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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인생(벧전2:11-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748 추천수:18 112.168.96.71
2016-06-19 11:14:02

 

나그네 인생

벧전2:11-12(벧전1:1-2)

 

우리가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 전후서는 로마의 황제 네로 시대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처참하게 순교당했던 기독교인들의 삶은 영화 코바디스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로 황제는 주후 64년에 발생한 대화제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극심하게 박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화형을 시켰습니다. 해진 후 밤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핍박은 64년 네로(Nero)황제 때부터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네로에게 핍박을 받아 고향과 집을 잃고 흩어져 사는 기독교인을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거류민, 나그네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류민”도 거주하는 외국인, 이방인을 말합니다. 하늘이 본향인 그리스도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17절도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잠깐 머물다 가는 나그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창 23:4). 한 평생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처절하게 살았던 야곱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창 47:9). 삼권을 다 가지고 천하를 호령했던 다윗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대상29:15; 시39:12).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나그네로 살 뿐입니다. 잠깐 있는 것 누리다가 주님 오라 하시면 어느 날 문득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잠깐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그네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영원히 거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인생은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두 종류의 나그네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사는 정처 없는 나그네입니다.

옛날 가수 최희준씨가(하숙생)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권력자이든, 철학자이든, 부자이든, 유명인이든 다 똑같습니다. 공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베스트셀러를 많이 써서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답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답니다.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허무한 나그네 인생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는 무엇가 성취하기 위하여 수고하며 도전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도, 남보다 앞서 가려는 경쟁심도, 인간의 욕심과 허영심도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리고 허무한 인생 앞에 소망 없는 나그네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로 살았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41세의 나이로 약물중독으로 죽었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권력을 찾지하기 위해 죽인 인간입니다. 그는 31살 젊은 나이에 근위대에 체포되어 자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공허한 마음 채우지 못하고 나그네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정처 없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본향이 있는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는지 분명히 알고 삽니다.

1장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그네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부름받은 나그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그네는 나그네이지만 신분이 다른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나그네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 된 나그네입니다. 어떤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소망을 가지고 사는 나그네입니다. 그 소망이 어떤 소망인지 1장 3-4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산소망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사는 나그네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6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사고 사는 것입니다. 너 나은 본향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싸움도, 질병도, 아픔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 곳입니다. 그 천국에 대하여 계시록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곳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땅은 잠깐 육신을 입고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국을 가장 많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이 세상은 잠깐 숙박하는 곳입니다.(대상29:15;히11:13-14)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합니다. 믿습니까? 허무가 극복된 나라, 죄와 죽음이 정복된 나라, 고통과 슬픔이 사라진 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들수 없도다”

이 땅은 우리 육신이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고 영원한 본향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를 보면 조롱을 받습니다. 채찍질을 당합니다.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톱질을 당해 몽이 두 동강이가 났습니다.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입고 도망다녔습니다. 광야의 토굴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신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나그네 같은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당시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지만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은 우리 인생을 안개라고 했습니다. 햇빛이 비치면 살아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시편 102편 3절에서는 인생을 연기라고 했습니다. 불이 있을 때는 피어나지만 불이 꺼지면 살아집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서는 인생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영광의 자리, 건강한 몸 계속 누리는 것 아닙니다. 잠깐이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모든 것 다 놓아두고 가야합니다. 나그네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참고 견디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이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야 합니다.(11)

11절에 보십시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무엇을 제어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육체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싸움의 문제입니다. 잠깐 사는 세상 나그네로 행복하게 사는데 자신과의 싸움에서 가장 방해 되는 요소는 육체의 정욕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라는 말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욕구들을 말합니다.(갈5:16-21) 4장 3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 등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정욕이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게 하고 하나님을 거슬려 우리의 거룩성을 파괴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을 부패하게 합니다. 함부로 말하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질투하게 하고, 자랑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합니다. 이 육체의 정욕이 우리의 영적 삶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음란한 생각과 생활로 나타납니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한 욕심들로 나타납니다.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성품과 생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훼방하거나 당을 짓거나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허무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들고 지옥같은 인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모 가수 겸 탈렌트가 화장실에서 여성을 성추행 했다고 해서 언론의 몰매를 맞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인기 있고 좋은 이미지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한 순간에 추락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 사람 뿐이겠습니까? 쌓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육체의 정욕을 잘 못 제어하면 추락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지난주에 재계 순위 5위인 잘 나가던 롯데 그룹이 압수 수색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들이 피 터지는 싸움을 하다가 추락하는 모습을 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그네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추한 꼴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생활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육체의 정욕과의 싸움에서 실패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100m를 달리는 선수가 출발점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출발 신호와 함께 뛰기 시작했는데 한두 발자국 내딛다가 그만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육체의 정욕을 제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서 제어하는 것은 “아페코”라는 말인데 “멀리 떠나라. 멀리하라”는 말입니다.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주의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욕구를 완전히 죽임으로 금욕주의자가 되면 행복할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지 행복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원의가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유혹하는 여인을 떠나는 것처럼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마음의 중심이 육체의 정욕에서 떠나 예수님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 펄펄 날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내가 죽는 신비로운 거듭남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 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 5:24에서 이것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할 수 없는 육체의 정욕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 안에서 사시는 예수님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나그네로 사는 행복한 인생살이의 첫 걸음이고 비결입니다. 죽음과 죄로 해방된 우리는 이제는 식욕의 포로, 성욕의 포로, 소유욕의 포로, 명예욕의 포로, 권력욕의 포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이 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면 아무리 고상해도 그것은 자신의 DNA 보존과 확산에 불과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나그네는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이 나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하지 않고 육체의 정욕에 집중하면 금방 그것이 전부가 되어 나그네 인생에서 실패자가 되어 버립니다.

