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21:17
예수님의 질문(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본문 요한복음 21장 17절
서론: 한정된 시간, 선택된 사랑
우리 성도님 휴대폰 전화번호부에는 몇 명이 있습니까? 그중 새벽 2시에 전화해서 올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입니까? 뇌과학과 인류학의 연구에 따르면, 한 인간이 진정으로 깊은 유대감을 맺을 수 있는 관계의 한계는 분명하다고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는 이를 '150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가볍게라도 접촉하고 인지한 사람은 약 8-1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며 '아는 사람'으로 뇌에 저장할 수 있는 한계는 약 3,000명에서 5,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내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해 줄 '절친 그룹'은 15명 내외, 그리고 내가 무너졌을 때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켜줄 '핵심 그룹(Core Group)'은 고작 3~5명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과 에너지의 40%를 바로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쏟아붓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내 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떼어 누군가에게 우선적으로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놀랍게도,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계실 때는 이 '관계의 법칙'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만 명의 군중이 아니라, 12명의 제자에게 집중하셨고, 그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는 3명의 핵심 그룹에게 예수님의 가장 깊은 속내를 보이셨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순간에도, 겟세마네의 피 땀 흘리는 고뇌의 순간에도 주님 곁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 가운데 가장 많이 시간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참하게 배신했습니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자신의 본업인 갈릴리 어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런 배신을 당하면 우리 성도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패감에 젖어 옛 생활로 도망친 베드로를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다른 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오직 단 하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다시 세우십니다. 이 사랑의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됩니까?
1. 사랑은 관계를 재정립하는 '인식의 동력'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갈릴리 호수에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노라"(요 21:3). 이 말은 단순한 직업 복귀가 아닙니다.
"나는 끝났어. 나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니야. 나 같은 배신자가 무슨 제자야."
그는 스스로를 '실패자', '배신자', '자격 없는 자'로 낙인찍었습니다. 그의 영적 엔진은 죄책감으로 인해 완전히 꺼져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놓고 그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왜 배신했느냐?"(과거 추궁)나 "앞으로 잘할 거냐?"(미래 다짐)를 묻지 않으십니다. 현재의 관계, 즉 "너와 나 사이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의 인식을 뒤집어 놓습니다.
베드로의 생각: "나는 주님을 버린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 "너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제자이며,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그가 실패하기 전에도 실패를 예견하고 예수님은 미리 '중보'하실 정도로 사랑했습니다(누가복음 22:31-32)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너, 나 배신하면 안 돼!"라고 경고하거나 막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이후 다시 일어설 것을 믿고 미리 기도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패를 막는 데만 급급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질 것까지 아시고, 그 너머의 회복을 위해 미리 기도해 주시는 '안전망 같은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자살한 가룟 유다와 달리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가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천사를 통해 소식을 전할 때, 제자들 그룹 외에 '베드로'를 별도로 언급하셨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마가복음 16:7)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제자 그룹'에서 탈락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베드로, 너도 여전히 내 제자야"라고 콕 집어 초청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은 죄책감에 숨고 싶은 베드로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셨습니다.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 짧은 한마디가 베드로에게는 '너는 아직 내 사람이다'라는 강력한 소속감과 용서의 선포였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무기력해질 때가 있습니까? 예배가 짐처럼 느껴지십니까? 기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십니까? 그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관계 느슨해진 것입니다. 사랑해야 인간관계는 돈독해집니다. 사랑해야 만나고 싶고 같이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니까 칠년이 며칠같았다고 했습니다(창29:20). 야곱에게 7년의 노동이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이 재미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평생의 신앙생활이 지루한 의무가 아니라 설레는 동행이 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보십시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4장 / 누가복음 7장). 사랑이 없는 사람(유다)에게는: 향유를 붓는 시간이 '낭비'이고, '비효율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예배가 지루하고 아깝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여인)에게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이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면 계산기가 멈춥니다. 누군가는 주일 예배 1시간을 지루해하며 시계를 보지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집니다. 지루함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농도 문제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Doing)'가 아니라 '내가 주님과 어떤 관계냐(Being)'에 있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너의 실패가 너를 규정하지 않는다. 나와 맺은 사랑의 관계가 너를 규정한다." 이 사랑의 인식이 회복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존재(Being)'가 회복된 베드로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불과 얼마 전, 여종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예수님을 모른다며 도망쳤던 그 겁쟁이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한복판에 서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사자처럼 외쳤습니다. 칼과 창 앞에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당당히 맞섰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었습니까? 의지력 훈련을 했습니까? 자기계발서를 읽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실패자가 아니라 주님의 양을 맡은 목자다'라는 정체성의 회복이 그를 두려움 없는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랑을 두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할 때, 감히 주님과 똑같이 달릴 수 없다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도망자였던 그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확인되면, 사람은 이렇게 변합니다. 오늘 주님의 사랑을 확인한 우리 성도님의 삶도 베드로처럼,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담대한 인생으로 변할 줄 믿습니다.
