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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1)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14433 추천수:1 218.147.218.173
2026-02-01 16:54:55

동행(1)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2:1-4

 인생은 흔히 '길'에 비유됩니다. 그런데 이 길의 특징은 결코 혼자 걸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부모님의 손을 잡으며 첫 동행을 시작합니다. 사 춘기가 되면 친구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걷고, 성인이 되면 사랑하는 배우자와 보 폭을 맞추며 인생의 험한 고개를 넘습니다. 누구와 동행하느냐는 곧 '어떤 인생이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 라타 동행하는 사람은 거인의 시야로 세상을 보고, 비관론자와 동행하는 사람은 늘 발밑의 웅덩이만 보며 한숨을 쉽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 한 자와 동행하면 함께 해를 입는 법입니다(잠 13:20).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지상의 동행자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모 님은 먼저 떠나시고, 친구는 멀어지며, 배우자조차 죽음이라는 강 앞에서 결국 우 리의 손을 놓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인간 의 이 지독한 고독을 꿰뚫어 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앞에서 걷지 마십시오. 내가 따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 뒤에서 걷지 마십시 오. 내가 이끌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내 곁에서 함께 걸으며 나의 친구가 되 어 주십시오." 카뮈의 이 말은 현대인의 간절한 갈망입니다. 나를 지배하려 드는 존재(앞)도 싫고, 나에게 짐을 지우는 존재(뒤)도 버겁습니다. 그저 내 보폭에 맞춰 곁에 서 줄 '진정 한 친구'를 원합니다. 그러나 카뮈는 끝내 그 완벽한 친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인간 은 아무리 사랑해도 상대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동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옆자리'의 결핍을 채우고도 남을 위대한 동행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75세의 나이에 인생의 가장 막막한 안개 속에 서 있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앞이 나 뒤가 아니라, 그의 '곁'에 서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 라함의 자손아"(이사야 41:8)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 니"(야고보서 2:23) 그리고 그 동행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 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15:15)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동행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 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부모가 자녀를 먼저 찾아 동행하듯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달신 난나 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안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젖어 살고 있을 때입니다. 인생의 결핍과 한계에 부딪혀 있을 때입니다. 사라가 임신하지 못할 때 입니다(창11:30). 고대 사회에서는 자식이 없는 것은 미래가 없고 가문이 끊기는 저주와 같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이제 내 인생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안주하던 하란의 자리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 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길을 잃고 있을 때 먼저 찾아와 손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1)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거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vealing God, 계시하는 하나 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보여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아브라함에게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음 가득한 아브 라함의 일상 속에 '말씀'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보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도록 계시 해 주시고, 나타내 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름없는 목자로 살 때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먼저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기드온이 미디안 적들 때문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은 "큰 용사여, 여호와 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찾아 오셨습니다. 영적 침묵의 시대에 하나님은 잠 든 사무엘을 세 번이나 먼저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불러 주었습니 다. 결혼생활에 실패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먼저 다가가 "물 좀 좀 주겠느 냐?"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 살기등등하게 길 을 가던 사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멀리서 지켜만 보 시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답답한 현실 속으로 먼저 말을 붙여오시는 분입니 다.
 
2) '떠남'이라는 모험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Calling God)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떠남'이라는 모험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은 당시 아브라함에게 '목숨줄'과 같은 안전장치였습니다. 그것을 떠나라는 것은 "이제 세상 이 주는 안전이 아니라, 나(하나님)를 너의 유일한 안전으로 삼지 않겠니?"라는 초 대입니다. 하나님이 안전지대라는 것입니다. 도망자 야곱에서 하나님은 꿈속에서 먼 저 찾아 오셔서 사닥다리 환상을 보여주시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윗은 고백합니다. 부모도, 장인도, 자식도, 권력도, 부도 자신의 안전지대는 아니었 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 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 요 나의 높은 망대시로다"(시편 18:2) 오늘날 우리의 진정한 안전지대는 예수님 안 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 이라"(로마서 8:1-2)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 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이 사실을 믿습니까?
 
