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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1)수치심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창세기3:8-1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3438 추천수:2 218.147.218.173
2026-03-01 13:31:24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1)수치심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

창세기3:8-15

어제 이란에서 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3월이지만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겨울을 다가옵니다. 건강했던 몸에 이상이 오고, 좋은 관계에 있던 사람이 등을 돌리고, 안전했던 사업에 위기가 찾아오고, 평안했던 마음에 우울증이 찾아 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이라는 주제로 4주간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춥고 어두웠던 첫 겨울에덴동산에서 일어난 비극과,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따뜻한 음성을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가장 깊고 파괴적인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수치심'을 꼽는다고 합니다. '죄책감'"내가 나쁜 행동을 했다"는 감정이라면, '수치심'"나라는 존재 자체가 나쁘다, 나는 결함이 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훨씬 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감정입니다.

 

물론 모든 수치심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수치심의 치유>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존 브래드쇼는 수치심을 '건강한 수치심''해로운 수치심'으로 분류합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자신이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수치는 자신에게 결점이 있다고 느낄 때 혹은 자신의 결점에 타자에게 노출될 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자기 평가 정서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보통 사람은 3살이 되면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가 되면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됩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영적 각성'의 통로가 됩니다. 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릅니다. 후회나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과대 망상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들을 향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말씀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수치감을 느끼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해로운 수치심'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건이나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학대, 무시, 거절 등)으로 인해 "나는 쓸모없고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거짓말이 아예 자신의 '정체성'으로 굳어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은 부끄럽다. 장애는 수치다. 이혼은 창피하다. 실패하면 끝이다." 세상이 주입한 이런 거짓된 기준에 묶여버리면,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평생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완벽주의자가 되거나, 세상으로 도피하여 중독에 빠지거나, 심하면 우울증과 분노로 자신과 타인을 파괴합니다. 어떤 경험을 통해 수치심이 내면화되어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낙인찍어 버리는 것을 병적 수치심, 파괴적인 수치심, 해로운 수치심, 내면화된 수치심, 신경증적 수치심, 핵심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수치심이 내재된 사람에게 양육을 받아 수치심을 학습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사람과 똑같아집니다. 어릴 적 양육자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누군가에게 학대를 받게 되면 그 상처와 충격으로 인해 참 자기에 대한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 어떤 상황과 감정을 배재하고 수치심의 경험만이 내재화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이 드는 기억들이 내면화되어 악순환으로 작용합니다. 수치적 경험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나쁜 사람이며 부적절하고 흠이 많고 무가치하며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상대방을 희생시킵니다. 수치를 방어하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자기 경멸을 합니다. 완벽주의자가 됩니다. 자기 소외와 고립을 만들어 세상으로 도피합니다. 중독의 중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심하면 분노 장애, 우울증, 인격 장애, 감정 장애, 불안, 강박 신경증, 정신 분열증, 약물 남용, 편집증에 사로잡힙니다. 수치와 오욕스런 경험들을 혼자만 간직하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자신이 만들어 낸 가면 뒤에 숨기도 하며 체면을 중시하며 역설적으로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내면은 항상 공허하고 수치심의 노예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존 브래드쇼는 그의 책 <수치심의 치유>에서 해로운 수치심을 악마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독한 수치심이라는 악마적 질병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창세기 3장에는 인류 최초로 이 파괴적인 수치심에 감염된 인간의 비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수치심의 원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 반역, (1-7)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이 끔찍한 수치심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세상의 심리학은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를 '관계의 단절이나 상처'라는 증상으로 잘 짚어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근본 원인을 말씀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과의 그 완벽했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까? 바로 우리의 '' 때문입니다.

 

본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2:25).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신뢰 관계가 그들을 옷처럼 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1절에서 뱀이 등장합니다. 뱀의 유혹을 가만히 살펴보면, 단순한 감정 자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뒤틀어 관계를 깨뜨리는 치밀한 영적 논리입니다.

첫째,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합니다.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을 마치 지나치게 통제하고 인색한 분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둘째, 4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죄가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아예 지워버립니다.

셋째, 5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까 하노라.”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내 자유를 빼앗고 나를 억압하는 경쟁자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죄는 단지 윤리 규칙 몇 개를 어기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이제부터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치명적인 영적 반역입니다.

