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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밝힘(3)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585 추천수:5 220.120.123.244
2020-02-16 04:06:06

빛 밝힘(3)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8-9

 

지난주 연세 많으신 권사님 심방을 갔는데 권사님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 남편이라”고 하시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아들 애지중지 열심히 기르지만, 대학 가면 4촌이 되고 장가가면 사돈의 8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늙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첫째 돈, 둘째 딸, 셋째 건강, 넷째 친구, 다섯째 찜질방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아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장가가는 순간 며느리 남편, 장모 사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늙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첫째 부인, 둘째 아내, 셋째 집사람, 넷째 와이프, 다섯째 애들 엄마라고 한다고 합니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오직 아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 들면 들수록 남편은 아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데 아내는 다르다고 합니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괜히 불편하고…. 늦게 들어오면 열 받고…. 나가 있으면 신경 쓰이고…. 누워 있으면 나가라고 하고 싶고…. 말 걸면 귀찮고…. 말 안 걸면 기분 나쁜 존재가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늙어서도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면 다니는 남편이 있었답니다. 친구인 의사가 그러면 실험을 해 보자고 내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친구인 의사와 짜고 병원에서 급사했다며 천을 씌워 놓고 아내에게 연락했답니다. 병원에 온 아내가 너무 서럽게 울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울자 안쓰럽고 미안해서 죽은 채 누워있던 남편이 천을 열고 “여보 나 안 죽었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가 천을 덮으며 “의사 말 들어. 의사가 죽었다면 죽은 거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우리 여자 성도님들 중에는 이런 아내가 한 사람도 없을 줄 압니다. 지난 주에도 90이 다 되신 권사님 부부가 행복하게 두 분이 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세드신 우리 교회 권사님들을 보면 남편에게 극진히 잘하시는 것을 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1.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십니까?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행하라(페리파테이테)’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성경은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앞에 ‘왜냐하면 ... 때문에’라는 접속사 ‘가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과 ‘이제는’이라는 말로 대조를 이루어 성도들의 존재 양식이 바뀐 것입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어둠과 빛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서(‘엔 퀴리오’)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 빛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에 참여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소망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둠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을 복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골1:12). 대통령이 되기 위해 대통령 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었으니 대통령 답게 사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쌍욕이나 하고, 바람피우며 자기 욕심만 채우고 살면 대통령 다운 것이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나라 왕이 아들을 어릴 때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들이 그리워 신하들과 함께 아들을 찾아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모인 거리에서 어떤 아이가 거지 춤을 추며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복을 입고 신하와 함께 구경하던 왕이 가만히 보니 얼굴 모습이 자신을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 아이를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목 뒤를 자세히 보니 점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제 왕자가 된 것입니다. 왕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거지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왕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자답게 살아서 왕자가 된 것이 아니라 왕자가 되었으니 왕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있으면 의사이고, 죄인을 재판하고 있으면 판사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정체성과 일치되어 가는 것입니다.

 

2. 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야 합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도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앞에 ‘왜냐하면 ... 때문에’라는 접속사 ‘가르’가 있습니다. 9절은 8절이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처럼 행하여야 할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기 때문에 당연히 빛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데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 모든 의로움, 모든 진실함에 있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빛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착함, 의로움, 진실함의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를 심으면 무화과 열매가 맺히고, 콩을 심으면 콩이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의 열매는 3절에 나와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무엇입니까?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입니다. 당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에베소는 착함보다는 악함이, 의로움 보다는 부패함이, 진실함보다는 거짓과 속임수와 가증스런 탐욕이 횡행하는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어둠의 세상은, 어둠의 자식들은 이 세 가지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죽은 자의 문화, 어둠의 문화는 휴머니즘을 내걸고 음란의 문화, 폭력의 문화, 허위의 문화가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건강하지 못합니다. 결국, 죽이고 죽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문화가 아닙니다. 오늘날 죽은 자들이 이끄는 영화나 연극, 문학, 드라마, 게임 등을 보십시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첫째, 빛의 자녀에게는 착한 열매가 맺힙니다.

