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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4) 희망의 장애물 넘기(고린도 후서 1:8-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992 추천수:9 112.168.96.71
2016-07-31 09:23:27

 

희망의 사다리(4) 희망의 장애물 넘기

고린도 후서 1:8-11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이민규 박사님이 쓰신 “내 인생을 결정짓는 긍정의 심리학”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마음 하나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진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태도가 어떠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법이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더라도 가진 것을 외면하고 부족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긍정 심리학의 대가인 마틴 셀리그만 박사는 어느 날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회사의 사장으로부터 유능한 세일즈맨을 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답니다. 그 회사는 매년 6만 명 정도의 지원자 중에서 신입사원 5천 명 정도를 채용한답니다. 그런데 신입사원 절반 이상이 1년 이내에 회사를 그만둡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나면 80%가 중도 탈락하기 때문에 매년 7천 500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 허비되었답니다. 그래서 조사해보니 성공한 직원들은 낙관적이었으며 실패하는 사람들은 비관적이었답니다. 보험가입의 권유를 거절당했을 때 실적을 많이 올리는 직원은 “이 사람은 너무 바빠”,“이 사람은 이미 다른 보험에 가입했지만, 부분보험일 거야”, 또는 “저녁식사 중에 전화를 걸었나 봐”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사람들은 “난 안 되나 봐","재주가 없나 봐”, "이러다간 밥값도 제대로 못하겠어"라는 식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답니다. 그는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을 입사한 지 1년이 되었을 때와 2년이 되었을 때의 보험 계약고를 비교해 보았답니다. 1년째 계약실적을 보니까 낙관적인 사원의 경우 3천 87달러인 반면, 비관적인 사원은 1천 962달러를 계약해서 낙관적인 사원들이 비관적인 사원에 비해 57%나 더 많은 계약실적을 올렸답니다. 입사 후 2년째에는 낙관적인 사원들이 그렇지 않은 사원에 비해 무려 638%나 더 많은 계약 실적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절망을 가지고 대하느냐 희망을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며 영원한 천국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매사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을 살 때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우리는 죽어도 영원한 천국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최악의 절망이라는 죽음도 희망으로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는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죽은 후에 질병도, 고통도, 갈등도, 차별도, 가난도, 증오도, 미움도, 비난도, 배신도, 시기도 없는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나는 의지할 것 없다”라고 하는 마음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예수 믿고 살아도 어떤 때는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공정하기를 바라지만 인간 세계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내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수단이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속에 희망의 불빛이 없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때문입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 때문입니다. "환난"이라는 말은 '매우 극심한 중압감', ‘눌리고 짓밟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은 환난이 극심해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탈진 상태를 말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환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살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런 상활이 계속되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자살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마음에 “사형선고”를 당하였다고 했습니다(9). 10절에 보십시오. “큰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한 고난을 경험해야 만 했습니다. 성도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고, 자객들을 심어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예배를 같이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희망이 절벽이신 분 혹시 계십니까? 공부하면서, 사업하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아도 별 수 없다고 절망하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남편과 아내를 대할 때, 자식을 대할 때 별짓 다 해봐도 안 된다고 늘 부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은 안계십니까?

 

바울은 희망이 절벽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제가 나타나면 먼저 내가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에는 일반적 기준이나 규칙에서 벗어난 발생형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물론 'Fact-Base 사고'를 근거로 해서 문제의 상황을 분석하여 원인을 제거하면 됩니다. 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목표형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원인분석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합니다. 분석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펼쳐나가면 됩니다. 생각을 수직 방향으로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는 것이 분석적 사고입니다. 생각을 수평적으로 넓혀가는 것이 창의적 사고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창의적 사고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용을 써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때 창조적 사고로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신앙적 사고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문제의 해결자를 나에서 하나님께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대전환입니다. 문제해결의 대전환입니다. 아무나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 극한 환난 가운데 바울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신호로 그 환난을 허용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왜 이런 환난을 허락했다고 말씀합니까?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를 의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절망 가운데 처하면 자꾸 너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절망적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훈련에 합격하려면 빨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의지하고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 아브라함, 한나, 모세, 다니엘, 히스기야, 다윗, 에스더 등 신앙의 위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어떤 절망적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탈출구가 있고 해답이 있습니다. 앞뒤좌우 다 닫혀있어도 하늘을 향한 문은 열려있습니다. 인간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희망입니다. 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공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공의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가장 힘든 절망의 문제인 죽음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 험한 고난을 당하셨지만 부활함으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환난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낙담한 상태에 있거나 환난 중에 있는 자를 격려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실제적으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위로입니까?(4-6)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위로입니다(4).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해 주시는 위로입니다(4).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입니다(6). 소망을 견고하게 하는 위로입니다(7)

