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1) 새 힘
이사야 40:28-31
2026년 송구 영신 예배를 통해 올해 “광야의 길을 사막의 강을 보라”라는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렇게 광야의 길을 사막의 강을 보려면 세 가지를 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쇠사슬을 십자가의 은혜로 끊어버리자고 했습니다. 실패감도, 자만심도 십자가에 내려 놓고 더 이상 과거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상황이 아닌, 참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광야의 길을 사막의 강을 내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38년 병자가 예수님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새 일을 본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찬송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존자가 아니라 사명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책임지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어도 어떤 성도님은 그것은 성경의 이야기이고 현실을 너무도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새해가 되어도 여전히 빚더미는 줄어들지 않았고, 여전히 몸은 통증이 수시로 찾아오고, 인간관계는 꼬여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힘든 상황을 아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라는 회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1차적으로 받는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한때 영화로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무너졌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땅에서 포로가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그들이, 이제는 포로로 전락하여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포로 생활에 지쳐 낙심한 백성들을 향해 두 이름을 다 부르십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인 너희도, '존귀한 이스라엘'인 너희도 다 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실패해서 야곱처럼 보여도, 나는 너희를 여전히 언약 백성 이스라엘로 대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습관적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며와 이르기를’은 미완료형으로 한 번 툭 내뱉은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합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내 길은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길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완전히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상태로 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길)에 관심이 없다. 내 고통은 하나님 시야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송사는 벗어난다" 는 것입니다. 송사는 '나의 권리', '나의 정당한 사정', '나의 재판 건'을 의미합니다. 벗어난다는 말은 '그냥 지나쳐 가다(Pass over)'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의심, 하나니이 능력에 대한 의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는 힘도,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는 힘도, 정의를 행하는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진 상태에 즉 '번아웃(Burnout)'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속 깊은 패배감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영적 탈진과 절망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 포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말한 '학습된 무력감' 상태입니다. 무엇을 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영 성자라고 불리우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성공의 공식을 “성공 = 능력× 열정× 사고방식”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능력도, 열정도 없었고 태도는 –100 정도가 되었습니다. 힘이 있어야 경제적 문제도, 건강의 문제도, 관계의 문제도 풀 수 있는데 자신들도 힘이 없고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도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풀어 줄 근원적인 힘, 올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살게 하는 힘, 인간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새 힘은 누가 주십니까?
1. 새 힘은 누가 주십니까?
1) 영원하신 하나님
2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새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로는 올람 엘로헤이입니다. 올람은 영원도 되지만 숨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평선 너머의 시간, 인간의 인식이 닿지 않아 숨겨져 있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인간의 오해합니다. "하나님, 내 고통이 당신 눈에 숨겨져 있습니까?"(27)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너희의 눈에 숨겨져 있는 시간까지 다스리는 능력의 하나님이다."(28)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짧은 생각과 시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시간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은 내 인생이 망한 것 같고, 끝인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야가 짧기 때문입니다. 수평선 너머 '감추어진 시간'에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계획을 세워두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엘로헤이 올람'입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지하 감방은 사실은 왕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였습니다. 모세의 40년 광야는 실패한 왕자가 아니라, 훈련 중인 지도자였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엘로헤이 올람)'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시간까지 이미 다 보고 계셨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라고 말씀합니다.