착함(아가도쉬네)은 선함, 마음이 좋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고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악함의 반대말입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 이익을 취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선한이라는 것이 무엇이가를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눅23:34).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필요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사람입니다. 타인을 괴롭힘으로 쾌감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타인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빛의 사람들은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착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19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마스크 사재기를 합니다. 값을 올립니다. 제가 마스크를 사서 교회에 비치해 놓으라고 김목사님에게 부탁하니까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남의 불행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선한 열매가 아닙니다. 누군가 백신을 개발하면 아마 떼돈을 벌게 될 것입니다. 1952년은 미국 역사상 전염병이 가장 심각하게 발생한 해였답니다. 그해에 거의 58,000건의 소아마비가 보고되었고, 3,145명이 사망하였고, 21,269명이 마비되었답니다. 도시 지역의 시민들은 매해 여름 이 끔찍한 방문자에 대해 공포에 떨고 있었답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소아마비의 희생자 중 하나였습니다. 과학자들은 소아마비를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미칠 지경이었답니다. 그런데 1955년 4월 12일 소크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습니다. 그날은 거의 국가공휴일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회사들은 특허 양도를 위해 거금을 제시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나의 연구를 인도하였습니다. 저의 재능은 공익을 위해 쓰여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백신은 특허가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TV 인터뷰에서 누가 이 백신의 특허를 가졌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특허는 없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라고 단호하게 대답고 백신의 주인을 모든 사람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포기한 금액은 당시 돈으로 70억 달러였답니다. 당시 세계 부호가 바뀔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의사와 연구를 통한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 뭐하러 재물에 욕심을 내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빛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둘째, 빛의 자녀에게는 의로움의 열매가 맺힙니다.

‘의로움’ 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윤리적으로 공평하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4:24). 하나님과 관계에서 맺어지는 빛의 열매입니다. 반대는 불의입니다. 재판석에서 판사가 판결할 때 죄 없음을 선포하는 법률적 용어입니다. 이 의에는 절대적 의와 상대적 의가 있습니다. 절대적 의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이 의로움의 열매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기준이 믿음입니다. 양심도, 도덕도 법도, 상식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라고 말씀합니다.

상대적 의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때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호불호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익과 불이익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것이 정의롭게 공평하게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이 땅에 살면서 믿음을 기준으로,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 내게 유익을 주면 의로운 것이고 내게 불유익을 주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를 타면서 내가 끼어들면 양보해 주지 않는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나쁜 놈이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빛의 자녀에게는 진실함의 열매가 맺힙니다.

