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승리하는 신앙생활(12) 불신앙과 싸움(마가복음16:14-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713 추천수:4 220.120.123.244
2019-03-24 13:20:34

 

승리하는 신앙생활(12) 불신앙과 싸움

마가복음16:14-18

 

오늘은 승리하는 신앙생활 시리즈 설교 12번째로 “불신앙과 싸움”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녀도 끊임없이 불신앙과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죽음 후 천국에 가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가 몇 년 전 40대 젊은 나이에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갑자기 천국에 가신 아는 목사님 장례식에 조문하러 갔습니다. 그때 큰 교회를 건축하고 목회를 잘하시다가 은퇴하신 원로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열심히 사역했던 젊은 목사님이 일찍 천국에 간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80이 가까우신 목사님께서 저에게 “김 목사, 나는 아직까지 천국에 대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라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같이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그런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면서 불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일어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잘 믿다가도 고난이 다가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다가오냐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회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면서 하나님도 과대 선전을 하며 공정거래법을 위반하시네 하며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외동딸을 둔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딸이 남자에게 실연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했는데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신앙을 떠나 버렸습니다. 동방의 부자 욥의 아내처럼 재산 다 잃고 10남매 불의의 사고로 한꺼번에 죽으니까 질병 걸린 남편에게 하나님 저주하고 죽으라는 식의 회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교회에 나와 문제가 해결되어 잘 되면 하나님 믿는 것이 거추장스러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어쩌다 일어난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믿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 버리기도 합니다. 목회하면서 암 때문에 교회에 나와 열심히 매달리다가 은혜 가운데 치유받고 건강해지니까 교회를 떠나는 분도 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촌에서 염소를 기르며 가축 장사를 하고 있는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황급히 목사님을 찾아와서 부인이 아프니 도와 달라고 교회는 나오지 않지만 한 동네이니 달려가서 기도한 후에 아무래도 병원에 데리고 가야할 것 같아서 교회 봉고차로 모시고 가서 진료해보니 복막염이 터지기 직전이었답니다. 그래도 급히 수술해서 다행히 나아 퇴원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고맙다고 하면서 교회를 잘 나오다가 약 두 달 후부터 안 나오길래 목사님이 심방가서 "교회를 왜 잘 못 나오시지요?" 하니까 남편이 대답하기를 "요즈음 염소 장사가 한창철이라 한가하면 믿어 드릴께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보면 초중고등학교 때는 교회에 잘 나오다 대학에 가서 <만들어진 신>같은 무신론자들의 책을 보면 금방 불신앙과 싸움에서 실패하고 교회를 떠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니까 3대째 신앙을 지켜온 가정에 태어나 대학 졸업 때까지 꾸준히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적당히 다닌 것이 아니고 열심히 다녔답니다. 구원받고 죽은 후 천국 갈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였기에 방황하고 고뇌하고 영적, 정신적으로 갈팡질팡하였답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깊은 방황과 고뇌의 날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한 지 2년이 지난 1968년에 에베소서 1장을 읽다가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목사님과 같은 경우는 그래도 빨리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를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아주 열심히 다니면서 봉사도 하지만 오랫동안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빈민촌에서 노인, 병약자, 사생아, 고아, 창녀, 가출소녀, 나병 환자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나병 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에이즈 환자를 끌어 안아주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1997년 그녀가 죽었을 때 장례식은 종교와 국적을 초월한 각국 조문 사절과 6천여 명의 빈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으며 세계 각국에 TV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인도는 국민추도 기간까지 정해가며 테레사 수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테레사는 불신앙과 싸움이 없었을까요? 2007년 8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는 "마더 테레사의 믿음의 위기"(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였습니다. 그 기사에 그녀가 마이클 반 델 피트(Michael van der Peet)라는 사제에게 보낸 편지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침묵과 공허가 너무 커서 그분을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의 혀를 움직이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게 빈민과 고통받은 자를 위해 헌신했지만 그녀는 평생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과 싸웠음을 그의 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이 어디 있는가? (내 맘) 깊은 저 아래라도...아무 것도 없고 오직 공허와 어둠 뿐...혹시라도 하느님이 계신다면,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길... 이 미지의 고통!-나는 신앙도 없고, 퇴짜 맞은 느낌에다, 텅비어 있고, 신앙도, 사랑도, 열심도 없다...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하는가?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당신도 역시 진리는 아니다." 이런 회의주의는 1948년부터 1997년 죽기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세례요한이나 베드로나 제자들처럼 일시적인 의혹기가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때 그 소식을 듣고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고 시골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남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을까요?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과거 귀신들렸던 여인인이까 정신 나간 소리한다고 믿지 못했을지라도 두 명의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니까 믿을 만했을 텐데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1. 왜 불신앙과 싸움에서 실패하고 믿지 못할까요?

