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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질문(9)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27:4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55411 추천수:1 218.147.218.173
2025-12-21 14:07:55

예수님의 질문(9)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27:46

 

오늘은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아홉 번째 질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던진 질문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전능하신 예수님이 무지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십자가를 지실 것은 이미 세 번이나 말씀하신 예수님이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통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 보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네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를 떠올리십니까?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 정신의 뿌리가 형성된 시기인 '축의 시대(Axial Age)'를 이끈 네 명의 거인을 지목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들을 '세계 4대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에서 살다 죽은 사람은 약 1100억 쯤 된다고 하는데 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 4명을 위대한 성인이라고 꼽을까요?

야스퍼스는 1957년 출간한 <위대한 철학자들>이라는 책에서 이들은 기준을 세운 사람들(표준적 인물, 결정적 유형의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축의 시대 이전 (마법과 신화의 시대)에는 "비가 안 오면 신이 노한 것이다. 제물을 바치자."라고 했고, 우리 부족만 잘 살면 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본능과 관습이 지배하던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축의 시대 이후 (이성과 보편적 사랑의 시대)에는 자아의 발견이 이루어졌답니다. "나는 누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답니다. 보편적 윤리가 생겼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황금률)"는 생각이 등장했답니다. 내 가족, 내 부족을 넘어 '인류 전체'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가 생겼답니다. 맹목적인 믿음 대신, 이성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은 이 시대에 만들어진 종교와 철학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를 BC(기원전)AD(기원후)로 나눈 중요한 인물입니다. BC (Before Christ)는 예수(그리스도) 이전이라는 뜻입니다. AD (Anno Domini)주님의 해’ (In the year of the Lord)라는 뜻입니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는 인류에게 ''을 가르쳐 준 위대한 스승이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 그 자체'라고 선언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했는가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무지의 자각)."라며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며 도를 갈망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후, 사람들에게 "내가 깨달은 법을 보라"고 하며 해탈의 길을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칭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8: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네 분의 마지막 순간을 비교해 보면, 아주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독배를 마시면서도 제자들에게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라며 아주 담담하게, 철학적 토론을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제자들에게 "자등명 법등명(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공자 역시 73세에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꺾어지려나"라는 탄식을 남기며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세 분의 죽음은 모두 '평온'했고,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깨달음을 주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십자가라는 참혹한 형틀 위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인(聖人)이라면 초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를 깨달은 자라면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님만 이토록 처절하게 절규하셨을까요? 바로 이 지점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비명'이야말로 '베들레헴의 아기'가 태어난 진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절규가 없었다면 성탄은 그저 낭만적인 생일 파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 성탄절은 '죽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생애가 시작된 날입니다.

세상의 성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왔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공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고, 석가는 욕망을 비우는 삶을 제시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삶의 매뉴얼을 주었고 제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마침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시편 221절의 말씀은 그것을 예고한 예언이었습니다. 구유는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향해 놓인 첫 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처음부터 죽음을 향해 조준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고대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대신 지불하는 몸값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가르침을 전하는 교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값을 지불하러 오신 지불자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부터 다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지어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여기서 구원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법은 분명히 말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죄의 문제는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고 훈련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결단으로 상쇄되지 않습니다. 죄는 반드시 생명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함께 몰약을 가져옵니다.

몰약은 기쁨의 선물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장례용품입니다. '몰약(Myrrh)'은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입니다. 세상 어느 축하객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수의(壽衣)를 선물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예언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구유는 십자가의 무덤으로 가는 직행열차의 출발역이었습니다. 구유는 이미 십자가를 향해 놓여 있었습니다. 성탄은 십자가 없는 탄생이 아니라, 십자가를 품은 탄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에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더 착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 대신 죽기 위해 오신 구속주이십니다.” 3대 성인들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기억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제정하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이유는, 그분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이런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221절을 통해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지인 '대속의 죽음'이라는 자리에 정확히 도착했음을 알리는, 역설적인 승리의 선언입니다. 인생의 죽음의 문제에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이 사실을 믿습니까? 성탄을 축하하며 죽음의 노예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2.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저주 속으로' 들어오신 날입니다.

철학자들과 타 종교의 성인들은 고통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기에, 명상과 고행을 통해 고통을 초월하려 했습니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육체(Soma)를 영혼의 무덤(Sema)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거추장스러운 육체를 벗어나 순수한 이성(영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의 해방으로 여겼습니다.

