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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17 빌4: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387 추천수:5 220.120.123.244
2019-09-29 09:18:12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17)

빌4:1-3

 

신문에 보니까 결혼하지 15년 된 주부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아내가 아이들이 다 잠든 후에 연속극을 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스포츠 중계석"을 보자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하였답니다. 화가나 먹던 빈대떡을 집어던졌답니다. 그러자 부인은 "나를 무시했다"며 문밖으로 뛰쳐나가 아파트 아래로 뛰어 내렸답니다. 다툼은 부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 동료와 학교 아이들 나라와 나라 간의 다툼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다툼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투는 모습을 경험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느 곳에서나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다툼의 기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도 죄인인 인간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집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다툼을 잘 풀지 못하고 큰 아들을 작은아들을 쳐 죽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충만히 임한 초대 교회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구제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도 마가 문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인간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다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은 실명으로 그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유오디아는 ‘좋은 여행기 ‘순조로운 여행’ 이란뜻의 이름이고, ‘순두게’는 ‘행운’, ‘행복한 기회’란 뜻의 이름입니다. 이름의 뜻과 다르게 교회를 순조롭지 못하게 했습니다. 좋은 여행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행운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행복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바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힘썼던 여인들입니다.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던 여인들입니다. 충성도가 높았던 여인들입니다. 아마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다툼도 없습니다.

 

왜 다투었겠습니까?

우리는 왜 다투었는지 그 이유를 본문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를 심리학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욕구 충돌입니다. 욕구 충돌은 실제적인 이익과 관계해서 발생하는 충돌입니다. 가족 식구끼리 텔레비전을 보면서 남편은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아내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공연을 좋아합니다. 텔레비전은 한 대입니다. 수요는 셋인데 공급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가지고자 하는 사람은 셋인데 물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가치관의 차이에 의해서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삶의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아들은 노란 머리를 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노란 머리 보기 싫습니다. 가치관 차이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셋째는 감정의 충돌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면 감정이 충돌되어 싸웁니다.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고 시비하다가 살인까지 합니다.

 

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참으로 성령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구제를 하는데 홀로된 히브리파 유대인들만 더 많이 구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자기들만 우의정 좌의정을 시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같이 훌륭한 신앙인도 마가 문제로 다투고 한 때 다른 길로 갔습니다. 선교하다 마가가 힘들다고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와 같이 선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의 친척인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가치관의 차이로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른 길로 선교를 합니다.

 

다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토마스 고든은 "부모 역할 훈련"에서 욕구 대립에 의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 풀 수 없는 문제이면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풀 수 있는 문제이면 자신의 조건과 상대의 조건, 환경조건을 잘 조화하여야 서로가 충분히 수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욕구를 조절하고 가치관을 맞추고 감정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울의 치료책은 무엇입니까?

 

1. 다투며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싸움과 다툼의 당사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하고 권한다(파라칼레오)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에게만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불화하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화해를 권면하면서 한 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권고하고 권면하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편파적으로 다루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하고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3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툼의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서로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이나 욕구, 감정의 문제로 인한 모든 다툼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부는 일심 동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늘 같은 집에서 살며 밥을 같이 먹는 부부라도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갈들이 생기고 심지어 파경에 치닫기도 합니다.

황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면 어부만 좋아합니다. 두 사람이 싸우면 엉뚱한 제 3 자가 덕을 본다는 어부지리(漁夫之利)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새는 생각하기를 오늘 내일 비만 오지 않으면 바짝 말라 죽은 조개가 될 것이다 하였고, 조개는 조개대로 오늘 내일 입만 벌려 주지 않으면 죽은 황새가 될 것이다 생각하여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어부가 이 광경을 보고 황새와 조개를 한꺼번에 망태 속에 넣고 말았습니다. 신앙인이 싸우면 사탄만 좋아합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좋아합니다. 문명이나 국가의 몰락은 90%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인 요인에 이해 몰락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 문명의 흥망성쇠를 논하면서 21개의 문명관 중에서 19개의 문명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원인에 의해서 멸망했다고 지적합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철학교수 윌 듀런트는 역사적으로 내분이나 내전 없이 외침만으로 몰락한 제국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로마 역시 외부의 강적이 사라지자 내분으로 국력을 소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진시황은 북방 흉노족을 막기 위해 역사에 남을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어이없게도 내분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잔틴문명을 꽃피웠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세 겹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 주위에는 너비 18m 깊이 6m의 해자까지 설치했지만 십자군전쟁 때 내분이 일어나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나 백제도 내분으로 몰락했습니다. 고구려는 보장왕 당시 실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죽자 남생, 남건, 남산 세 아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남편의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라 남편도 아내도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비로서 부부는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한 장로님의 마음,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권사님의 마음, 설교하는 목사님의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교인들은 비로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수만큼 마음도 그렇게 많습니다. 힘 있는 사람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상대적이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만 바라보면 결국 갈등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같은 마음을 품으면 갈등은 해소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이미 우리가 빌립보서를 통해 보았습니다.

