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예수님의 질문(6) 너희도 가려느냐?(요한복음6:6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3771 추천수:1 218.147.218.173
2025-11-30 13:19:47

예수님의 질문(6)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6:67

 

예수님의 질문(6)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6-69(핵심 구절: 67"너희도 가려느냐?")

 

제가 매주 마다 시 한 편씩을 주보 표제시로 올려 놓는데 오늘은 별은 추워도 하늘을 떠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 실어 놓았습니다.

낮에/보이지 않던 별이/찬바람 깊어지는 밤,//하늘/가장자리에서/서운함도 잊은 채 떠올라//서릿발 어둠을/가만히 가르고/미세하게 떨고 있습니다.//고독이/지붕 위에 길게/얼음장처럼 누운 시간,//별은/묵묵히/제빛을 지키며//얼어붙은/공기 틈 사이로/희미한 숨을 불어넣습니다//내 안의 소란이/밤의 고요를/흔드는 순간에도//별은/피하지 않고/더 깊은 침묵으로 서서//겨울밤/아무리 매서워도/오직 그 자리 하나를 지켜냅니다.”

요즈음을 너무 오염되어 밤하늘의 별을 보기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별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늘인 것처럼 세상에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있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리는 하나님 안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의 자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리 두 마리로 장정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이튼 날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라는 것입니다. 6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말씀합니다. 39-4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를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9절을 찾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고 풍요로운 삶이 펼쳐지니까 더욱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던 기적을 보여 주었는 데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떠났고(19:21-22), 가룟 유다는 탐욕 때문에 배신하고 떠났고(26:14-16),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고(딤후4:10), 아시아의 신자들은 고난이 두려워 떠났고(딤후1:15)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이 파선하여 떠났습니다(딤전1:19-20). 심지어 12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14:50).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집단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떠나는 장면입니다. 66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 대이탈의 진짜 이유: "이 사람은 우리가 원한 메시아가 아니다"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여기서 '많은 사람'은 원문으로 '대다수'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의 제자(마데테스)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2제자 외에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배우고 따르기로 작정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대규모 이탈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떠났습니까?

요한복음 6장의 맥락을 보면, 예수님은 방금 5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군중은 열광했고,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15).

그들이 따르고 원한 메시아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정치적 혁명가였습니다. 빈곤과 질병을 해결할 사회 개혁자였습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민족 영웅이었습니다. 따르면 복 받고 성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한 자신의 정체성은 전혀 달랐습니다.

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4-5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우리 성도님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믿고 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선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가 원하는 빵을 주는 왕이 아니라, 내 자신이 빵이 되는 구세주다. 나는 너희의 정치적 야망을 채우러 온 게 아니라, 너희의 영적 죽음 문제를 해결하러 왔다. 나는 왕관을 쓰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릴 메시아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6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어렵다는 말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문은 '스클레로스'인데 '딱딱한 거친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사람의 말에 쓰일 때 견디기 힘들다, 받아들이기 거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상식과 종교적 감정을 거스르는 '충격적이고 불쾌한(harsh)' 말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느냐(아쿠에인)’라는 말도 단순히 소리를 듣다는 말이 아니라 참고 들어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거북한 말을 끝까지 참고 들어줄 수 있겠느냐?", "누가 이런 끔찍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했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각과 달랐고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은 율법(레위기)이 엄격히 금지하는, 가장 혐오스러운 비유였습니다. 그들에게 이 말은 신성모독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먹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가진 종교적 열심, 도덕, 율법 준수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너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라는 전적인 무능력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왕을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죽임 당할 고기 덩어리(살과 피)'로서의 메시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원한 성공 신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따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 왕이 되어줄 줄 알았는데, 당신 살을 뜯어먹으라니요? 우리가 죄인이라 당신 생명 없이는 못 산다니요? 우리는 이런 모욕적이고 불쾌한 설교를 더 이상 참고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신정론입니다. 정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전능하다면 왜 세상은 이 모양입니까?" 전쟁, 기아, 질병, 불의... 메시아라면 이걸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해도 응답 없고, 악인은 잘 되고, 의인은 고난받는데 무슨 구세주입니까?