도마도 믿지 않았는데 왜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까?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마만 그랬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눅24:11을 보면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부질없는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어떠했을까요? 용감하게 홀로 무덤에 갔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24:12)" 예수님의 시체가 없자 이상하게, 신기하게 여기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배웠다는 지식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정말로 믿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이 좀 미신적이고 이상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20년 다녔는데 "하나님이 계시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 정말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죽은 후에 정말 천국에 가는지?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가는지? 정말 내 죄가 다 용서 받았는지?" 늘 의심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자들처럼 허탄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실제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적 법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경험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사고는 하는 현대인에게는 “과학적=논리적=합리적=현실적=가능, 비과학적=비논리적=비합리적=비현실적=불가능”이라는 사고방식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과학적 법칙이 어디서나 어느 때나 통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법칙은 암묵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인정하는 데서 참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조건은 소위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입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라는 전제 하에 진리입니다. 지구의 질량이나 만유인력의 법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자연조건이 동일하고 불변해야 만유인력의 법칙은 항상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그 법칙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둘째 조건은 초자연적 요인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진리입니다. 사람이 사과를 공중으로 던지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하는 순간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과학의 법칙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과학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아이들 중에 초중고등학교까지는 교회에 잘 나오다가 대학에 들어가 도킨스가 쓴 <만들어진 신>같은 책을 읽으면 금방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불신앙과 전투에서 패배하여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을 봅니다. 그것은 과학과 과학의 해석을 잘 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해석은 그 사람의 세계관 인생관 철학이 가미된 것입니다. 그런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과학적 해석의 책으로 그의 불신앙을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논증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과학을 가지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해석은 그 사람의 철학입니다. 도킨스는 객관적 지성이기보다는 지나친 과학주의 신봉자입니다. 그런 책으로 불신앙과 전쟁에서 패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학자가 똑같이 달에 가도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불신앙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 기술로 달에 가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과 과학이란 두 가지 책을 통해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과학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은 태초에 물질이 있었고 그 물질이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주장이 합리적입니까? '모든 존재하기 시작한 것에는 원인이 있고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는 없다'라는 공리는 누구나 참으로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라를 질문을 던지면 결국 창조주가 있든지 우연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무신론자의 최종적인 결론은 '그냥 원래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학적 진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주의 시작 자체가 없다면 우주의 과거 사건의 수는 무한대라는 의미인데 수학에서 무한수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정의한 ‘가무한’일 뿐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의 하나인 데이비드 힐버트는 "무한대(infinity)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리학 법칙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빅뱅 이론은 우주 만물이 '무한대 이전의 시간부터 그냥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38억년 전이라는 분명한 시점에 시작되었다는 주장합니다.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는데 초월적 존재 즉, 온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존재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고, 물질적, 비물질적 세계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물질적 속성을 초월한 자신이 원인자이자 결과인 존재가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초월적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신(출3:14) 하나님은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이사야 45: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 그 하나님이 물질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과 비과학의 문제가 압니다. 이성과 비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논리와 비논리의 문제가 압니다. 합리와 비합리의 문제가 압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믿지 못할 때는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할까요?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보고 믿는 것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진조 할아버지 계셨음을 믿습니까? 보았습니까? 보지 않았지만 믿습니다. 1,2차 대전 있었다는 것 믿습니까? 이순진 장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장군이라는 것 믿습니까?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믿습니다. 보았습니까? 보지 않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왜 믿습니까? 전달해 주는 사람, 기록해 놓은 것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2. 불신앙과 전쟁에서 실패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함을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믿음이 형성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믿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완악함은 확실한 증거를 거절하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굳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7절 보십시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입니까?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대로 부활하였으니 말씀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만날 소망을 가지고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6:3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답답해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려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기록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확실하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하게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최면이 아닙니다. 믿음은 막연한 희망적 기대가 아닙니다. 믿음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그 대상, 내용, 목적 면에서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요20:3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장 31절)”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은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함입니다. 믿음은 자기최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역사적인 사실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9:31-35, 20:1-8, 요일1:2, 고전15:12-17) 믿음은 인간 편에서 나약한 희망적 기대, 단순한 동경의 산물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선포에 전인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빌3:4-6, 행9:1-7, 고전15:8) 믿음은 적극적 사고의 훈련이나 신념의 마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것들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엡2:8-9)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기록한 성경을 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요한일서3:24, 고후1:21-22, 엡1:13-14)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 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로마서 8장 15-16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장 3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여 주십니다(롬8:16)