2장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까?

6-8절까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마음, 겸손한 마음입니다. 근본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자신을 비웠습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낮추셨습니다.

 

2. 다투는 사람을 만나면 돕고 도와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투고 있는 두 여인과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에게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첫 번째 부류의 교인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선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왜 교인끼리 싸우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도 인간이고 죄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인간의 한계인 생존 본능과 종족 번식의 욕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여당과 야당이 갈라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산다고 그렇게 자랑하던 목사님들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여야가 판이하게 달라져 다툼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망합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냐는 것입니다.

실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교회를 떠나 “가나안” 교인이 됩니다. “안나가”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편을 들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오디아 편에 어떤 사람들은 순두게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과대망상적 신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역지사지"나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등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든지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울 방도를 기가 막히게 찾아냅니다.

편가르기 사회에 능숙한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편가르기 참피언이 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하여 지나친 편가르기로 소모적인 아귀다툼을 합니다. 진영논리의 노예가 되면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입니다. 내가 노벨상 타면 위대한 것이고 남이 노벨상타면 로비입니다. 내가 해외 여행가면 여가선용이고 네가 해외여행 가면 과소비입니다. 남이 고향을 들추면 지역 감정이고 내가 고향 들추면 애향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차를 천천히 몰면 소심운전이고 내가 차를 천천히 몰면 안전운전입니다. 독속의 게가 되는 것입니다. 독에 게를 집어넣으면 한 마리 일 때는 충분히 기어 나올 수 있는데 여러 마리가 있으면 기어 나오는 게의 뒷다리를 다른 게가 물고늘어지니까 기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들끼리 무슨 일이 있어도 여전히 교회에 다니며 인간들 다 그렇치 하면 무덤덤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한다고 말합니다. 싸움 당사에게는 권하고 권한 바울은 그 싸움을 보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에게는 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한다(에로타오)’라는 말은 ‘간청한다, 탄원한다, 빌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도우라(쉴람바노)라는 것입니다.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로 번역된 ‘쉬쥐게’는 소 두 마리가 함께 쟁기나 마차를 끌면서 하나의 멍에 아래서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음식을 제공 한 자, 거처를 제공한 자, 서신을 대필한 동역자, 서신을 전달한 동역자, 수감 중에 돌보아 준 동역자,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준 동역자, 함께 옥에 갇힌 동역자, 선교에 동참한 동역자, 여러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을 보면서 정죄하거나 실망하하지 말고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빌립보 교회 전체로 보기도 하는데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런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바울처럼 무조건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도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공로를 높여주고 인격적으로 대해 줍니다. 그리고 다투는 여인들의 연약함을 돕고 도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는 너무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통해 자꾸 이익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싸우고 다투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돕고 도우려고 해 보십시오. 싸움과 다툼이 살아집니다.