둘째, 배타성의 문제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게 너무 독선적 아닙니까?"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도 훌륭한 스승 아닙니까?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것 아닙니까? 21세기에 "오직 예수"는 시대착오적 독단 아닙니까?

셋째 합리성의 문제입니다.

"과학 시대에 기적을 어떻게 믿습니까?" 동정녀 탄생?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부활했다고요? 의학적으로 사망 확인된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물 위를 걸어요? 중력 법칙을 무시합니까?

넷째, 실존적 문제입니다.

"내 삶에 예수가 정말 필요한가?" 현대인은 예전보다 풍요롭습니다. 의학은 발전했고, 복지는 확대되었고, 교육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교회 안 다녀도 잘 살고 있는데요?" "착하게 살면 되지, 꼭 예수를 믿어야 하나요?" "종교 없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머리에 지식이 많아지면 이성중심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인지부조화가 생기고 어릴 때 교회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이런 이유를 대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자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66절을 보십시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동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떠나자 부모가 동조합니다. 여럿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군중심리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대규모 이탈이 가속화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대규모로 예수님을 떠났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2. 본질을 묻는 질문: "너희도 가려느냐?" (67)

6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대규모 이탈이 일어난 후, 그 소란스럽던 기적의 현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찬바람만 부는 빈 들판... 예수님은 남은 열두 명을 천천히 둘러보십니다. 그리고 아주 낮고, 그러나 깊은 목소리로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목소리에는 거절당한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자들의 진심을 믿고 싶은 간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홀로라도 십자가를 지겠다는 비장한 결단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그 복합적인 눈빛으로,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의 원문을 보면, '아니요'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원하다'는 단어는 자유의지를 전제합니다.

, "너희도 떠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정말 원한다면 떠날 자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첫째, 강요된 신앙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뇌나 강압으로 따르는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적으로, 실존적으로 납득하고 선택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남지 마라. 억지로 믿는 척하지 마라. 너희의 이성과 의지로 나를 선택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노예가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대상을 원하십니다.

 

둘째, 신앙의 본질을 재정립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확인하십니다.

이 질문은 핵심을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빵 때문이냐, 기적 때문이냐, 아니면 내가 정말 메시아이기 때문이냐?" "너희는 떡 때문에 남았느냐, 아니면 나라는 존재 때문에 남았느냐?"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떠나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고난이 닥쳐도... 그래도 너는 나를 따르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선물'은 원하지만 '예수 자체'는 원하지 않습니다.

축복은 원하지만 순종은 싫어합니다. 천국은 가고 싶지만 십자가는 싫어합니다. 기적은 경험하고 싶지만 헌신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나인가, 아니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인가?"

 

셋째, 관계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실존적 선택을 요구하기 위함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군중과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2년을 함께 지냈어도,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았어도, 그들 역시 떠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랑, 떠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관계를 추구하는 사랑.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회의가 든다고 해서 당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우리 성도님의 메시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길이 아니라면, 우리 성도님이 선택할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 성도님이 붙들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생명이 아니라면, 우리 성도님은 어디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종교 선택이 아닙니다. 실존의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예수님을 정말 메시아로 믿습니까?

부활이 과학적으로 설명 안 돼도 믿겠습니까? 왜 악인이 잘 되는지 이해 안 돼도 따르겠습니까? "오직 예수"가 독선적으로 느껴져도 고백하겠습니까? 다른 종교도 일리 있어 보여도 예수만을 주님으로 섬기겠습니까? 이것은 지적 동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을 거는 전인적 결단의 문제입니다.

 

3. 생명의 고백: 베드로의 대답 (68-69)

이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68-69절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나이다

우리가 어디로(Where) 가오리이까"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로(To Whom) 가오리이까"입니다.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진리는 장소가 아니라 인격(Person)이라는 것을요.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 떠나도 우리는 이 고백을 하며 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의 대답에는 세 가지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대안의 부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대안을 찾아본 베드로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주님, 솔직히 주님 말씀 다 이해되는 건 아닙니다. 의문도 많고, 어려운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갈 곳이 없습니다." 주님밖에 없다는 확신입니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무신론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리처드 도킨스은 "우주는 맹목적인 물리 법칙의 결과일 뿐, 목적도 의미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의미 없습니까? 사랑도, 정의도, 아름다움도 다 환상입니까? 죽음 후엔 허무” "없다." 그게 답입니까?