 

결국 6절에서 여자는 그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줍니다. 그리고 7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지혜로워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자 찾아온, 병들고 왜곡된 자의식입니다. 하나님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눈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평가하고 남과 비교하는 차가운 눈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자신의 벌거벗음이 너무나 끔찍해서, 늘 가리고, 꾸미고, 증명해야만 하는 수치심의 겨울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치심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마인드 컨트롤로 덮을 수 없습니다. 그 뿌리인 '하나님 앞에서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수치심은 평생 우리를 옭아맵니다.

 

2. 수치심의 결과: 가리기, 숨기, 그리고 책임 전가 (7-13)

죄로 인한 파괴적인 수치심은 우리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심리학이 말하는 세 가지 방어기제가 창세기 3장에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가리기: 무화과 잎 (완벽주의와 자기 의)

7절을 보면,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삼습니다. 죄를 지은 직후 인간이 한 첫 행동은 회개가 아니라 가리기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고안해 낸 최초의 종교이자 자기 구원 방식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엮습니다. 어떤 이는 돈과 스펙을 엮고, 어떤 이는 종교적인 열심의 잎사귀를 엮습니다. 하지만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해가 뜨면 금방 바스러집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2) 숨기: 동산 나무 사이 (회피와 도망)

두 번째 방어는 숨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피합니다. 내면의 수치심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진실한 관계를 피하고, 각자만의 나무 사이로 숨어버립니다. 과도한 업무의 나무, 넷플릭스와 유튜브라는 나무, 알코올이나 도박 같은 중독의 나무 뒤로 숨어 진짜 나를 감추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3) 책임 전가: 남 탓 (자기 방어, 방어적 뻔뻔함)

가장 파괴적인 세 번째 결과는 타인을 향한 비난입니다.

숨어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네가 내가 명한 그 열매를 먹었느냐?"(11) 물으십니다. 이 순간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위기가 닥치자 아담은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를 방패막이로 냅다 던져버립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주셔서"라며 하나님께 원망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저 여자를 안 줬으면 나 죄 안 지었어요!"라는 무서운 뻔뻔함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요즘 사람들은 너무 뻔뻔해서 문제 아닙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뻔뻔해진 줄 아십니까? 용서가 없는 이 차가운 세상에서는,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곧 '사회적 사형 선고'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면의 파괴적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도리어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난 잘못 없어! 다 네 탓이야!"라며 뻔뻔함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우리를 가리고, 숨고, 남을 탓하게 만들어 철저한 고립으로 이끕니다.

 

3.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하는 십자가의 은혜 (14-2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수치심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치유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수치심을 박살 내는지 세 가지 치유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타인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심리학은 수치심을 치유하려면 나의 찌질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완벽한 공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파괴적인 수치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공감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 끔찍하고 추악한 밑바닥을 100% 다 보여주었을 때, 도망가지 않고 완벽하게 공감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인간의 공감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선하게 목회한 목사님도 수치스런 한 사건이 들어나면 그때부터는 그 목사님을 오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렇게 활발하게 부흥회도 다니던 목사님이 이제 아무도 그를 부흥회에 초대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의 책도 쓰레기 통에 버려버립니다. 일어난 사건과 그 사람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시켜 주시시 위해 수치스러운 '경험''자신(정체성)'을 분리시켜 대합니다. 타인의 혐오스러운 시선이 두려워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입었습니다. 무화과 잎은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세상의 시선이자, 자기 평가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 수치스러운 반역자들아!" 하며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15절의 주어를 보십시오. "내가 원수가 되게 하리니!"

