 한 철인데, 내년 봄이 어딨어! 지금이 끝이야!"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른다고 해서 내일이 없는 것입니까? 메뚜기가 '내년 봄'을 부정한다고 해서 봄이 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재하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이 "영원의 세계가 어디 있느냐, 천국이 어디 있느냐"라고 핀잔을 준다고 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물을 보는 육안(肉眼)이 있고, 학문을 깨닫는 지안(知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를 보는 것은 오직 영안(靈眼)이 열려야만 가능합니다. 영적인 세계는 비이성이나 비논리가 아닙니다. 이성을 뛰어넘는 초이성이요, 초논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답답해하는 니고데모에게 영안이 열리는 구체적인 비결을 5절에서 제시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보는 차원, 아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가 평생 쌓은 수양이나 지식의 축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새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물은 무엇이겠습니까?

물을 태의 물, 세례, 말씀, 정화, 성령의 상징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여기서는 물은 회개케 하는 말씀(벧전1:23-25; 1:18)으로 해석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나 문맥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물은 '우리를 회개케 하고 씻어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죽은 영혼에 진리의 말씀이 들려질 때 생명의 씨앗이 심깁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의 바람'을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현상을 통해 바람이 실재함을 증명합니다.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로 들은 말씀의 씨앗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 비로소 "예수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10:10, 고전 12:3)라는 생명의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듭남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약 민수기 21장의 '놋뱀 사건'을 끌어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장대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리라!" 뱀에 물린 자들이 해독제를 연구했습니까? 착한 일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복음의 정수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4-15)

 

기독교 복음의 심장인 요한복음 316절을 다 함께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흔히 착각합니다. “내가 더 나아지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거야.”, “내가 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실 거야.”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완벽해지려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내가 대신 값을 지불하마" 하시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 스펙을 쌓아 올리려 했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생명을 거저 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지식, 종교, 지위, 도덕, 부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로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장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습니다.

완벽함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완벽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조건도 붙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완성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쌓아 올리려던 완벽함의 환상을 십자가 앞에 산산이 깨뜨리십시오.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때 비로소, 이 땅의 봄날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봄날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혼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진정한 인생의 봄날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을까요?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에 대하여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그가 믿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750절을 보세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속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하속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을 나무라자 니고데모가 하속들을 변호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변하는가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질문했는데 요한은 바로 니고데모가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인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사형당하셨을 때입니다.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며 목숨을 바치겠다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두 도망쳤습니다. 대중은 침묵했습니다. 권력은 적대시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숨어버린 그 서늘한 골고다 언덕에, 무려 백 리트라(33kg)의 값비싼 몰약과 침향을 짊어진 한 남자가 걸어 올라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19:39)

밤에 찾아 왔던 그가 공개적은 낮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공개적으로 헌신을 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100 리트라(33kg)의 몰약은 당시 '왕의 장례식'에만 쓰이던 양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실패한 사형수의 시신에 '왕의 장례'를 치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완벽한 스펙을 버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그분이 진정한 '내 인생의 왕'이심을 행동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성경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6)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의 행위를 보면 그가 믿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반역자요, 율법의 저주를 받은 십자가 사형수의 시신을 그가 거둔다는 것은 곧 '사회적 자살'이었습니다. 평생 누려왔던 완벽한 사회적 지위, 엄청난 부, 사람들의 존경을 하루아침에 모두 박탈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헌신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신분을 꽁꽁 숨겼던 그가, 이제 영원한 인생의 봄날을 믿고 자신이 평생 쌓아 올렸던 그 찬란한 인생의 봄날을 십자가 앞에 모조리 쏟아붓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영혼에 말씀의 물이 뿌려지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닥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은 것입니다. 오직 저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영혼에 새 생명을 주시는 진짜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의 겨울에도, 인생의 봄날에도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2829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4:23절에서는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과 무관한 삶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부요함도, 명예도, 권력도, 지식도, 인기도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에베소서 2:89절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능력을 행합니다. 믿음은 한계와 불가능을 돌파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믿음은 세상의 가치관을 이기고 승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 5:4)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11:33-34)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재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4:18)

마침내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에게 영광의 상급을 받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어떤 상황에서도 봄날로 사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땅에서도 봄날로 살고 영원한 나라에서도 봄날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믿음을 보겠냐고 성경에 말씀하는 것처럼 부자가 되면 먼저 믿음이 식어집니다. 권력이 있으면, 명예가 있으면, 지식이 많아지면, 인기가 많아지면 믿음이 식어집니다. 인생의 봄날이라고 생각될수록 더욱 믿음으로 영원한 봄날을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지독하게 공허한 분이 계십니까?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고, 남 부러울 필요가 없는 봄날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영혼이 불안한 분이 계십니까? 신앙생활은 수십 년 했지만, 아직도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고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나를 붙들고 버티는 분이 계십니까? 믿음으로 인생의 봄날을 누리고 믿음으로 인생의 봄날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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