철학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훌륭한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알고 나면 절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연약한지 알게 되니까요. 철학은 문제를 진단하지만 치료하지 못합니다.

과학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는 대답 못 합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말하지만, 내 인생이 왜 의미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과학은 죽음을 연장할 수 있지만 죽음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다른 종교가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불교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줍니다. 하지만 죄 문제를 해결합니까? 죽음을 이깁니까?

이슬람은 절대자에 대한 복종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천국에 갈까?" 알라도 모릅니다.

힌두교는 윤회를 말합니다. 하지만 언제 이 굴레에서 벗어납니까? 다음 생에? 그다음 생에? 끝없이 반복됩니다.

인본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만든다."라고 말하면 아름답게 들립니다. 하지만 히틀러도 자기 의미를 만들었습니다.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까? 상대주의의 끝은 허무주의입니다.

베드로가 발견한 것은 예수님 외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둘째, 생명의 발견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비교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주목할 점은 베드로가 "영생의 방법"이나 "영생의 길"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실재입니다. 히브리서 4:12는 이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병든 마음과 육체를 치유합니다. 방황하는 인생에 방향을 줍니다. 죽음 너머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세 번이나 암에 걸렸지만 치유받은 한 선교사님이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었을 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편 118:17)”라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붙들고 3번의 말기 암에서 완치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떠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가르침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적 모범 정도가 아닙니다. 종교적 체험 정도가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다른 모든 종교 지도자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립니다. 나사로에게 "나오라" 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자연을 다스립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부처는 말했습니다. "내가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겠다"

공자는 말했습니다. "내가 도덕의 길을 가르치겠다"

무함마드는 말했습니다. "내가 알라의 계시를 전하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차이가 보입니까? 다른 이들은 길을 가리키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십니다. 다른 이들은 진리를 말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다른 이들은 생명의 방법을 가르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특합니다. 비교 불가능합니다.

부처가 죽으면 불교는 남습니다. 공자가 죽으면 유교는 남습니다. 무함마드가 죽으면 이슬람은 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으면 기독교는 끝납니다. ? 기독교는 가르침의 종교가 아니라 인격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4)

기독교의 진위는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면 예수는 메시아입니다. 부활이 거짓이면 기독교는 사기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셋째, 인격적 확신입니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나이다"

베드로는 마침내 핵심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 이것은 메시아 선언입니다. 단순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훌륭한 스승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신 분, 메시아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가장 고차원적 고백입니다. 단순히 선지자도, 위대한 스승도 아닌,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 된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믿고 알았나이다" 원문은 완료형입니다.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지속되는 확신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이 확신에 이르렀습니까?

2년간 예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기적을 봤습니다. 자연이 그분께 복종했습니다. 삶을 봤습니다. 죄 없는 유일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조건 없는, 변치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이긴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이 쌓여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이것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2년을 걸으며, 말씀을 들으며, 기적을 보며, 때로 실망하고 때로 감격하면서 점점 깊어진 확신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의심했습니다. 물 위를 걸다가 의심해서 빠졌습니다 (14:31). 베드로도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며 십자가를 막으려 했습니다 (16:22). 베드로도 결정적 순간에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세 번 부인했습니다 (26:74).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지만 연약합니다. 이것이 주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완벽한 확신이 없어도, 때로 의심해도, 실수해도, 여전히 예수님을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회의하는 당신에게: 예수는 정말 메시아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인지 의심하는 분이 계십니까? 과학적으로 설명 안 되는 것들이 걸립니까? "오직 예수"가 독선적으로 느껴집니까? 다른 종교도 좋아 보입니까? 신앙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교회가 깊이 실망스럽습니까?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집니까? "이제 그만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 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오만이거나 독선, 배타가 아닙니다. 원래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2+2=4입니다. 누가 "2+2=5도 존중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답합니까? "아니요, 틀렸습니다." 암 환자에게 의사가 "이 항암제가 유일한 치료법입니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오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 배타성은 오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나만이 길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오만이 아닙니다. 다른 길은 죽음으로 가기 때문에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적은 모순이 아닙니다. 전제가 다를 뿐입니다.