하나님은 수치심에 빠져 숨고, 가리고, 변명하기 바쁜 인간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사탄과 인간 사이의 그 저주받은 결속을 끊어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담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단지 말로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뒤편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이 엮은 알량한 잎사귀를 벗겨내시고, 친히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이 가죽옷이 무엇입니까? 장차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수치를 덮어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겉옷입니다!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나는 비록 넘어졌고 수치스러운 경험(가난, 이혼, 실패, 학대)이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로 만든 가죽옷을 덮어주실 만큼, 나는 여전히 보배롭고 사랑받는 자녀다!" 이 십자가의 시선을 회복할 때 비로소 수치심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시선이나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수치를 보면 죄로 말미암은 수치심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죽옷을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죄로 말미암아 파괴적인 수치심의 노예가 된 한 여인이 나옵니다. 5명의 남자와 살았던 이 여인은 수치의 경험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치 경험을 곧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려 자신의 수치가 자기의 정체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들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수치스런 사람이라고 낙인찍어 버린 여인입니다. 수치심으로 사람들이 많은 때에는 물길러 나오지도 못하고 사람이 없는 한 낮에 우물가에 나와야만 하는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수치심의 노예로부터 완전하게 해결해 주시기 위해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물에 앉아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을 요구합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줄 수 있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7:35), 거라사 귀신들린 자(5:1-20), 혈루증 앓은 여인(8:43), 세리 마태, 세리장 삭게오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어,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야, 나는 외모가 내 놓을 것이 없어, 나는 이혼한 사람이야, 나는 누구 앞에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가진 사람이야" 등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마치 자신인 것으로 가슴에 앉고 수치심의 노예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장사의 아들이었고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인 수치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과거 형과 아버지를 사기를 친 수치스런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러운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과거 살인이라는 수치스러운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러운 민족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세리라는 수치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에스더는 어릴 때 부모를 다 잃어버린 수치스러운 가족 경험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입다는 첩의 아들로 태어난 수치스러운 태생 경험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들을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했습니다. 38년 된 병자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다 하여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참으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남의 평가를 들으며 스스로 수치스런 경험으로 인해 수치스런 존재라고 낙인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16: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고립과 숨김에서 나와 수치스러운 경험을 '예수님께'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결국 누구를 통해 죄로부터 파생된 인간의 파괴적인 수치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머리를 짓밟을 구원자를 약속하시는데, 그분이 바로 '여자의 후손', 곧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십자가에서 물어뜯겠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밟아 박살 내버릴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높아지기 위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죄가 드러나자 나무 뒤로 비겁하게 숨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아지셔서, 우리가 숨어 떨던 그 저주의 자리십자가 나무에 친히 달리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수치가 드러나자 잎사귀로 자기 몸을 가리기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위에서 발가벗겨진 채 온 세상 앞에 철저히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왜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그 끔찍한 수치를 감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와 수치를 친히 짊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알량하게 엮어 입은 위선의 잎사귀를 찢어버리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만든 영원한 의의 겉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와 수치는 그리스도께 넘어갔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슴 벅찬 복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12:2) 주님은 우리의 수치를 덮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참아내셨습니다. 사람에게 내 수치를 털어놓으면 올무가 될 수 있지만, 십자가의 주님께 다 내어놓으면 완벽하게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치유해 주십니다. 수치심을 은폐하고 핑계 댈 것이 아니라, 수치를 개의치 않으신 주님 앞으로 걸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수치심의 노예에서 해방받지 못한 여인도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수치심으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발생한 수치심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완전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죄로 말미암은 수치심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정치인도, 사업가도, 연예인도, 학자도 어느날 수치가 드러나면 자살로 인생을 끝내 버리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고 수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수치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도 그의 가족은 평생 수치를 안고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수치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하나님께 나오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43:25)"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타인의 범죄의 대상 또는 희생물이 된 결과로 생기게 된 수치심도 주님 앞에 나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해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수치심이 생기면 견디지 못하여 자살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완벽주의 자들이 되고,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교만으로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자기 의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벌거벗겨져 나무 위에 못 박혀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진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힘없이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했다고 조롱합니다. 따르던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극악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형에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수치스러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011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31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옷입니다. 남편 5명을 두었던 수치스런 과거가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주라고 합니다.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수치로부터 완전히 해당되어 자기 살던 마을로 들어가 주님을 증거합니다. 수치보다 크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지배하면 인생의 수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수치와 비교하면 우리가 당한 수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무리들에게 붙잡혀 못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간 마가였지만 그는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를 감당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수치스런 경험을 가진 베드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수치 문화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평생 살았습니다.

 