‘진실함’ 에 해당하는 ‘알레데이야’는 ‘거짓’ 의 반대 개념으로 ‘참된 것을 가리킵니다(4:25).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열매입니다. 양심에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속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신전의식 즉 하나님 앞에서 살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누가 있든, 없던,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진실하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단을 따르는 이단들은 거짓의 앞잡이입니다. 모략이라고 말하며 거짓을 밥 먹듯이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진실함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3. 빛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0절부터 14절까지 빛의 자녀로서 구체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 네 가지 동사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험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무엇이 주께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시험하라”는 말입니다. 시험하여 보라는 말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기 위해 해야 할 바를 탐구해 보라는 말입니다. 윤리적 결단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절히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무엇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삶의 목적과 동기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1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빛의 열매가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는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숯을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른 사이에 숯가루가 몸에 묻게 됩니다. 어두움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둠의 일에 관심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심리적 관심으로 부도덕을 즐기지 말고 마음과 상상으로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거대한 세속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속된 집단으로부터 왕따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 자리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두움의 일이란 어둠의 자식들이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은 엡5:3,4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라고 말씀합니다. 엡4:25-32에는 거짓, 분냄, 도적질, 악독, 노함, 훼방, 악의 등이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는 어둠의 일을 책망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증거를 방편으로 납득시켜라는 말입니다. 증거를 제시하여 수긍하고 따라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과 관계를 끊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둠의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일부 신앙인들은 교회 세습, 성추행, 물신 숭배, 정치 참여 등으로 오히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왜 참여하지 말고 책망해야 합니까? 12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도 “왜냐하면 ... 때문이다”라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서 몰래 행해지는 것들은 말하기 또한 부끄럽기 때문이다’이라는 말입니다. 위장하고, 포장하고, 변장하고 위선을 떨며 거짓으로 몰래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책망받는 모든 것들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다 숨겨졌던 것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왜냐하면(가르) 드러내는 것은 빛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넷째는 그러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잠자는 자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저녁에 잠자는 것을 말씀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할 때 잠자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하기 때문에 잠자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를 말합니다.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입이 있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살려면 먼저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당장 잠에서 깨어서,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빛이 되어야 세상을 따뜻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세상에 생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비추어주시어야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롭고 강력한 빛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나인성에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이 아들마저 죽어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일어납니다. 예수님 만나면 절망의 행렬이 소망의 행렬로 일어납니다. 38년 동안 질병 가운데 인생을 포기하던 사람도 일어나게 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슬픔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적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빛으로 어둠의 일을 드러내며 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지를 분별하면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우리는 삶의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텐붐 여사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코리텐붐 여사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가족들이 모두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부모님과 언니는 그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코리텐붐 여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코리텐붐 여사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코리텐붐 여사는 복음을 전하는데 가족을 죽인 독일에는 갈 수 없었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라고 했서 독일에 가서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서자 많은 사람이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여사는 심장이 멎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자기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가한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손에 여사의 사촌언니 벳시가 강간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답니다. 그 남자는 전쟁 당시 수많은 여자 포로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코리텐붐 여사는 꿈에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코리의 마음에 말씀하셨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아 죽이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주어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여사는 그 사람의 손을 잡았습니다. 코리여사의 믿음은 본래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가업으로 100년째 시계방을 운영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가족과 함께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렸고, 가게에서는 친절과 진실함으로 손님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어느 날, 어떤 부자가 너무나 비싼 시계를 현금으로 사겠다고 했답니다. 그 시계만 팔면 온 가족이 한동안은 고생을 안 하고 살 수 있는 비싼 시계였답니다. 시계 판매가 끝나고 그 부자가 말했답니다. “사실은 자신이 아끼던 시계를 가지고 다른 시계방에 갔었는데, 이 시계를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이곳에 와서 새 시계를 삽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때 아버지는 “혹시, 그 시계를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고장 난 시계를 받아든 아버지는 몇 군데 손을 보시더니 “선생님,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제 시계는 잘 작동하고 이 시계는 아주 좋은 시계입니다”라며 돌려주었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 그 시계방의 젊은 주인은 좋은 시계공입니다. 아직 조금 더 경험이 필요할 뿐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그 청년도 곧 뛰어난 시계수리공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답니다. 코리 아버지는 부자에게 받았던 시계 대금을 돌려주고 “구매하신 시계는 다시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코리는 화가 났답니다. 손님이 가고 나서 “왜, 그 비싼 시계를 돌려주셨어요?”라며 따졌답니다. 코리 아버지는 대답했답니다. “코리야, 돈은 하나님이 필요하면 언제나 우리에게 주실 수 있지 않겠니? 그러나 우리가 진실하게 손님을 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코리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사는 사람이다” 코리는 이 교훈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답니다. 빛으로 사는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2020년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발표’를 보았습니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3.9%가 되었습니다. 무종교인의 78.2%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49.8%가 윤리와 도덕 실천운동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답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19년 온라인 빅데이터 분석을 해 5가지 이슈를 발표했습니다.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순서적으로 신천지, 동성애, 전광훈, 명성교회, 목회자 성범죄 순이었답니다. 대중들에게 신뢰를 잃은 첫 번째 요인은 목회자 성폭력 사건이었답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이단 교주 정명석과 이재록, 목회자의 글루밍 성폭행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신뢰성이 크게 하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명성교회 문제 등 교회 세습이 교회에 대한 비판을 급격히 상승시켰다고 합니다. 셋째는 연일 거리에서 데모하고 있는 전 목사에 대하여 대중의 부정적 의견이 긍정보다 2배나 높았다고 합니다. 교회가 보수나 진보를 다 품지 못하고 이념의 덫에 빠지니까 진보적인 입자의 사람들이 교회를 74.6%나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긍정 23.2%보다 세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자신을 중도라고 하는 사람도 긍정 30.2%, 부정 64.2%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2배나 높다고 합니다. 보수 입장에 선 사람도 긍정과 부정은 43.7%대 51.8%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념 전쟁에 뛰어들면 사람들이 교회를 정치 집단으로 보기 때문에 복음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됩니다. 교회의 신뢰도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윤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다는 2-3% 소금만 있어도 정화하고 부패를 방지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선교 제 2 대국이 되었고, 성경을 가장 많이 발행하며 가장 많이 기도하고 가장 많이 예배드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빛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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