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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빌립보서14; 빌립보서3:7-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004 추천수:3 220.120.123.244
2019-09-08 14:42:31

힘써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빌립보서14)

빌립보서3:7-11

 

저는 교회를 개척하여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휴가를 거의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를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개척하여 어떻게든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려고 하다 보니까 휴가 갈 여유를 가지지 못했고, 개인적인 휴가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한 주가 제가 개인적인 시간을 내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작업복을 입고 막노동을 했습니다. 물론 월요일 심방 가고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새벽예배 인도하는 것은 계속했습니다. 작업현장에서 지방에서 교회를 다니는 40대 집사님과 함께 일을 하였는데 그 집사님은 일하면서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젊은 날 크게 유흥업소를 운영하면 큰돈을 벌고 실컷 즐겨보았답니다. 하루에도 수백만을 즐기는 데 쓰며 인생을 그렇게 살았답니다. 그러나 공허했고, 허무만 남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 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새벽기도를 다니면 성경공부를 하며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게 되었답니다. 푸드뱅크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어려운 개척교회를 세워준다고 합니다. 때로는 리모델링을 해주고, 공사 현장에 나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봉사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 돈을 펑펑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며 살 때보다 지금 저녁 11시까지 남을 위해 공사 현장에서 도와주는 삶이 훨씬 가치 있고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평생 힘써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까?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입니까? 명예를 얻는 것입니까? 지위와 권력을 갖는 것입니까? 건강하게 120살까지 사는 것입니까? 자식들이 잘 되는 것입니까?

프랑스 파리 한 수도원의 입구에는 큰 돌비석이 있답니다. 그 비석에는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답니다.

법과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이 있었답니다. 형편이 좋지 않아 고학을 하며 휴학을 반복한 끝에 졸업반까지 왔는데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는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 수도원의 수도사를 찾아 갔는데 수도사는 학비를 주었답니다. 감사하다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수도사가 불러 세웠답니다. ‘하나 묻겠는데 자네 그 돈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가?’ 수도사가 말했답니다. ‘그거 등록금 낼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시 수도사가 질문했답니다. ‘그 다음은?’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졸업해야죠’ ‘그 다음은?’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만, 그 다음은?’ ‘돈 좀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 ‘결혼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계속 질문하자 학생을 대답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 때 수도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는 죽어야 하네. 그 다음은 자네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일세’ 학생은 책을 잡든 잠자리에 들든 그의 귓전에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수도사의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결국, 그는 졸업을 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훌륭한 수도사가 되었고, 그가 죽은 다음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좌우명을 비석에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일평생 살면서 힘써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을 빌립보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생은 마지막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를 바랬습니다. 인간은 단지 물질의 결합에 불과하고 죽으면 다 물질로 돌아가 버리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단지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있고 육신은 죽음으로 산화되지만 영혼은 천국에 가고, 육신도 예수님 재림할 때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세상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편견, 독선(獨善), 아집(我執)의 늪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를 중심으로 한 과학주의의 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봅니다.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며 그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단지 유전정보를 실어나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최초로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해독, 우리 몸의 지도를 완성한 세계적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그의 책 <신의 언어>에서 DNA는 하나님의 설계도라고 말합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로 근무하면서, 환자들이 신앙의 힘으로 궁극적인 평화를 누리고 위로를 얻는 광경을 무수히 목격했답니다.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의 세계를 알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을 수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오묘한 세계를 보고 전능한 창조주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까?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내가 그를 위하여”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에 따라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물질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평생 물질을 추구하며 살고, 쾌락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을 평생 쾌락만 추구하고 살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을 위해 삽니다.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평생 남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사는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유익(케르데)’란 말은 ‘이익, 이득’이라는 말입니다.

5절부터 6절까지 나와 있는 그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이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8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 베냐민 지파인 것, 히브리인인 것, 바리새인인 것, 열심히 교회를 핍박한 것, 율법의 의로 흠이 없게 산 것 등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것들은 지금까지 자랑해 온 것들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그것도 유대교의 골수분자로서 당시 자신이 누리고 있던 혈통, 가문, 종교적 유산과 열심, 지식, 율법 준수 등 육체의 자랑거리들을 하늘의 의를 얻는 데 유익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이 유익이 아니라 해로 여겼습니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7절에서는 해로, 8절에서는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고 반복합니다. 또다시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해와 같은 어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잃어 버리고(에제미오덴)도 ‘해’와 같은 어근에서 온 말입니다. 배설물은 인분을 말합니다.

 

왜 전에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디아 톤 크리스톤) 7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명백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적 공로 안에 뿌리를 두지 않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실천은 더러운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전에는 이 세상의 최상의 자랑거리로 여겼던 유대주의적 산물을 그리스도와 만난 이후로는 더러운 악취가 풍기는 인분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해(제미아)’는 ‘손상, 손해’를 말합니다. 여긴다(헤게마이)는 예수님을 만난 후 여전히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현재 완료형).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생각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자신의 여러 가지 외적 조건이 그리스도를 향한 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자랑거리가 영적 진보를 막는 요소가 된 것입니다. 잘 나가는 것이, 건강이 돈이, 명예과 권력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세상 신분이나, 부나, 명예나, 건강이나, 학벌이 구원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것들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자랑하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신앙의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버립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이 되어버립니다.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자랑에 빠진 사단이 좋아하는 삶을 살다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인간적인 것들을 신뢰하게 되면 마음이 부패해집니다. 주님의 은혜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왜 전에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까?