싸우는 사람만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돕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남자가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여인을 만듭니다. 돕는 베필로 만들었습니다. 결혼도 이익을 보려고 결혼하니까 살면서 자꾸 다투고 싸웁니다. 사업도 이익만 보려고 하니까 자꾸 다투고 싸웁니다. 우리는 서로 돕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도울 힘을 길러 돕는 삶으로 살면 다투고 싸울일이 없습니다. 싸우지 않는 글레멘드와 바울의 동역자를 도우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섬기을 받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까?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3.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사는 한 가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싸우고 있고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함께 동역하고 있는 글레멘드도, 바울의 모든 동역자도 ‘생명책(비블로 조에스)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 성도 간에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신약에서 본절과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나오는 말인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0:15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 :27 에는 “무엇이든지…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확실히 구원받은 천국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없는 사람들은 이 땅이 전부이니까 탐욕을 채우기 위해 피나는 싸움과 다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무신론 단체는 "안심하세요. : 지옥은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즐기세요."라는 글귀를 적은 현수막을 내걸고 무신론 단체의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이들은 샌디에이고 이성주의연합(San Diego Coalition of Reason) 소속 회원들로서, 매주 토요일마다 도심 내에 부스를 설치한 후 무신론을 전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종교와 창조론의 가르침을 몰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싸울 것이고 사람들이 종교에서 멀어질 때 순전한 기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호킹은 "천국은 동화 속에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소와 질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듯 하나님의 존재가 가시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도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실제를 알 수 있습니다. 원인이 없이 결과가 있을 수 없고, 질량불변의 법칙이나 엔트로피 법칙은 진화론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빅뱅설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책상이 우연히 존재했다고 하면 비이성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보다 훨씬 정교하고 신비한 인간이나 우주가 우연히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사유의 결과나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다고 자기의 무신론을 주장할 뿐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내세가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의 관념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임을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가사상태를 경험한 임사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인 이븐 알렉산더 교수가 있습니다. 뇌와 의식의 작용에 관해 뛰어난 업적을 쌓은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입니다. 그가 유명 신경외과 의사로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인간으로서 사고와 감정을 통제하는 뇌 부위가 완전히 정지된 거의 죽은 상태였고 결국 동료 의사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생물학적 사망 판정을 내리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7일 째 되는 날,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단 하나의 사례가 된 자신만의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후 체험을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뇌기능 매핑 연구를 한 그는 의식이나 자유의지 혹은 비물질적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답니다. 지상에 있는 물질이 유일한 현실이고 나머지 모든 것들(생각, 의식, 관념, 감정, 영혼)은 그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즉, '의식'이라는 것은 뇌의 생화학적인 기능에 의해 발생하는 산물로 받아들였답니다. 임사체험도 극도의 스트레스 하에서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였답니다. 그러나 그가 임사체험을 해 보니까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부정해왔던 영혼, 신, 사후세계 등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은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아니라 '완전한 실제(Ultra-Real)'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육체나 뇌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1300여 명의 임사체험자를 조사한 미국의 종양학 전문의 제프리 롱 박사는 그의 저서 <죽음 그 후>에서 임사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식이 몸 밖으로 나오는 유체이탈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아갑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이나 철학에 나오는 존재론적 증명보다 더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동화의 세계, 종교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지옥이라는 말이 22번 나오는데 예수님이 14번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사기꾼이거나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해 주신 말씀의 주제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는 장소이지만 지옥, 음부, 하데스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지옥은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장소입니다. 희망이 없는 장소입니다. 토마스 부룩스는 "만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과 슬픔, 비참함과 불행을 한꺼번에 당한다 해도 그것은 지옥의 가장 가벼운 고통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옥은 끔찍한 곳입니다. 영원한 불 못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생명책에는 의인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69편 28절에는 의인만이 생명책에 기록될 수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권세를 믿고 그의 의를 덧입은 자만이 의인입니다(롬4 :24 . 25; 빌3:9) 빌립보서 3장 9절을 찾아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선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그가 믿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롬10:9.10; 고전12 : 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있다는 증거는 그의 믿음이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행함에 의해 증명되어야 합니다(약2:14-26), 주님께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심판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행함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마3:10; 7:19; 요16: 2-6).

열매가 다르면 나무 종류가 다르지만 같은 나무 중에는 병든 열매도 나오고 벌레 먹은 열매도 나오는 것입니다. 같은 나무에서 큰 열매도 나오고 작은 열매도 나오는 것입니다. 같은 나무에서 나오지만 상품 가치가 있는 열매도 나오고 상품 가치가 없는 열매도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은 다소 열매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사소한 문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지 말고 마지막은 천국에서 만나 함께 살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땅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존경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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