3) '지도' 대신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이십니다.(Guiding God)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1절에서 목적지를 명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라"가 아니라 "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관계' 를 맺자는 제안입니다. 현대인들은 완벽한 기획안과 지도가 있어야 움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도를 주지 않으시고 대신 자신의 '손'을 내미십니다. "아브라함아, 지도는 필요 없다. 내 가 너의 지도가 되어줄게. 내 손만 잡고 가자."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도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걸어주시는 '다정한 가이드'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찾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거시고, 우리가 두려워 숨어 있을 때 모험의 자리로 부르시며, 앞날이 캄캄해 울고 있을 때 '내가 다 보여 줄 테니 내 손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175년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동 행은 '선택-인내-훈련-성취'의 과정으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우상 숭 배지에 있을 때 먼저 찾아오셨고(선택), 그가 애굽에서 비굴하게 넘어질 때도 보호 하셨으며(인내), 13년의 침묵과 시련을 통해 그를 다듬으셨고(훈련), 마침내 그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성취). 카뮈는 '내 곁에서 함께 걸어달라'고 외쳤지만, 정작 옆에 누군가 다가오면 내 자유 를 뺏길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뺏으러 오신 독재자 가 아니라, 우리의 좁은 감옥을 열어 진정한 자유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하러 오신 가장 신실한 동행자이십니다. 동행의 핵심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가느 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구글 지도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인 격적 나침반'을 주셨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가인처럼 여호와 앞을 떠나는 데 있습니 다. 요나처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가면 인생은 깊은 바다로 들 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찾아 오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은 주도권 상 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핸들을 쥐고 있을 때 가장 안전 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보폭을 맞추는 것이고,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방향을 틀거나 속도를 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람 들은 하나님이 '조언자'나 '후원자'가 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내 인생의 '운전기사'가 되는 것은 극도로 꺼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계획을 도와주시는 '조수'로 고용 하고 싶어 할 뿐, 내 계획 자체를 수정하시는 '동행자'로 모시기엔 너무나 자기애가 강합니다.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동행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은 평생 아브라함처럼, 에녹처럼, 노아처럼 하나님을 동행자로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 다.
 
2.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 이 될지라” 본문 2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잡으시며 건네신 '약속의 보증서'와 같습니 다. 1절에서 "떠나라"는 명령이 '동행의 조건'이었다면, 2절은 그 동행을 통해 하나 님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빚어가시는지를 보여주는 '동행의 목적지'입니다. 하나님 을 동행자로 삼으면 자유가 침해되고 간섭을 받고 손해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에 자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1) 초라한 과거를 끊고 '위대한 미래'를 설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The Grand Architect)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당시 아브라함은 75세의 노인이었고, 아내 사라는 불임 상태였습니다. 자식 하나 없는 노부부에게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선언입니 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상태'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 함의 마른 뿌리에서 거대한 숲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는 ' 희망 없는 죄인'일지 모르나,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를 통해 이루실 '거대 한 역사'를 이미 설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나의 초라함을 하나님의 위 대함으로 바꾸는 인생 역전의 시작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여 구 덩이에서 궁전으로 이동하여 총리가 되었습니다. 겁생이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어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흔들이는 갈대와 같은 시몬이 견고한 반석같은 게바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키는 초대 교회의 위대한 기둥(반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 게 빚어주십니다. 믿습니까?
 
2) 우리의 존재를 '명예롭게' 높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The Promoter of Honor).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인간은 누구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목적도 "우 리의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이름을 높이려 했던 그들은 결 국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동행하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직접 높여주 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야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면 내가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증인이 되셔서 내 존재의 가치를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 함은 고향을 떠나는 나그네였지만 하나님께서 영적 거인으로 세워주었습니다. 인격 적 명예, 역사적 위상, 영적 권위를 세워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 지를 구하려 할 때, 그 땅의 사람인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창세 기 23:6) 관계의 격을 높여 "하나님의 벗(Friend of God)으로 명예를 세워주었습니다. 소돔 과 고모라는 멸망시키려고 할 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세기 18:17)고 하셨습니다. 역사의 위상을 높여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상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만, 하나님이 높여주신 아브라함의 이름은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 지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통틀어 수십억 인구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 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역사 위에 영원히 새겨주셨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형제들도, 아버지도, 장인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자 골리앗을 넘어뜨려 주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왕을 세우러 왔을 때, 아버지는 다윗을 아예 후보군에 넣지도 않고 들판에 방치했 습니다.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조차 없던 초라한 목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 으로 세우신 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 게 만들어 주리라(사무엘하 7:9)." 오직 하나님과 동행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3) 소유의 복을 넘어 '존재의 복'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The Source of Blessing) "너는 복이 될지라" (개역개정: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훨씬 더 강렬합니다. "베헤예 베라카", 즉 "너는 복 자 체가 되어라!"라는 명령형입니다. 단순히 복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네가 가는 곳 마다 복이 따라가고, 네가 머무는 곳마다 저주가 물러가는 '복의 덩어리'가 되라는 뜻입니다. 복의 소비자가 아니라 복의 생산자가 된 것입니다. 그랄 지방에 갈 때 아브라함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이 혜택을 받은 것입니 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될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해주십니다(창 19:29).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됩니다. 갈라디아 서 3: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 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 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인류는 죄로 인해 아브라함의 복에서 멀어져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저주의 장벽을 십자가에서 허무심으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셨습 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 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갈라디아서 3:13-14) 이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 로 바뀌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너희가 그리 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서 3:7, 29) 자식 하나 없는 노인이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는 자기 가족만 겨우 부양하는 노인이 아니라, 온 인류가 그를 통해 복을 받는 '믿 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걸하는 신앙을 멈춰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 주 세요, 저것 주세요" 매뉴얼만 뒤지는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의 손을 잡고 걷는 '동행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면 우리 때문에 회사가 살아 나고, 우리가 가정에 들어가면 우리의 웃음 때문에 가정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 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복덩어리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카뮈는 친구가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그 곁에 서서 아브라함의 인생 전체를 '축복의 명작'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허덕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리고, 이웃을 부요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복'이 됩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과 보폭을 맞추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3.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 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본문 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해 선포하신 '영적 불가침 조약'과 같 습니다. 1절이 부르심이었고 2절이 존재의 변화였다면, 3절은 그 동행이 현실 속에 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호받고 확장되는지를 보여줍니다.
 