셋째, 수치심을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혹은 타인을 향한 분노라는 파괴적 에너지로 폭발시킵니다. 아담 역시 처음에는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파괴적인 에너지를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는 완전히 뒤바뀔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메시아)'을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박살 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들은 아담의 삶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방금 전까지 아내를 원망하며 관계를 파괴하던 아담이, 20절에 보면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 산 자의 어머니)'라고 지어줍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서로를 물어뜯던 파괴적 수치심이, 복음 안에서 새롭게 정립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잃은 절망에 빠져 우울증으로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생명의 어머니로 부르며, 메시아가 오실 통로로 쓰임 받는 '창조적 에너지''사명'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신문에 보면 한 운동선수는 감독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운동을 포기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수치심으로 의욕도 상실하게 하고, 회사도 그만두고, 가정도 포기하며, 꿈도 포기하고, 삶도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치심을 자신을 향해 파괴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유다는 수치심을 견디다 못하여 죽음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디나가 성폭행당했을 때 그의 형제들은 수치심을 외부적으로 세겜 족속을 죽임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근원적인 수치심을 치유 받은 사마리아 여인은 그 후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올바른 관계로 새롭게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수치심으로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자신과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수치심이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기피하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좋은 관계를 맺음을 막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그는 수치심은 기쁨이 오려고 할 때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완벽주의에 빠지게 하며, 감정을 무뎌지게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세상은 수치심을 권하는 사회입니다. 언론을 통해 세상은 끊임없이 수치심을 강요하는 곳입니다. "너는 원래 그래왔어, 네가 아는 것이 뭐 있다고, 네가 하는 것이 다 그렇지, 너는 00도 사람이잖아, 00대학 나온 것이 뭐 한다고, 아버지 직업은 뭔데, 장애인이 뭐 한다고" 등 질책하고 모멸감 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제 그 수치심을 자극하는 세상에 담대하게 뛰어듭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흠을 억지로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자신의 수치스런 조건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습니다. 동네로 담대히 들어가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합니다.

 

수치심을 파괴적으로 푸는 사람은 수치심의 안경을 쓰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수치심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가족도 만나길 싫어합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되면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스스로 움추러 듭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숨고 숨고 숨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으면 심하면 극단적 행동으로 파괴적 해결해 버립니다.

수치심의 노예로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에 대하여 바른 관계를 가집니다. 이제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며 숨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수치심 때문에 몰래 들고 가던 물동이를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안 것입니다. 용기 있는 결단을 합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새로운 사명으로 일어납니다.

어느날 살다 보면 누구나 수치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치가 수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여인은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평가하는 그들에게 담대히 나아갑니다. 수치적 경험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쓰임만 받으면 더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면 우리 주님 다 용서해 주십니다. 다윗 보십시오. 간음죄를 짓고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왕으로 얼마나 수치스런 일입니까? 그것 숨기고 살았으면 평생 수치심의 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위선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 앞에서 깨끗이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수치심 숨기고 붙들고 있다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다 고백하고 용서받고 새롭게 살아가면 됩니다. 자기 인생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나의 수치심을 제거해 주신 주님을 자랑하며 됩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수치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치가 수치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굳게 믿으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내 인생의 가장 깊은 수치심이, 도리어 상처받은 이웃을 살리고 복음을 자랑하는 사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수치심의 감옥을 부수고 영광스러운 사명자로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복음은 수치심을 없애기 위해 긍정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라는 얄팍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복음은 너의 그 모든 죄와 수치가 십자가에서 이미 완벽하게 처리되었으니, 이제 정직하게 내 앞으로 걸어 나와도 너는 결코 정죄받지 않는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장엄한 선언입니다.

 

혹시 오늘도 앙상한 무화과 잎을 엮으며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증명하려 애쓰고 계십니까?

혹시 나무 사이에 숨어 사람들을 피하고, 하나님을 피하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계십니까?

혹시 내 약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시를 세운 채 남을 비난하며 스스로를 방어하고 계십니까?

 

오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찾으셨던 그 애타는 음성으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아. 네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느냐?”

이 질문은 취조가 아닙니다. 두려워 떠는 자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기 위해, 피 묻은 가죽옷을 들고 다가오시는 아버지의 눈물 어린 부르심입니다.

 

이번 한 주, 이 사랑의 부르심에 이렇게 응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엮고 있는 무화과 잎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수치심을 안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더 나아가, 이번 주 마을 모임이나 믿음의 동역자 한 사람에게 용기 내어 고백해 보십시오. “사실 나는 요즘 이런 마음의 겨울을 지나고 있습니다. 수치심 때문에 여기에 숨어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수치심은 어둠 속에 감출 때 우리를 조종하지만, 복음의 빛 가운데로 들고나올 때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그때 우리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이렇게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임이 드러났는데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나는 결코 버림받지 않고 사랑받고 있구나!”

이 은혜의 역설을 뼛속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끊임없는 비교와 증명과 뻔뻔한 방어의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가치를 이미 다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약함을 가리기 위해 피곤하게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을 완전히 덮어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한 주간, 저와 우리 성도님 모두가 수치심의 감옥에서 담대히 걸어 나와, 사탄의 권세를 꺾으신 승리의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의 봄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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