본문에서 10회나 사용하며 강조하고 있는 위로는 단순한 동정(sympathy)이 아닙니다. 위로(comfort, “com 함께”“fort 힘”의 합성어)는 힘을 가진 사람이 돕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계셔서 걱정을 덜어 주고, 용기를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후원을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사야 41장 10절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 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오늘도 말씀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 하지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우리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찾아와 위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힘이 있다고 내 문제 내 스스로 다 해결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장담하고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다윗과 솔로몬은 위로자가 없다고 한탄하였습니다(시 69:20; 전 4:1) 왕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위로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을 녹여 주고 어루만져 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고 번민을 풀어줄 진정한 위로자가 없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 딸 다 죽고, 재산 다 잃어버리니까 아내까지도 욥을 버려 버립니다. 친구들이 고난당한 욥에게 왔지만 절망을 탈출시킬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욥 21:34)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절망을 탈출시킬 진정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절망가운데 처한 실패한 모세를 위로하며 희망의 사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소망 없는 아브라함을 위로하며 희망의 사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처한 사기꾼 야곱을 위로하며 희망의 사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역에 지쳐 탈진한 엘리야가 낙심하였을 때 위로하며 희망의 사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면 어떤 절망적 상황도 희망으로 바꾸어지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2.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미래가 없다”는 시간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고 단정해 버리기 때문에 희망을 접어 버립니다. 우리 부부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사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접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미래가 없다고 단정하니까 자살하는 것입니다. 취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3포세대 7포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방치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희망을 접어버립니까?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근거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과거와 지금의 현실의 보니 미래도 뻔하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고 절망적이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결정짓는 긍정의 심리학”에서 절망을 불러드리는 생각을 네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가 임의적 추론(arbitrary inference)입니다. 부정적인인 사람들은 늘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누가 웃으면 비웃는 다고 판단하거나 남들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멸시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잉 일반화(vergeneralization)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간고사 영어 과목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공부에 소질 없고, 능력이 없으며,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을 비약시킨다는 것입니다.

셋째,과잉극화(polarization)입니다. 자신의 장점이나 잠재력은 무시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나 결점은 과대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당위적 사고(should/must thinking)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완벽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는 자기가 인생과 시간의 주인이 되어 미래는 현실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사고입니다. 시간의 주인을 자신의 인생에서 퇴출시키는 사고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절망적 현실 앞에서면 기계적으로 절망적 미래를 예측하고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공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은혜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인간은 자비와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내 삶에 개입시켜 미래를 판단하면 믿는 사람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미래의 장애물을 극복하는가를 보십시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지나온 과거입니다. 이미 큰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개입함으로 성공 경험을 했습니다. 감옥에서 하나님의 간섭으로 탈출한 경험을 이미 했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어떻게 예측합니까?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을 하나님께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더라도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황무지 같은 광야를 지나고 있으신 성도님 계십니까? 쓴물을 보며 원망하며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2 샘이 터지고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의 오아시스가 미래가 다가 올 줄 믿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풀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황무지 같은 가정과 직장을 만났습니까? 이 길을 통과하면 오아시스를 만나 해갈의 기쁨을 누릴 날이 올 줄 믿습니다.