직역하면 "이 땅의 가장자리(경계선)들을 만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중심부(예루살렘)만 만드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 미지의 영역인 '경계선'까지도 직접 설계하고 만드신 분이라는 선포입니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불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관할 구역이 아닌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서 신은 지역신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즉, 여호와는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의 신이지, 먼 이방 땅 바벨론은 여호와의 관할 구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구석까지는 하나님의 시선이 닿지 않아. 와이파이가 끊긴 것처럼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겨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도 내가 창조한 관할 구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서 있는 그 바벨론, 네가 느끼기에 세상의 끝자락 같은 그 비참한 현장도 내가 창조했고, 내가 다스리는 나의 땅이다. 너는 내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손바닥 안에 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너무 멀리 왔어, 내 인생은 벼랑 끝이야'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에게 '사각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너무 깊은 죄에 빠졌고, 너무 먼 실패의 자리에 와 있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입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다. 내가 닿지 못할 거리는 없다." 도망자 야곱에게 도망자의 길바닥도 하나님의 집(벧엘)이었습니다. 사업이 망해서, 혹은 관계가 깨져서 인생의 길바닥에 나앉아 나 홀로 밖에 없는 것같지만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물고기 뱃속의 요나 처럼 바다 밑바닥, 산의 뿌리까지도 하나님의 관할 구역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그 섬은 고립된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열리는 현장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차가운 광야가 땅 끝이었습니다. 요나에게는 깊은 바다 속이 땅 끝이었습니다. 요한에게는 외로운 밧모섬이 땅 끝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기가 끝이다, 내 길은 숨겨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광야는 벧엘이 되었고, 바다 속은 구원의 장소가 되었으며, 유배지는 천국의 계시가 임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체력과 지성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십니다.
‘피곤하지 않으시며(로 이아프)’에서 '이아프'는 격렬한 노동이나 달리기 후에 오는 급격한 체력 고갈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에너지의 총량'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력을 다해 우주를 창조하고 역사를 운행하셔도, 배터리가 방전되듯 힘이 빠지는 분이 아닙니다.
”곤비하지 않으시며 (로 이가)에서 '이가'는 오랜 시간 지속되는 고통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내면적 탈진(Burnout)을 뜻합니다. 지루함이나 권태로 인해 지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다가 지겨워하시거나, 긴 포로 생활을 돌보시다가 마음이 지쳐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는 말은 하나님이 탐구할 수 있는 바닥(한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똑똑하다'는 뜻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통찰력이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딜레마도 하나님께는 이미 해답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 이 세 가지 단어(피곤, 곤비, 명철)를 꺼내셨을까요? 그것은 27절에 담긴 백성들의 두 가지 오해를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은 무능력하다?"고 오해할 때 하나님은 "나는 지치지 않는다"라고 대답합니다. 백성들이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나는 피곤하지도 곤비하지도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가 바벨론의 신들처럼 늙거나 지쳐서 너희를 못 돕는 줄 아느냐? 나는 100년을 기다려도, 천 년을 일해도 힘이 줄어들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돕지 않는 것은 힘이 없어서(능력의 부재)가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은 무지하다?"라고 오해할 때 하나님은 "내 명철은 한이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백성들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복잡한 사정을 다 모른다. 내 꼬인 인생(길)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하나님도 모르셔서 방치하는 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각 능력이 부족한 존재'로 격하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나의 명철은 한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길이 숨겨졌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네 눈에 내 계획이 안 보일 뿐이지, 나는 너의 문제를 해결할 완벽한 시나리오(명철)를 가지고 있다. 나의 수는 바다보다 깊어서 네 작은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뿐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거나, 둘째,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방법(지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투덜거립니다. '하나님, 왜 안 도와주십니까? 힘이 빠지셨습니까?(피곤), 아니면 내 사정을 모르십니까?(숨겨짐)'
그 때 하나님은 정확하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체력이 무한하여 너를 구원할 힘이 차고 넘치며(피곤치 않음), 나는 명철이 무한하여 네 인생의 꼬인 실타래를 풀 완벽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당장 일하지 않으실까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보다 더 완벽한 '하나님의 때(Timing)'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을 잔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여리고는 난공 불락이고 홍해는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이 인간의 지혜보다 뛰어납니다.
마르다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욥에게는 해석되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말도 안 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생각(내 명철)'으로는 길이 안 보였다는 것입니다(27절).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28절)'은 죽음을 생명으로, 고난을 갑절의 축복으로, 견고한 성벽을 평지로 만들고 계셨습니다.
