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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6) 무덤의 감옥을 깨뜨린 음성(요11:25-2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2417 추천수:1 218.147.218.173
2026-04-05 11:49:55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6) 무덤의 감옥을 깨뜨린 음성

요한복음11:25-26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종류의 차가운 '겨울'을 지납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작은 통증도 크게 느껴지는 건강의 겨울이 있습니다. 같은 집에 살아도 마음이 얼어붙고 멀게만 느껴지는 관계의 겨울이 있습니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 한숨만 나오는 경제의 겨울도 있습니다. 때로는 예배를 드려도 감격이 없고 기도를 해도 하늘이 막힌 것 같은 영혼의 겨울을 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겨울 가운데서도 가장 차갑고, 가장 두렵고, 가장 피하고 싶은 절대적인 겨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죽음'이라는 겨울입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이 죽음을 피해 보려고 몸부림칩니다. 의학도, 과학도,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업들은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으며 수명 연장과 영생의 비밀을 연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문명이 발전해도 인간은 결국 죽음 앞에 멈춰 섭니다.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스티브 잡스조차 자신의 그 막대한 부와 기술로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그래서 사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늘 죽음의 그림자 아래 살아갑니다. 늙는 것이 두렵고, 잃는 것이 두렵고, 병드는 것이 두려운 그 깊은 바닥에는 결국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에는 바로 그 짙은 죽음의 겨울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시신이 무덤에 갇힌 지 이미 나흘이 지나 부패하는 냄새가 날 정도로, 그곳은 완벽한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때, 무덤의 감옥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만 함께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외칩니다.

이 말씀은 슬픔에 빠진 유가족을 향한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전포고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을 통해, 절망의 겨울을 지나는 우리가 어떻게 무덤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들은 왜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 (현대인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성도님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그녀는 부활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이 지금 이 순간 내 닫힌 무덤 앞에 서 계신다는 사실은 아직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그녀가 당시 유대 사회의 주류 신학이었던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세기 유대교 내에서 부활은 뜨거운 신학적 논쟁거리였습니다. 사두개파는 모세오경에 부활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며 부활과 천사, 영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반면, 바리새파는 구약성경(특히 다니엘 12:2, 이사야 26:19 )을 근거로 '세상의 마지막 날(종말)에 의인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마르다는 이 바리새파의 정통 교리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 교리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을 때 이를 '먼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으로 자동 해석했습니다. 그녀는 유가족을 향한 흔한 종교적 위로쯤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부활이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서 계신 '예수님 그분 자신'이며, 그분이 현재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능력이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르다에게 부활은 미래의 교리였지, 오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사실 마르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천국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내 앞에 닫혀 있는 이 돌문 앞에서는 멈춥니다. 어떤 분은 오래된 상처의 돌문 앞에서 멈춰 있습니다. 한 번의 배신이, 한 번의 실패가 아직도 그 자리에 돌처럼 놓여 있습니다.

어떤 분은 관계의 무덤 앞에서 멈춰 있습니다. 이미 너무 멀어진 것 같아서,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돌문을 쳐다보기조차 싫습니다.

어떤 분은 신앙의 무덤 앞에서 멈춰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기쁨이 없고, 찬양은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신앙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이성, 경험, 과학적 검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현대 과학주의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하였겠습니까?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죽음은 비가역적(돌이킬 수 없는) 세포의 괴사입니다. 이들은 "뇌사 및 심정지 후 4일이 지났다면 생물학적 소생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예수님의 말씀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일축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37절에 보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기적을 행하던 자가, 왜 자기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절친한 친구 나사로의 병 하나는 막지 못했는가?"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예수라는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무능한 존재구나"라고 조롱하며 냉소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누구라도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부활이 진실임을 입증한다면, 내 철학을 다 부수고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단언했습니다. 독일의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Paulus)는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무덤의 서늘한 바람을 쐬고 깨어났다는 '기절설'을 주장했고, 르낭(Renan)은 부활이 제자들의 사기극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이라는 초자연적 사건이 자신들의 '과학적, 이성적 경험'과 불일치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말하면 마르다는 그런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그녀의 반응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교리적으로는 정통하지만, 복음의 현재적 능력을 상실한 이성적인 신앙인'을 정확히 대변합니다. 머리(지식)로는 알지만 삶(현재)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교리적 정답'100% 동의합니다. 주일학교나 성경 공부에서 배운 신학적 지식은 풍부합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삶에 나사로의 죽음과 같은 끔찍한 절망, 재정적 파탄, 중증 질병, 관계의 단절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지금 당장' 내 삶의 무덤에 찾아오셔서 돌문을 열고 개입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과거에 성경 속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역사적 동의와 "미래에 천국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는 종말론에 갇혀 있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오늘 이 순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스스로 제한해 버립니다.

 

삶을 사는데 경험과 이성적 판단, 과학적 증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적 증명이 진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겠습니까? 차원이 다르면 인간의 제한된 경험으로는 논리적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2차원의 평면 세계만 경험하며 사는 개미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개미 앞의 평면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3차원의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개미의 경험과 논리로는 나비가 갑자기 증발해 버린 '기적'이거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3차원의 존재에게 그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닫힌 시공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3차원적, 아니 무한 차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의 이성으로 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거짓이 될 수는 없습니다.