과학의 전제는 우주는 닫힌 시스템입니다. 자연법칙만 작동합니다.

기독교의 전제는 우주는 열린 시스템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기적은 가능합니다. 아니,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기적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입니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건입니다:

빈 무덤을 로마 군인들이 지키던 빈무덤이었습니다. 500명 이상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고전 15:6) 도망갔던 제자들이 갑자기 목숨 걸고 전도했습니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기에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예수는 실존 인물입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 요세푸스 등 비기독교 문헌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 부활 주장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됩니다. 1세기에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뭔가 일어났습니다. 구약 300개 이상의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에게 성취되었습니다. 처녀에게서 태어남 (이사야 7:14), 베들레헴 출생 (미가 5:2), 십자가 처형 방식 (시편 22십자가형이 발명되기 전 기록),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음 (시편 34:20), 옷을 제비 뽑음 (시편 22:18) 등 수많은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통계학적으로 한 사람이 이 모든 예언을 우연히 성취할 확률은 0에 불과합니다. 물론 기독교 이름으로 악도 행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지, 예수님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요? 진짜 문제는 죽음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잘 살고 있는데요?" , 잘 살 수 있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해결하시는 것은 삶의 편안함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모든 철학, 모든 종교, 모든 노력이 부딪히는 벽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돈으로 죽음을 막을 수 있습니까? 권력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지식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선행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결론: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은 억지로 붙들지 않으십니다. 떠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베드로처럼 한 번만 물어보십시오.

"나는 어디로 가는가?" 교회를 떠나면 어디로 갑니까? 신앙을 내려놓으면 무엇이 그 자리를 채웁니까? 예수님을 떠나면 누가 우리 성도님의 주인이 됩니까?

일입니까? 은퇴하면 끝입니다. 돈입니까? 죽을 때 가져갈 수 없습니다. 가족입니까? 그들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건강입니까? 언젠가 무너집니다. 자아실현입니까? 죽음 앞에서 무의미합니다. 베드로가 발견한 것처럼, 대안이 없습니다.

"그곳에 생명이 있는가?"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성도님이 가려는 그곳에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까? 일시적 쾌락은 있을 수 있습니다. 순간적 만족은 있을 수 있습니다. 표면적 평안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교회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 교회가 실망스러운 것,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사람이 실망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떠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회의하고 있다면 떠나기 전에 정직하게 질문하십시오. 증거를 살펴보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만약 흔들리고 있다면 다시 십자가를 보십시오. 빈 무덤을 보십시오. 그것이 메시아의 증거입니다. 만약 확신한다면 이 확신 위에 인생을 거십시오. 메시아를 따르는 것은 종교 생활이 아니라 전 인생의 헌신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 함께 대답합시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는 주께로 가겠나이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메시아이십니다."

 

194549, 나치 독일의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새벽 안개가 걷히지 않은 시각에 한 사람이 교수대로 끌려갑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였습니다.

그는 떠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안전한 교수직을 제안받았습니다. 친구들이 독일을 떠나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희도 가려느냐?'는 주님의 질문 앞에, 안전한 미국을 버리고 십자가가 있는 독일을 선택했습니다.

교수대로 향하던 날, 그는 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감옥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사야 53:5("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과 베드로전서 1:3("산 소망")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수용소 의사는 증언했습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처형대에 올랐고 처형대에서도 기도하였답니다. 그의 모습을 지쳐본 의사는 '나는 50년 동안 의사 생활을 했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였습니다. 이 말은 죽음이 '패배'''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만남(생명)의 시작임을 선포한 승리의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떡을 찾아온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떠났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발견한 본회퍼는, 베드로는, 그리고 오늘 우리는 고백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떠나도, 나는 십자가 곁에 남겠습니다. 그곳이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떠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생명의 길에 남으시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1.3.
SNS 공유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