2. 사랑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정서적 동력'입니다
본문의 대화 속에는 아주 세밀한 사랑의 배려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 물으실 때 사용하신 '사랑'은 신적이고 완전한 사랑인 '아가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감히 "네, 제가 아가페로 사랑합니다"라고 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배신을 알기에, 그는 그저 친구 간의 우정과 같은 사랑인 '필레오'로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좋아하고 의지하는(필레오)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단어를 바꾸십니다. "시몬아, 그러면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 베드로야. 네가 지금은 완전한 사랑으로 답할 수 없구나. 네 마음이 무너져 있구나. 그렇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그 작은 사랑, 그 '필레오'의 고백도 나는 충분하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심리학에서는 이를 '안전 기지(Secure Base)'라고 합니다. 나의 실패와 부끄러움까지도 있는 그대로 수용받는 경험을 할 때, 사람은 치유됩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꿰뚫어 보시면서도 품어주시는 주님의 그 압도적인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린 거룩한 반응입니다.
우리 성도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 저는 여전히 죄가 많고 부족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는 진심입니다." 이 솔직하고 작은 고백이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그 마음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이런 사랑의 치유는 베드로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기억하십니까? 갈멜산의 영적 전투 후 탈진하여 "나를 죽여달라"고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그에게, 하나님은 '일어나라, 기도하라'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지시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재우셨습니다. 말씀으로 훈계하기 전에, 지친 육체와 정서를 먼저 돌보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스킨십, 이것이 엘리야를 다시 호렙산으로 걷게 한 '정서적 동력'이었습니다. 사랑은 논리가 아니라, 따뜻한 밥 한 끼와 어루만짐 속에 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극심한 공포와 수치심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를 비난하는 군중들을 다 돌려보내시고, 단둘이 남았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죄를 안 지으면 용서해 줄게'가 아닙니다. 먼저 용서와 안전함(정죄하지 않음)을 주셨기에, 그녀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만들어준 '안전한 울타리'가 그녀를 거룩한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돈은 많았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외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도덕성을 검증하기 전에, 먼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며 그의 삶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자신을 더러운 죄인 취급하지 않고 친구로 대우해주신 그 파격적인 사랑 앞에서, 삭개오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무엇이 탐욕스러운 그를 변화시켰습니까? 바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예수님의 '접촉과 환대'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 부족한 사랑(필레오)조차 용납받은 베드로는 훗날 어떻게 변했을까요?
자신의 부족한 사랑(필레오)조차 있는 그대로 용납받은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혈기 왕성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연약함을 품어주는 '겸손한 위로자'로 변했습니다.
장담하던 자에서 '겸손을 옷 입은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과신했고,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 그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자신의 처참한 실패와 그것을 덮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는 뼈저린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큰소리치는 리더가 아니라, 은혜 없이는 설 수 없음을 아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정죄하는 자에서 '소망을 주는 자'로 변했습니다. 이전에 칼을 빼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자를 정도로 감정이 격하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산 후에는 그는 로마의 박해 아래 고통받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벧전 1:3)을 이야기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왜 믿음이 없느냐"고 다그치는 대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벧전 5:7)고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안전 기지'가 되어 주셨듯, 이제 베드로가 고난받는 성도들의 '정서적 안전 기지'가 되어준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완벽주의나 율법주의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실패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눈높이를 맞춰주셨던(아가페→필레오) 그 방식 그대로, 연약한 성도들을 기다려주고 품어주는 '어머니 같은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3. 사랑은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행동의 동력'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들으실 때마다 즉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사랑과 사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님이 "교회 일이 힘들다", "봉사가 지친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 없이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노동이지만, 사랑이 담긴 수고는 헌신이 됩니다.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를 보십시오. 밤잠을 못 자고 기저귀를 갈면서 "이건 내 의무야, 사명이야"라고 이를 악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몸이 부서져라 돌보는 것입니다. 사랑이 동력이 되면, 가장 힘든 일도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은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금 가장 소중한 '양 떼'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신뢰의 회복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 죄책감 속에 숨어 있지 말고, 다시 현장으로 가라. 다시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고, 가정에서 가족을 돌보고, 교회에서 영혼을 섬겨라."