 

2. 부활을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확실한 증거)

자신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지 못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합니까?

25, 26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Ego Eimi)"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약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신적 자기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과 생명을 그저 '가져다주는' 분에 그치지 않고, 그분 자체가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 부활은 먼 미래에 일어날 막연한 사건이나 교리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가 부활을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선언입니다. 부활은 어떤 사건 이전에 한 분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어떤 교리 이전에 한 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활"(아나스타시스)'다시 일어서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생명(조에)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목숨인 '비오스(bios)'와는 달리 신적인 영원한 생명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심장이 다시 뛰게 하는 분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내가 부활을 만들어 줄게"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부활 그 자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이니까, 내가 여기 온 이상 죽음은 힘을 못 쓴다!"라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부활의 '두 차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미래적 부활입니다. "죽어도 살겠고"는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적 부활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는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조에)이 들어왔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은 단지 더 큰 생명으로 넘어가는 '통로'일 뿐이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생명(헬라어 '조에')은 단순히 숨을 쉬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한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이 영원한 생명이 '지금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며, 육신의 죽음조차 이 영적인 생명을 결코 끊어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마르다는 죽음을 '모든 가능성의 끝'으로 보았지만,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조차 생명을 막을 수 없는 징검다리에 불과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의 '물리적 절망(죽었으니 끝났다)'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바리새파의 정통 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내가 아나이다"). 하지만 지식으로 아는 교리는 현실의 무덤 앞에서 아무런 위로나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철저히 이성적 지식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언을 마치신 직후,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도전하십니다. "네가 부활 교리를 잘 이해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 지금 네 삶의 절망을 뚫고 들어온 나를 전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내게 주권을 넘기겠느냐는 결단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의 '이성적 절망(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역사 비평의 합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 속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유일한 사건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산물로서 인간의 창작에 의해 채색된 신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는 역사의 진정성 여부는 세 가지에 의해 진위가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개연성의 원리입니다. 역사 비평적 연구는 자연과학적 분석과 달리 판단의 진정성 여부를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의 반복 불가능성은 단지 개연적 판단만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비의 원리입니다. 역사적 방법론은 사건을 유비의 원리에 따라 판단하는데 사건은 기존 경험과의 불일치가 주장되지 않는 한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상관의 원리입니다.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이 오늘날과 상호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적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허구에 대한 열정적인 자기 신념의 표현으로 밖에는 비쳐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부활에 대한 의심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둘째, 부활 기사의 신빙성, 셋째는 빈무덤의 역사성, 넷째는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의 증언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고, 살아나셨다고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에 장사되셨다고 증언합니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 기사 자체의 신빙성입니다.

부활 기사들의 신빙성은 먼저 기록 시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화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고린도서는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기록들입니다. 부활 기사들은 세부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그것이 지어낸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부 묘사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오히려 모든 증언이 기계적으로 짜 맞춰진 문장 복제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빈 무덤의 역사성입니다.

빈 무덤에 대하여 마가복음 16, 마태복음 28, 누가복음 24, 요한복음 20장은 모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는 유대 지도자들이 군인들에게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라고 했다는 반론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이 여전히 그 무덤에 남아 있었다면, 부활 선포는 그 도시 안에서 곧바로 무너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넷째,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에 대한 가장 이른 목록은 고린도전서 15:58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이 목록은 단순한 개인 체험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증언 집단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그 중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들이 많다고 덧붙이는데, 이는 적어도 그의 편지 수신자들이 그 증언을 검토 가능한 현실의 증언으로 들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자신도 부활하신 주를 만난 증인이라고 주장하며 복음 전파자로 바뀌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23:55).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7:5) 미쳤다고 했습니다.(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1:14) 희생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역사는 사실적 역사와 기록된 역사가 있습니다. 사실적 역사는 증인에 의해 진위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부활의 증인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진실성을 입증했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증명으로 입증되지만 역사적 사실은 증거로 입증됩니다. 과거에 일어난 단회적인 역사적 사건은 과학적 실험실의 잣대가 아니라 '역사적, 법정적 증거'로 입증해야 합니다. 재판관이 과거의 사건을 판결할 때 구두 증언, 문서 증거, 정황 증거를 철저히 검토하듯, 부활도 철저한 법정적,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애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런던대학교의 탁월한 법률학 교수 노먼 앤더슨은 법학자의 치밀한 시각으로 빈 무덤과 부활의 가설들을 검토한 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시카고 트리뷴>의 법률 기자 리 스트로벨(Lee Strobel) 역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한 사람씩 법정에 세워 15분씩만 반대 심문을 한다고 쳐도, 무려 129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증언을 들어야 할 만큼 부활의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인이자 문학자였던 C.S. 루이스 역시 부활을 신화로 취급하며 기독교를 떠났지만,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과 부활의 증거들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 기사도, 빈무덤도, 부활 후 출현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은 언젠가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날에는 확실하게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15:16-19)"

 

마르다가 요한복음 1127절에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고백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선언(25, 26)"네가 이것을 믿느냐?"라는 직선적인 도전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 모범적인 응답입니다.