석가모니 역시 육체가 겪는 고통(생로병사)을 번뇌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육체적 욕망과 집착을 끊어내고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그들에게 육체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거나 '벗어나야 할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정반대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선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은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고통을 몸으로 겪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피 흘리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9:22). 그래서 하나님은 찔릴 수 있는 살과, 흘릴 수 있는 피를 가진 연약한 아기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외침,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엄살이 아닙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의 관계였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가, 우리의 죄 때문에 끊어지는 끔찍한 단절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저 하늘에서 "힘내라" 응원하는 신이 아니라, 우리 죄가 만드는 지옥의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그 버림받음을 친히 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긴 침묵>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심판의 날에 수많은 사람이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 여자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 지옥같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냐는 것입니다. 어느 흑인 남자는 목에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매 맞고 고통을 당할 때 어디 계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과 배고픔과 전쟁과 질병이 없는 저 높은 천국에 홀로 계시니 자신들의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 고통, 절망, 죽음을 당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 대표, 흑인 대표, 관절염 환자 대표, 암 환자 대표, 기형아 대표, 심지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휴유증 환자 대표를 선출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할 자격을 가지시기 전에 하나님도 우리가 겪은 고통을 한번 맛보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되 고난을 많이 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하나님은 왕족이나, 귀족의 집안이 아니라, 농촌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사생아 비슷하게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고생하며 땀 흘리며 노동을 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도 친한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아픔도 겪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공정치 못한 재판관을 만나 억울한 판결을 받아보며, 우리처럼 매 맞고, 고문의 고통도 겪어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도 우리처럼 죽음의 외로움과 두려움도 맛보아야만 할 것이다.” 원망과 불평으로 입이 불거진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신들처럼 고통과 아픔, 배고픔, 환란, 절망을 맛보아야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긴 침묵 속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으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 비젤은 나치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던 시대의 한 중간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가 강제수용소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에 발전소가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유대인 세 사람이 잡혀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졌답니다.

두 어른은 금방 죽었지만 가벼운 한 소년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30분 이상 몸부림쳤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때 비젤 박사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릴 들었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바로 여기에 있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바동거리고 있지.’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채찍에 맞으면 살점이 뜯겨나가고, 못이 박히면 신경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연약한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죽을 수 없습니다. 피를 흘릴 수도, 찢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흘릴 수 있는 피가 필요했고 찢어질 수 있는 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왜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고린도후서 521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절에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우리는 죄의 결과(정죄)뿐 아니라 죄의 지배력 자체에서 풀려났습니다.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로마서 6:18) 믿습니까?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로마서 6:22)라고 말씀합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량함으로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에베소서 1:7) 해방은 감정이 아니라 값을 치른 법적 해방입니다. 죄의 기록을 완전히 제거한 것입니다. 성탄절 죄짓는 성탄절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성탄은 '위대한 교환'이 성취된 날입니다.

왜 예수님이 버림받으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버림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위대한 법적 교환'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했던 것은 버림받고, 심판받고 사망선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다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은 의로움과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속물로 대가를 치룸으로 우리가 은혜로 이것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법적 교환입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버림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고린도후서 521절은 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이것입니다. 나의 음란과 거짓, 교만과 폭력이 예수님께 입혀졌고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생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죄 덩어리가 된 예수님을 법정적으로 심판하시고 버리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단절이 아니라, 대속자의 자리에서의 버리심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용서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사야 53:5)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우연히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시편 221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겪는 지옥의 고통을 표현하신 것이며, 단순한 엄살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심판을 실제로 감당하고 계셨음을 보여주며, 그 절대적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끝까지 신뢰의 끈을 놓지 않으신 순종의 기도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 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법적 교환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직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죄인을 대속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7:26-27)

 

제임스 몽고메리의 <성탄절 메시지>라는 책에 러시아 군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버지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의 친구여서 러시아 군대의 한 병영 내에서 급여 담담자로 임명했답니다. 그는 돈을 도박으로 사용했고, 정부의 돈을 탕진해 버렸답니다. 어느 날, 황제의 감사관이 곧 회계 장부를 검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장부를 펼쳐 들었습니다. 숫자를 하나하나 합산할수록 얼굴은 창백해졌습니다. 금고에는 거의 돈이 남아 있지 않았고, 장부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의 액수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 종이 맨 아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엄청난 빚을 누가 갚을 수 있는가?” 그리고는 권총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자정이 되면 생을 끝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밤, 그는 지친 몸으로 그만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때, 병영을 순시하던 황제가 불이 켜진 방을 발견하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황제는 상황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황제는 그를 깨워 체포하려던 순간 회계 장부 맨 아래에 적힌 그 질문을 보았답니다. “이 엄청난 빚을 누가 갚을 수 있는가?”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 질문 아래에 자신의 이름 니콜라스을 적었다고 합니다. 젊은 군인은 한밤중에 깨어났고,

장부에 적힌 그 이름을 보았을 때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 빚을황제가 대신 갚겠다는 뜻인가?” 다음 날, 부족한 액수가 모두 채워졌다고 합니다. 그 빚은 오직 황제만이 갚을 수 있었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죄의 빚, 누가 갚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노력, 선행, 종교적 열심으로도 갚을 수 없습니다. 오직 왕이신 예수님만이 갚으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의 장부를 예수님께 덮어씌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는 순간,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 장부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거절당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판받으셨기에, 우리는 무죄 선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은 성탄절을 화려한 조명과 파티로 즐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보며 전율해야 합니다. 그 작고 연약한 아기는, 장차 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절대 고독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인들은 삶을 가르쳤으나,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고통을 피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고통을 체휼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스스로 도달하라 했으나, 예수님은 친히 버림받음으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질문 끝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란다. 너를 결코 포기할 수 없어서, 내 아들을 버렸단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죄의 빚을 탕감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위해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덤으로 얻은 이 생명, 그저 나 하나 잘 사는 것에 낭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버림받으신 그 사랑에 압도되어, 이제는 나를 부르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성탄의 응답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으로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증거하는 복된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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