2) 능력을 주시고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무능한 자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에게가 아니라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자'에게가 아니라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홍해 앞에 막혀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를 이기는 힘을 주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하나님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해 미디안 연합군 13만 5천을 물리쳤습니다. 기드온은 병력이 부족해서 승리했습니다. 엘리야는 탈진했기에 천사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바울은 아팠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렀습니다.
지금 피곤합니까? 지금 무능하다고 느낍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자격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9-10) 지금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고, 지쳐 있다면, 오히려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성도님의 삶에 '더해지는' 기적의 타이밍입니다.
2. 새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인간의 한계를 인정: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이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소년은 젊음과 활력의 상징입니다. 장정은 힘과 강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인간의 의지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각종 결심을 합니다. '올해는 반드시 이것을 이루겠다.' '올해는 저것을 시작하겠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월의 열정이 2월에는 식어버리고, 3월이 되면 작심삼일이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 한계입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해도, 아무리 강하고 유능해도, 우리는 피곤하고 지칩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새 힘은 강해지려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2)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믿음
31절은 놀라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오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길만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라는 히브리어 '카와'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다린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이것은 간절히 바라보며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대를 하나님께 걸다는 뜻입니다. 방법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복음적으로 말하면, 행위가 아니라 은혜를 붙드는 태도입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만 바라보며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엄마를 바라봅니다. 엄마를 믿습니다.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기의 모든 필요를 채워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를 헤맬 때,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굴 속에서도 하나님을 '카바'했습니다. 시편에서 그는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Qavah)"라고 고백합니다.
새해에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큰 결단은 '더 열심히 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 단단히 묶이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것, 말씀에 나를 매는 것. 그것이 새 힘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습니까?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카와’는 어원적 의미는 '줄을 꼬다(to bind together)'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인 '카브(Qav)'는 '줄(line)', '끈(cord)', '측량줄'을 의미합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동사 '카와'는 원래 '무언가를 팽팽하게 당기다' 혹은 '여러 가닥을 꼬아서 하나로 묶다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습니다. 여러 가닥의 실을 꼬아서 튼튼한 밧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앙망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는 것'을 넘어 "나의 연약한 영혼을 강하신 하나님께 묶어버리는 것" 혹은 "나의 삶을 하나님과 꼬아서 하나가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나의 연약한 실오라기 같은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강한 밧줄에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의 무능함을 드리고 하나님의 유능함을 받는 것, 나의 조급함을 드리고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는 것, 나의 절망을 드리고 하나님의 소망을 가져오는 것. 이것이 바로 '앙망함'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이와같은 원리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은 유기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습니다. 나무 몸통과 세포와 조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카와'가 밧줄처럼 단단히 묶이는 기계적/물리적 결합의 이미지를 준다면, 포도나무 비유는 수액을 공급받는 생명적/유기적 결합의 이미지를 줍니다. 결국 둘 다 "나는 죽고(나의 힘을 포기하고), 주님과 하나 됨"을 뜻합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은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새 힘을 얻다'는 히브리어 원어로 직역하면 "힘을 교환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앙망(카와)하여 하나님과 묶이면, 나의 다 써버린 '방전된 힘'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힘'을 내가 가져오는 교환이 일어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자기 스스로 열매를 맺기 위해 용을 쓰지 않습니다. 그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뿌리에서 올라온 진액이 가지로 흘러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내 삶을 통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이사야의 '새 힘'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수액'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앙망함)은 곧 공급 파이프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외부(하나님/예수님)로부터 들어오는 에너지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여호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앙망하며)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새 힘'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원리'와 같습니다. 밧줄이 되기 위해 실을 꼬듯이(카와), 올 한 해 우리 성도님의 삶을 예수님께 묶으십시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진액을 빨아들이듯이, 예수님께 찰싹 붙어 있으십시오. 그때 나의 무능함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생명력이 내 안에서 '새 힘'이 되어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또한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새 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함께할 때 우리는 새 힘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새 힘의 비결입니다.