 

3.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15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불신앙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믿음의 내용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더디 믿는 믿음(11, 12절. 눅 24:25-26)에서 머물지 않은 것입니다. 삶의 고통을 당할 때 회의하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파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딤전 1:19-20). 고난 앞에 넘어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는 것입니다.(막 4:17). 연약한 믿음으로(롬14:1-3)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으로 늘 염려와 두려움,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것입니다.(마6:24-34, 8:23-28. 14:30) 능력있는 믿음으로 죽음과 죄를 정복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으면 축복으로, 고난을 받으면 고난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을 모든 불신앙을 잠재우는 복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에 인생의 최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온 천하 만민에게입니다. 유대인에게만 머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지옥에 갈 부모 형제 친구 친지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으면 천국에 가지만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이 땅에서도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7절 18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표적이 일어납니다. 기적과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죽음에서 해방이 됩니다.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불신앙과 전쟁에서 승리한 제자들의 이후의 삶을 보십시오. 불치의 병자가 치유되기도 합니다. 40년 된 앉은 뱅이를 일으킵니다. 8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는 애니아를 향해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네 자리를 정돈하라”하니까 단순에 일납니다. 평생 선행과 구제를 하다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기도하고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니 다비다가 살아납니다(행9:40). 얼마나 놀라운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입니까? 사도들만 그런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불신앙과 싸움에서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기처 장관을 지냈던 세계적 핵물리학자인 정근모 박사(장로)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과학적 지식체계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에도 수석으로 들어 고등학교 과정을 4개월 만에 마치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답니다.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회에 다니는 아내 따라 교회에 나갔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 없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한단 말인가. 이 거대한 우주 자체가 곧 하나님인가.”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열 살 된 아들에게서 '만성 신장염' 증세 나타났습니다. 한 번에 4시간이 소요되는 투석치료를 하였답니다. 아들은 학교생활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답니다. 아들은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답니다. 교회에서 4일간의 부흥회가 열렸답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다시 눈물샘이 터져 나왔답니다. 3일 동안 철야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였답니다. 장로님도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성령 체험'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그 예리한 말씀들은 눈물샘을 파고들어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고 합니다. 통곡하며 울었답니다. 체면이나 지위도 아랑곳없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답니다. 그날이 바로 1982년 3월 14일이었답니다. 집에 돌아와 다섯 식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서로 손을 잡고 교대로 돌아가면서 통성으로 기도했답니다. 그때부터 장로님의 가정과 부부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최대의 기쁨이었고, 믿음 좋은 신앙인들과의 교제는 큰 즐거움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건강을 되찾은 후 결혼도 하고 자신감 넘치는 생활로 변했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신이 아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정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다. 어찌 과학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세미한 음성으로 때로는 위로해 주셨고 때로는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셨던 그 하나님을 믿는다. 지나온 삶을 반추해 보면 더욱 그것을 깨닫게 된다."

불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믿으면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되었던 자가 해방이 됩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각종 중독에 시달리던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악한 영들의 세력이 물러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방언을 받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한 것처럼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안 방언을 받게 됩니다. 개인의 깊은 경건 생활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은사로서 방언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뱀을 잡았으나 해를 당하지 않는 사건이 실제 일어났습니다(행 28: 3-6). 독을 마셨지만 해를 입지 않은 경우는 성경에 기록이 없지만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의하면 유스투스 바르사바스가 독을 마셨으나 ‘주의 은혜로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뱀 잡고 독 마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연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한 베드로의 삶을 조금 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복음은 전할 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행3:6). 무엇으로 가능했습니까?(행3:16) 믿음입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행4:22). 이일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베드로는 위협과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하며(행4:19)”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불신앙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많은 기적이 일어났는지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사람들이 병든 자를 메고 와서 거리에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누가 덮일까 기대를 가지고 치료를 받았습니다(행5:15-16).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이 일로 옥에 갇히고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이러면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불신앙과 싸움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옥에서도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합니다(행5:29-32).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불신앙을 이기는 부활의 믿음으로 이런 기적을 체험받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신앙은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부활신앙은 사단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부활신앙은 신비로운 역사를 체험하게 합니다. 부활신앙은 실패자에게 소망을 줍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할 때 (1)삼천-행2:41 (2)남자 오천-행4:4 (3)심히 많음-행6:7 (4)남녀 세례-행8:12 (5)수가 많아짐-행9:31 (6)수다한 사람들-행11:21 (7)수만-행21:20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불신앙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렇게 승리하는 신앙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3.24.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