1) 나의 인생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The God of Identification)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 니..." 이 말씀은 전율이 돋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동행하시면서 단순히 옆 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대접을 곧 하나님의 대접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길을 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 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은 곧 나에게 잘하는 것이고, 이 아이 를 괴롭히는 것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분신' 이자 '대사'로 대우하시겠다는 '자기 동일시'의 선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당 신의 백성을 얼마나 자신과 똑같이 여기시며 그들의 편에서 싸우셨는지 보여주는 전율 돋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직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움 때문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합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였고, 아브라함의 비겁 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네가 잘못했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동행하며 그를 자신과 동일시하셨 던 하나님은 직접 바로의 꿈에 나타나 호통을 치시고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 다. 똑같은 실수를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범하는데도 하나님은 "네가 데려온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창 20: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창 20:7)라고 말씀하십니다. 비겁한 아브라함을 대신해 우주의 주권자가 직접 싸워주신 것입니다. 왜입니까? 아 브라함의 수치는 곧 하나님의 수치였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17, 20:3) 아브라함 의 체면이 곧 하나님의 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스가랴 2: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비난받고 공격받을 때, 그것을 마치 당신의 눈동자 가 찔리는 아픔으로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하나님은 멀리서 구경하 지 않으시고, 가장 예민한 통증을 함께 느끼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사울이 믿는 사람들을 핍박할 때 예수님은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 냐" (사도행전 9:4)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받는 고난을 자신이 받는 고난 으로 여기셨습니다. "왜 내 자녀들을 힘들게 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나를 때리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늘 보잘것없는 우리를 향해 "너는 나의 분신이다. 누가 너를 건드리면 나를 건드리는 것으로 간주 하겠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누군가 여 러분의 믿음을 비웃고 저주합니까? 직접 싸우려 하지 마십시오. 보복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그 싸움은 이미 하나님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갈 때, 그 아들을 건드리는 동네 불량배는 아버지를 상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홀로 살려 할 때는 우리가 우리 인생을 방어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 속에 숨게 됩니다. 하나님 과 동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 편이 되어 오 늘도 우리 곁에서 나란히 걷고 계십니다. 이 당당함으로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성 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악의 공격으로부터 '철저히 방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The Ultimate Protector)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아브라함이 가는 길에는 적대적인 부족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 스스로 칼을 갈아 무장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직접 '보이지 않 는 방패'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너를 지 킬 힘을 길러라"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맥을 쌓고, 통장 잔고를 늘리고, 세상적인 권력을 가져보려 애씁니다. 그것이 나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군대도 없었고, 성벽도 없었으며, 낯선 땅을 떠도는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 험악한 가나안 땅에서 살아남아 거부가 되고 민 족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는 큰 재앙을 내리셔서 그 가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창 12:17). 그랄 왕 아비멜렉의 꿈에는 직접 나타나 호통을 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데려온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창 20:3). 아브라함이 칼을 휘두른 것이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완벽한 경호원'이 되 셔서, 감히 아브라함의 권속을 건드리는 자들의 심장을 직접 압박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후, 아브라함은 혹시 모를 보복의 두려 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더 성벽을 높이 쌓아 라" 혹은 "용병을 더 고용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바로 네 방패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만 믿고 있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거나 공격당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함 때 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인맥이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권력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이라는 방패는 결코 뚫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저주하 는 입술을 하나님이 막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계획을 하나님이 흩으실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철저한 방어'가 주님과 동행하기 로 결단한 우리 성도님의 삶 위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를 넘어 '세상을 살리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The Missionary God)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동행하시는 최종 목적은 아브라함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정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 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 수레를 함께 밀 어주시고, 그의 방패가 되시며, 그의 명예를 높여주시는 이유는 단순히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거나 장수하게 하려는 '사적인 친절'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 할 때(창 18장), 그는 자기 안위만 챙기는 이기적 인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긍휼을 흘려보내는 ' 축복의 유통업자'였습니다. 