앞선 24절에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대해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머리로 아는 신학적 지식이자 교리에 대한 동의였습니다. 그러나 25, 26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며 '사건'이 아닌 '당신 자신'을 가리키셨을 때, 마르다의 반응은 27절에서 "내가 믿나이다"로 완전히 바뀝니다.

이는 부활이라는 추상적인 명제에 대한 동의를 넘어서서, 내 눈앞에 서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인격 자체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신뢰로 나아갔음을 의미합니다.

마르다가 25, 26절에 담긴 '현재적 생명''영원히 죽지 않는' 영적 비밀, 그리고 당장 오빠가 살아날 물리적 기적의 메커니즘을 그 순간 100% 완벽하게 이해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39절에서 예수님이 무덤 돌문을 열라고 하실 때, 마르다는 "냄새가 나나이다"라며 여전히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27절 고백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심오한 말씀을 전부 논리적으로 이해해서 ", 이해했습니다"라고 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당신이 메시아(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기 때문에, 내 이성을 뛰어넘는 당신의 그 말씀(25, 26)도 전적으로 수용하겠습니다"라고 항복한 것입니다. 방법(How)을 다 알지 못해도, 대상(Who)을 확신하기에 아멘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25, 26절에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에고 에이미")을 선포하셨을 때, 마르다는 이를 정확히 알아듣고 예수님께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장 완벽한 칭호를 올려드립니다.

이는 마태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에 버금가는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전체를 기록한 목적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20:31)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마르다의 이 반응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25, 26)에 대한 가장 정답과도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마르다의 반응은, 이성과 경험의 한계 앞에서 주춤하던 현대인(혹은 당시의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내려놓고 주권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결단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3. 부활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부활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소생 사건을 통해 볼 때, 부활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믿고 받아들인 자에게는 분명하고도 강력한 결과가 뒤따릅니다. 이 사건 직후인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모습을 통해 그 놀라운 변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굳게 닫힌 무덤 앞에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11:40)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곧 한계 상황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영광)을 현재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현실(11:39) 앞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자기 이성과 경험의 고집을 꺾고 무덤의 돌문을 엽니다. 사망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나사로야 나오라")에 굴복하는 것을 보았기에, 더 이상 죽음이나 세상의 위협이 신자들을 옭아매는 궁극적인 공포가 되지 못합니다.

2) 계산 없는 절대적 헌신을 합니다.

123절을 찾아 같이 읽겠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베다니에서 열린 잔치(12:1-8)를 보면 이 가정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이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순전한 나드 한 근)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습니다(12:3). 이는 노동자의 1년 치 품삯(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였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계산 없는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가치도 주님을 향한 헌신을 아깝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며 울기만 했던 마르다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 주님의 잔치를 위해 일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는 동생이 돕지 않는다며 예수님께 불평하고 마음이 분주하여 원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도 냄새가 난다며 예수님을 가로막던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목격한 후의 마르다는 여전히 봉사의 자리에 있지만, 더 이상 원망이나 불평, 불안함이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자신의 가정의 주인이심을 확신했기에, 그녀의 섬김은 묵묵하고 평안하며 영광스러운 헌신으로 승화되었습니다.

3) 부활이신 주님을 증거합니다.

12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나사로는 그 존재 자체가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10-11절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나사로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부활을 경험한 나사로는, 자신을 향한 암살 위협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숨지 않고 주님 곁에 함께 앉아(12:2) 당당히 자신의 생명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을 참으로 믿고 목격한 삶은 '환경에 짓눌린 슬픔과 원망'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예배(마리아), 평안한 섬김(마르다), 두려움 없는 증언(나사로)'의 삶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덤의 문을 여시고 나사로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오늘 마르다에게 던지셨던 동일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추상적인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사망 권세를 박살 내시고 오늘 내 삶에 찾아오신 주님께 나의 전 인격을 내어던지는 신뢰를 원하십니다. 마르다처럼 대답합시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11:27).

 

우리 성도님의 삶 속에 돌문으로 굳게 닫힌 무덤이 있습니까? 관계의 단절, 경제적인 파탄, 질병의 고통, 죄책감과 우울의 무덤이 있습니까? 그 절망의 감옥을 향해 외치시는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혹시 지금 여러분 삶에 무덤 같은 자리가 있습니까? 끝난 것 같은 관계가 있습니까?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눈물의 자리가 있습니까? 오래된 상처와 죄책감과 무기력이 있습니까?

"나오라!" 죽음의 감옥에서 나오라. 죄책감에서 나오라. 절망에서 나오라. 두려움에서 나오라. 상처의 감옥에서 나오라. 식어 버린 신앙에서 나오라. 그 음성이 오늘 우리 가정에도 들리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 자녀에게도 들리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 교회에도 들리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도 들리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사망의 권세를 비웃고, 인생의 어떤 추운 겨울 앞에서도 승리하는 생명의 복음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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