결국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훗날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주님의 양을 먹였습니다. 그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평생을 이끄는 엔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인데, 서두에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선언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자리에는 예수님을 팔 유다도, 부인할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몇 시간 뒤 자신을 저주하며 부인할 그 베드로의 더러운 발을 묵묵히 씻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원수 같은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훗날 사역의 현장에서 힘들 때마다, 자신의 더러운 발을 만지시던 예수님의 그 따뜻한 손길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고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눅22:61) 그는 주님의 시선을 보고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이 시선은 노려보는 정죄의 눈빛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긴 사랑의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그 눈빛이 베드로의 양심을 깨웠고, 그를 회개(통곡)의 자리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말 백 마디보다 강력한 것은 진실한 눈빛입니다. 예수님의 그 눈빛은 '내가 너를 경고했지!'라는 비난이 아니었습니다. '시몬아,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네가 아파할 것을 생각하니 나도 아프구나'라는 공감의 눈빛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시선이 그를 울게 했고, 그 눈물은 그를 살리는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그 사랑의 눈빛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역에 불을 붙이는 기름같은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사랑을 받은 바울은 사랑이 강권하여 그 사역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고린도후서 5장 14절). 사명과 사역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되는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번아웃(Burn-out)이 와서 수십 번은 그만두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강권하다(compel)'라는 말은 '사로잡아 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을 움직인 것은 의무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를 꽉 붙잡고 있었기에, 그는 감옥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고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힘든 선교 여행을 하면서 '아, 지루하다. 언제 은퇴하나'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밀어주고 있었기에 그는 끝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연료가 되면 지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 의무'는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기에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여관비를 지불하며 돌보았습니다. 사랑은 '마음이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 지갑을 열게 하고, 내 시간을 쓰게 하고, 내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베드로가 그랬듯, 사랑만이 우리를 '안전한 구경꾼'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사역자'로 변화시킵니다.
다윗 왕에게 충성스러운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삼하 23장). 어느 날 다윗이 전쟁 중에 고향 베들레헴 우물물이 너무 마시고 싶어 혼잣말로 탄식했습니다. "누가 그 물을 내게 마시게 할꼬." 이것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왕을 뜨겁게 사랑했던 세 용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적진을 뚫고 목숨을 걸고 물을 떠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주군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까, 목숨을 걸고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 사랑하면, '이걸 꼭 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자원함으로 적진을 뚫고 달려가게 됩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은 후 베드로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더 이상 갈릴리 호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습니다. 유대인의 편견을 깨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고, 사마리아와 욥바를 다니며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다녔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고난을 대하는 그의 태도입니다. 과거의 베드로는 고난이 오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동력을 얻은 후 사도행전 5장의 베드로는 다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그는 억울해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적입니다.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 일하면, 작은 비난에도 상처받고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함으로 일하면, 고난조차도 '주님을 위해 내가 무언가 감당할 수 있다'는 영광으로 바뀝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요 21:18), 자신의 팔을 벌려 십자가 죽음까지 받아들였습니다.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온 삶을 던져 행동으로 그 사랑을 증명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뜨거운 사랑의 행동력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만이 우리를 다시 걷게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삶의 무게에 눌려 영적 침체를 겪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내가 실패한 것 같고, 더 이상 주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지금 주님이 우리의 인생 호숫가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물으십니다.
"____________(자신의 이름)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이 세상의 성공보다, 너의 실패감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앞에 베드로처럼 정직하게 반응하십시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멈춰버린 우리의 삶의 엔진은 다시 힘차게 돌아갈 것입니다. 사랑이 회복되면 사명은 짐이 아니라 영광이 됩니다. 우리 이 시간, 그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2.7.
열기 닫기
| 쪽지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