 

“내 인생을 결정짓는 긍정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보면 '통제감의 효과(controllability effect)'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심리학자들은 통제감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떤 상황에 대해 통제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면 스트레스가 감소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페팅게일은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병에 대한 태도와 사망률을 분석했답니다. 환자들 중 암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즉 통제감을 갖고 있는 환자들과 그렇지 않은 환자들의 수술 후 사망률을 비교한 것입니다. 자신이 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환자의 71%가 생존했답니다. 그러나 절망감에 빠져 포기했던 환자는 19%만이 살아남았답니다. 비신테이너는 쥐들에게 암세포를 이식한 후, 전기쇼크를 주면서 몇 번의 시도로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게 훈련시킨 쥐들과 그렇지 않은 쥐들을 비교했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전기충격에 대한 통제감을 갖고 있던 쥐들은 70%가 살아남았지만 통제력 훈련을 받지 않은 무력한 조건의 쥐들은 27%만이 종양을 극복했답니다. 무력감에 빠진 쥐들의 면역체계를 연구한 결과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종양세포 등을 찾아 죽이는 T-세포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답니다. NK세포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일을 만나고 삽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났다고 그것을 전부로 생각하고 지금 환난이 미래를 지배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희망을 접지 말아야 합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절망하는 자에게는 미래를 향한 희망의 사다리는 없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웃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테는 그의 책「신곡」에서 지옥 입구에“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절망하는 자는 이 땅에 살지만 지옥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지옥이란 절망이 영원화된 곳이며 꺼지지 않는 풀무불 속에 죽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삶이 연속되는 곳입니다. 살인자로 몰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가 모든 권력과 부,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지만 모세의 미래가 그것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절망에서 일어나 희망으로 백성을 이끌게 할 하나님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이 한 때 간음하고 살인하였지만 다윗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될 것이고 그것만 붙들고 살았다면 다윗의 인생은 비참해졌을 것입니다. 다윗의 미래에는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고 성군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해가 안된다고 지금 거추장 스럽다고 지금 자유를 구속한다고 하나님을 미래의 인생에서 추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어버린 욥의 인생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배가의 축복을 주실 미래를 예배해 놓고 있었습니다. 도망자 야곱의 인생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미래에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는 축복을 예배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더 좋은 미래를 보며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애가 3장에 보면 엄청난 곤경에 처했지만 절망하지 않았고 다니엘도 다니엘 10장에 보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환난을 당하였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 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감정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자신의 저서에 강제수용소의 경험을 썼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은 대부분 희망을 잃고 죽었던 반면, 프랭클은 학술 강연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했고 자신의 경험을 다시 구성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풍부한 경험의 자원으로 승화시켜 훗날 희망 없는 상황을 극복하도록 돕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유대인 소녀 플라일링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기간에 게슈타포를 피해 베를린에 있는 지하실에 살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자유의 땅인 미국에서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라고 상상했답니다. 나치와 소련 군대와의 경험, 그리고 암과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은 플라일링은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미래는 현실에 부정적 근거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 따라 펼쳐지는 것입니다. 구름은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눈물을 조금 있으면 마르는 것입니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바람으로 연을 날릴 수 없습니다. 고통받는 것도 순간입니다. 환난도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우리의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라고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환난 가운데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의 희망의 사다리를 보고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3.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아무도 도와 줄이 없다”는 사람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일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보면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 명이 아니고 한 명이나 몇 명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정이 절망의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러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몸이 건강을 잃고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은 모든 세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희망을 잃어 버리고 절망의 감옥에 갇히는 것은 모든 교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모든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아니면 몇 사람입니다. 그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생명을 끊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면 얼마나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겠습니까? 사랑했던 사람에게 차임을 당하면 얼마나 절망을 합니까? 한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도 도와 줄이 없다고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적으로 사는 날 동안 끊임 없이 다가오는 나를 절망하게 하는 이 인간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좋은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배신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날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도 내일 절망을 주는 사람으로 돌연변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같이 위대하시고 선한 일을 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인신매매를 당하였습니다. 재정을 맡았기 때문에 그만큼 신뢰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제자들이 외면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목숨까지도 내 놓을 것같아던 베드로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하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잘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잘 해 주어도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고, 비판할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할 사람을 비난합니다. 항상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존재합니다.