둘째,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고상하다는 말은 탁월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지식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데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지,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지는 지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무엇인지 죽음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근원적이며 근본적인 지식을 알려 주지 못합니다. 죄 용서 받는 방법을 근원적으로 알려 주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고 고상하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버스와 지하철에 희한한 광고판이 붙었답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신은 존재한다. 예수와 더불어 당신의 인생을 즐겨라"라는 버스 광고를 시작했답니다. 이들은 신은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반대하며,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으며, 인간의 소외를 가져 오게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자는 자신의 판단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론적 무신론자 중에는 비판적 무신론자와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가 있습니다. 극단적 무신론자는 모든 정신적이고 초감각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물질주의(Materialismus)자와 실증주의(Positivismus)자입니다. 범신론(Pantheismus)자는 세계를 초월하는 인격적 신을 믿지 않으며 실천적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으나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부정합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지고의 존재로 만들었고, 마르크스는 신을 물질로 대체하였으며,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함으로 인간이 신이 되고자 신이 없기를 원하는 몸부림을 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한결같이 신은 인간의 산물이니 자유롭게 살려면 신을 믿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본유적 지식 혹은 선천적 지식(Innate Knowledge)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성장하면서 일반계시와 특별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획득되는 후천적 지식(Acquired Knowledge)을 갖게 됩니다. 이성은 인간에게 우주는 반드시 시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결과는 적당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정교한 우주가 우연히 발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 부속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까 어느 날 우연히 시계가 만들어졌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라고 말씀합니다. 천체의 질서나 동식물과 사람의 구조 등은 그것을 만드신 이지적(理智的) 창조자 곧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시계가 있으면 그 시계를 만든 제작자를 만나 보지 못했지만 어디엔가 제작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신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동물은 무엇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도 신을 숭배합니다. 성경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양심은 의로운 절대적인 입법자를 요구합니다. 인간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성격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무신론은 일종의 질환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그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믿지 않을 뿐입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전제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논증에 의해 증명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천문학자들이 별을 만들지 않았듯이, 식물학자가 꽃을 만들어 낼 수 없듯이 신학자가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전제되고 선포된 하나님은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자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를 경배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식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 :3)”라고 했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 : 26)”라고 했습니다.

이 지식은 구원의 길을 아는 지식이고 영생을 얻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신앙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지식입니다. 지식(그노시스)는 구약의 ‘야다’의 번역으로 직접적인 교제 혹은 본질적인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는 단순하게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앞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눈을 떠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직접 체험했고,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하기도 했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고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솟아오르는 태양 앞에서 모든 별들이 꼬리를 감추듯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앞에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는다해도 이 지식을 얻지 못하면 초라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백화점을 경영하는 부자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여보, 여기 있는 물건 중에 당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시오”라고 했답니다. 그 때 지혜로운 부인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당신을 얻는 것이 곧 이 백화점을 얻는 것이기 때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일생 추구하고자 하는 가장 고상한 지식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2.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단과 함께 평생 살면 사단처럼 됩니다. 도둑과 함께 살면 도둑놈이 되기 쉽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친구가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호주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10년간 추적해온 한 연구에 따르면, 친구가 많은 노인들은 친구가 없거나 적은 노인에 비해 10년 후 사망률이 22% 감소했다고 합니다. 하버드 의대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친구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대뇌 건강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런던 타임즈는 설문조사를 통해 가장 잘 된 친구의 정의를 내 놓았습니다. 그 첫째가 모든 사람이,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릴 그때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 둘째는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셋째는 나의 기쁨을 곱해 주기도 하고 나의 슬픔을 쪼개 주는 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친구가 없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좋은 친구입니다. "인자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눅7:3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변의 친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요구를 들어 주시는 친구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목숨을 대신하신 친구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 이런 예수님과 친구가 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자기 자랑거리를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목적이 무엇입니까?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씀합니다. 그곳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첫째 그리스도를 얻고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얻고’(케르데소)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와의 교제를 얻고자 하는 갈망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바울은 권력이나 특권, 명성이나 지위를 얻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다 잃을지언정 그리스도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입니다.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그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바울에게 돌려져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의로 간주되어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정죄로부터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사단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죽음 노예로부터 해방됩니다. 죄사함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가 가지고 있는 로마의 시민권으로 그가 자랑하는 학문으로 결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만이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지금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의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가진 의의 출처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자신의 과거의 조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어떻게 의롭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그것은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얻어지는 의가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께 인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과거 그렇게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는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 의, 절대적 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의는 율법 준수를 통해 얻은 의를 말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취득된 상대적 의를 말합니다. 인본적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시는 절대적인 의, 신본주의적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의는 인간의 행위에 유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난 의로 결국 인간의 믿음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욥기 15장 14-16

로마서 3장 20절에서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2절에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믿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평생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3. 우리는 마지막 날 부활에 동참하는 삶을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인생을 너무나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개연성의 원리, 유비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따라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부활 기사의 신빙성, 빈무덤의 역사성,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기절설, 착각설, 도난설, 환상설, 바벨론 신화 등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위해 순교했겠습니까? 부활의 수많은 증거와 증인들이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애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언젠가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날에는 확실하게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15:16-19)“

바울의 궁극적인 소망이 무엇입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장차 주님의 재림 때 생명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 바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합니다. 그 중에는 심판의 부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생명의 부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갑니다. 이 생명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속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나 우리가 죽음 후에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씀합니다.(롬6:3-5) 성령의 세례를 받은 성도는 이미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고 있는 사실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갈망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매를 맞았습니다. 돌로 맞았습니다.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추위와 헐벗음을 당하였습니다. 생명의 부활에 이르는 성도는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직분을 맡아 성도를 온전케하고 봉사하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부활을 확신하게 되면 고난도 영광으로 누리게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죽으셨습니다. 죄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부활을 확신하시고 죽으셨습니다(요17:4,5).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믿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믿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0-11)”

 

평생 무엇을 힘써 구하며 살겠습니까?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마지막 날 부활에 동참하는 삶을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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