3. 새 힘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3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받으면 세 가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입니다(비상의 은혜, 시야의 변화).
새 힘을 받은 사람은 문제가 사라지지 않아도 관점이 바뀝니다.
독수리는 어떻게 날아오릅니까? 독수리는 자기 힘으로 날아오르지 않습니다. 참새는 자기 힘으로 날기 위해 파닥거리지만, 독수리는 '기류'를 탑니다. 독수리는 상승기류를 타고 날아오릅니다. 날개를 퍼덕거리지 않고도, 바람을 타고 높이 올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새 힘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안간힘을 쓰며 날개를 퍼덕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높이 올라갑니다. 내 노력으로 파닥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을 타고 고난의 산을 넘어가는 비상의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위기나 문제 앞에서 주시는 '초월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문제와 환경을 초월하여 올라갑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올라갑니다.
이것은 승리의 삶입니다. 환경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환경 위로 올라가는 삶입니다. 문제에 짓눌리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내려다보는 삶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에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삶입니다.
둘째,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습니다(돌파의 은혜, 사명의 지속).
새 힘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달음박질은 빠르고 역동적인 활동을 의미합니다. 급하게 해야 할 일,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시기가 있습니다. 일이 폭주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동시에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빠른 결정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받은 자는 곤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치지 않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주셔서 그 위기를 돌파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열정의 삶입니다.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삶입니다. 어려움 앞에서도 담대히 나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셋째,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습니다(일상의 은혜).
새 힘을 받은 사람은 평범한 하루를 견디는 은혜를 받습니다.
여기서 '걷는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매일매일의 평범한 일상, 반복되는 일들,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삶의 여정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은 '걷는' 시간입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극적인 순간보다, 달음박질하는 역동적인 시기보다,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평범한 일상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가끔 날아오를 수 있고, 한두 번 전력 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고, 출근하고, 아이를 키우고, 똑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그 평범한 일상. 많은 사람이 여기서 무너집니다. 우울증은 특별한 사건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에서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상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매일 같은 일, 반복되는 문제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이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받은 자는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은, 이 지루한 일상을 '사명'으로 바꾸어 줍니다.
이것은 인내의 삶입니다. 꾸준히 지속하는 삶입니다. 극적인 변화가 없어도,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도, 묵묵히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주목하십시오. 순서가 '날개 치며 올라가고, 달음박질하고, 걷는다'입니다. 가장 극적인 것에서 가장 평범한 것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순간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히려 일상에서의 성실함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2026년, 새 힘으로 시작하십시오. 우리의 상황은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경제는 어렵고, 몸은 아프고, 관계는 힘들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신앙마저 지치기 쉬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도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 길은 숨겨졌다"고 한탄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라. 너의 피곤한 손을 들어 하나님과 묶으라." “새 힘은 네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참된 '새 힘'을 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을 '앙망'하셨습니다. 그 죽음의 기다림 끝에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았고, 그 부활의 생명이 오늘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사야40장을 통해 '새 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강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쳐 있다면, 그것을 숨기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피곤합니다. 저는 무능합니다. 저에게 새 힘을 주소서.‘
둘째, 날마다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새 힘은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새롭게 공급됩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만나를 거둔 것처럼, 우리도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습니까? 매일 말씀을 읽으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십시오. 성도들과 교제하십시오. 섬기고 나누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새 힘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힘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그분을 날마다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새해의 약속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은 '새 힘의 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는 열정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인내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지난해 이루지 못한 것들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어려움으로 좌절하지 마십시오. 앞날이 막막하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전하면서 저 자신도 새롭게 도전받고 위로받습니다. 우리 모두 이 새해,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 힘을 받아, 날아오르고, 달려가고, 걸어가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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