 

오늘 절망 가운데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 사람 일부 중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수고하며 헌신하는 그를 글은 잘 쓰는데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돈을 좋아한다고 비난합니다.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이 노년에 감옥에 갇혀있을 때는 많은 사람이 바울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의 말을 마음에 품고 산다면 목회하고 싶겠습니까? 목회를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를 전부로 알고 가슴앓이를 한다면 바울은 인간에 대하여 절망하고 목회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심리학 ‘설명양식(explanatory style)’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절망적인 사람과 희망적인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할 때 이 설명양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첫째 지속성의 문제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은 실패했을 때의 원인이 지속적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낙관적인 사람들 목사님이 한 가지 잘못했으면 그것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설교 시간에 실수하면 그 날의 실수로 받아들이지 실수하는 사람으로 낙인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전반성의 문제입니다. 지속성은 시간에 대한 것이고 전반성은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목사님에게 무엇인가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절망적인 사람은 목사님이 나의 모든 요구를 거절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목사님은 다 자기를 싫어한다고 일반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희망적인 사람은 거절했던 그 상황만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겠다고 이해하고 정상적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나를 좋아 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제가 쓴 시처럼 물은 흐르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어떤 사람은 무척 좋아하고 내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떤 사람은 무척 싫어하는 것입니다. 나를 정죄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를 배신하고 내 앞길을 막는 그 인간을 묵상하며 절망하지 말고 나와 함께 기도하고 같이 위로하고 같이 사명을 가지고 일하는 동역자과 함께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엘리야 혼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아 엘리야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숨겨 놓은 하나님의 사람 7,000을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오바댜가 숨겨놓은 하나님의 사람 100명도 있었습니다. 다 나를 슬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같지만 하나님은 웃음을 통해 희망을 어디엔가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격려의 말을 통해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물질을 통해 섬겨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든 소망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어떻게 절망적인 인간의 담을 넘어가고 있습니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기도의 동역자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자기와 함께 기도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왜 기도를 부탁합니까? 그들의 기도로 은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은사인지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환난을 넉넉히 극복할 만한 은사를 기도를 통해 얻기 위해서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난을 넉넉히 이길 만한 각종 좋은 은사를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은사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간구함으로 절망 가운데 소망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절망적인 환난에 처한 자신들에게 복을 내릴 것이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로를 위해 주신 은사를 통해 환난을 극복하고 소망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병들어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이사야가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초대 교회 성도들이 기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무엇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11절 하반절을 보세요.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난을 경험하게 하고 바울을 위로해 주었다고 말씀합니까?

바울은 환난 중에 자신을 위로한 이유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기를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4, 6). 하나님이 환난 중에 위로하는 것은 자신만 위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은사로 극복하는 것을 보면 나와 똑같은 상황을 만난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고 가난한 자, 병든 자, 고민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난이 위로 뿐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소망을 갖는 것을 보면 믿음없는 자가 구원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감동을 체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난 가운데 위로를 받는 것은 자신과 같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왜 고난을 당하십니까?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립니까? 왜 우리 가정은 이런 어려움이 오고, 왜 이렇게 고생을 하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받는 이유(6)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①너희의 위로를 위해서입니다(6). ②너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6). ③고난을 견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6)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바울의 인생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멋이 있습니까?

이런 삶은 하루 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합니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1만시간의 재발견”에서 나온 것처럼 기계적 연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의식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목표-집중-피드백-수정하기” 과정을 목적의식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전문가들은 모두 '의식적인 연습'을 하였다고 하는데 의식적 연습에서 중요하는 것은 코치와 심적 표상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신 우리의 영원한 코치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면 결국 우리의 희망의 사다리는 천국으로 늘 연결될 줄 믿습니다.

 

살다보면 절망적인 상황은 예고 없이 다가 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면 먼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장매물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1.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나는 의지할 것 없다”라고 하는 마음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2.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미래가 없다”는 시간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3. 우리가 어떠한 경우도 희망을 가지고 살려면 “아무도 도와 줄이 없다”는 사람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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