비록 아브라함 자신은 당장 눈앞에 거대한 민족을 보지 못하고 나그네로 살다 죽었지만, 그가 하나님과 보폭을 맞춰 걸었던 그 평범한 순 종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온 인류를 살리는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복, 즉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 누 구를 통해 완성되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합니 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 이 땅에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 수레를 대신 끄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수레 위에 실린 우리의 죄와 저주의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운명 공동체'가 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운명 공동 체'가 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축복 의 통로를 통해, 이제 아브라함의 복은 유대인을 넘어 땅끝까지,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내가 너의 방 패가 되고 명예가 되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카뮈는 옆에서 함께 걸어줄 친구를 원하며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하지만 하 나님은 카뮈가 상상도 못 할 '특권적 동행'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이 놀라운 부르심 앞에 "예,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걷 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 위대한 부르심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겠습니까?” 그 답이 오늘 본문 4절에 나옵 니다. 우리 4절을 다 함께 소리 내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 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 라” 1, 2, 3절이 하나님이 건네신 거대한 사랑의 제안이었다면, 4절은 그 음성에 반응한 인간의 ‘거룩한 항복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1) 지도가 아닌 ‘음성’을 이정표 삼는 삶입니다 (Voice over Map)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삽니다. 어디를 가든 내비게이션이 있어야 하고, 맛집 하나를 가도 리뷰를 다 확인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미래가 불투명하면 불안해 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4절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눈에 보이는 목적지나 상세한 로드맵을 손에 쥐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지도'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동행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내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내일이 어떻게 될지 미리 알기 때문이 아닙 니다. 내일을 만드신 분의 음성을 오늘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은 모든 상황이 완벽히 정리되었거나 확신이 생겨서가 아닙니다. 그저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 '믿음직해서' 시작된 길입니다. 현대인들은 '데이터'를 믿고 움직이 지만, 성도는 '데이터'를 만드신 분의 '음성'을 믿고 움직입니다. 그것이 동행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까지 동행합니까? 모리아 산에서 독생자 이삭을 바치는데까지 동행 합니다. 카뮈는 "내 곁에 누가 오면 내 소중한 것을 뺏기지 않을까?" 두려워했지만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히 11:19)임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동행의 절정은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 브라함이 순종하며 걷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산 반대편에서 제물로 쓰일 양을 몰 고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를 체험한 것입니다. 2) ‘지금 여기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순종하였습니다 (Immediate Response) 4절은 “이에(So)”라는 짧은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 짧은 단어 속에 아브라함의 위 대한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재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가나안 땅의 부동산 시세는 어떻습니까? 거기 치안은 괜찮습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 님의 성품을 확인한 즉시 발을 뗐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카뮈를 떠올려 보십시오. 카뮈는 곁에서 함께 걸어줄 친구를 그 토록 갈망했지만, 막상 누군가 다가오면 내 삶의 주도권과 프라이버시가 침해될까 봐 주저했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이렇습니다. "함께하고는 싶지만, 내 마음대로는 하고 싶어."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압도적인 다정함과 위엄 앞에 자신의 주도권을 기쁘게 반납했습니다. 참된 동행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내 고집의 핸들을 놓고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내 계획보다 주님의 음성이 더 안 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즉각적인 항복'이 동행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끊임없이 동행합니다. 부모님, 친구, 배우자... 그러나 그 모든 동행은 유한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들이 우리 영혼의 깊은 어둠까지 함께해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우리 인생의 시끄러운 시장 통에 먼저 찾아오셔서(1절), 초라한 우리 이름을 별처럼 빛내겠다고 약속하시며(2절), 내 인생의 모든 총대를 메고 방패가 되어주시겠다고 선언하신(3절)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동행자가 되십니다. 75세의 노인 아브라함이 보따리를 싸서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단한 용 기나 강철 같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곁에 바짝 다가서서 "아브라 함아, 걱정 마라. 내가 네 복이 되어줄게. 내가 네 방패가 되어줄게"라고 속삭이시 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님들에게 동일한 손을 내미십니다. “사랑하 는 아들아, 딸아. 네 인생의 핸들을 혼자 쥐고 불안해하지 마라. 이제 그만 네 좁은 성벽(우르) 밖으로 나오렴. 내가 네 곁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네 인생을 내가 직접 축복의 명작으로 만들어주마. 나와 동행하자”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해 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세상의 계산기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손에 쥐십시오.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십시 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우리 성도님이 걷는 그 길에, 보이지 않는 전능자의 손 이 여러분의 어깨를 감싸고 계실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을 하느냐? 어디로 가느냐 가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동 행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고독한 생존 투쟁이 아니라, 창조주와 함께 걷는 영광스러운 모험입니다. 이 다정한 하나님과 함께,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삶의 여정을 당당하게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쓴 주보의 기도시를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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