육체의 정욕은 아주 매력적이고 달콤하여 그것에 집중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대부분의 중독들이 육체의 정욕의 노예가 되어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모든 유혹을 이기시고 승리하게 하신 그 예수님이 우리도 승리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히12:2)”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어떤 삶이겠습니까? 벧전 4:2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들은 욕체의 정욕에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향을 향해 살아가는 나그네의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나그네로 한 평생 행복하게 사시길 원하십니까? 이미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정욕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나그네로 한 평생 어떤 유혹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 우리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합니다.(12)

1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나그네 인생에서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법이라면 12절의 말씀은 타인과 싸움에서 승리하여 행복하게 사는 비법입니다. 나그네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당시 단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욕을 당했습니다. 수치를 당했습니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성도를 비방하였습니다. (1)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고 했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오해했던 것입니다. (2)부도덕한 무리라고 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오해하여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했습니다. (3)가족 파괴주의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형제를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4)노예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노예가 그리스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5)반정부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고 했습니다. 황제 숭배 반대, 로마시를 불사른 사람들이라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현장은 그렇게 물리적인 핍박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핍박과 조롱은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기독교와 관련된 비리 사건만 나오면 얼마나 많은 비난의 댓글로 붙어 있습니까? 개독교라고 싸잡아 욕을 해 댑니다. 먹사라고 비난합니다. “인류가 갈고 닦은 것 중에서 가장 타락한 시스템”이라고 기독교를 비난합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설득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반대하며,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으며, 인간의 소외를 가져 오게 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에서 기도하면 종교차별한다고 못하게 합니다. 소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하는 제도를 만듭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하고 벌금을 물게 만드는 법을 만들어 신앙인의 삶을 제한하려고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예배도 기도도 못하게 합니다. 어느 순간 인권법으로 전도도 못하게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이단, 사이비들은 기성 교회를 매도하며 교인들을 빼어내어 갑니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중에서도 교회 내에서 눈알을 부릅뜨고 비난거리만 찾아 매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와 장로 집사를 고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가, 믿지 않는 일가친척이 비난을 합니다. "예수 믿는 누가 사기치고, 누가 이혼했고, 누가 사업에 부도났고, 누가 행실이 더럽고, 누가 첩이 있고, 어느 목사님이, 어느 교회가 어떻고" 얼마나 비난을 합니까? 질병 걸리면 예수 믿으면 잘 되다면서 그게 뭐냐고 조롱합니다.

 

거대한 구족적인 악이 도사리고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그네 된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선한 행실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너희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서, 유대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입니까? 이방인 중에서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 도저히 선한 행실을 가질 수가 없는 육체의 정욕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구조 속에서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2장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욕을 당해도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해도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했습니다. 3장 9절 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1장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선행이 예수님의 보혈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1장 22절의 말씀처럼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어떤 경우도 선행을 행할 수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달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영광이 되소서”

 

왜 그렇습니까?

1)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선한 행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의도적으로 비방하는 자들에게 우리의 선한 일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벧전2:15을 같이 읽겠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말이 비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이 우선 보여집니다. 3장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면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2) 비방하는 자를 주님께 돌아오게 하여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불신자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마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방하는 자들이 결국 우리의 선함을 보고 회개하고 돌아와 복음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삶을 살 때에 불신자들이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능력 있는 분이구나.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참 힘있는 말씀이구나 하고 깨닫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이방인 중에서 선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비난하고 조롱하며 핍박했던 로마는 결국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고 천년 동안 기독교 나라로 변했습니다.

당시 핍박을 받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국 핍박하던 로마를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핍박 가운데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무슨 힘입니까? 순교의 피를 흘려 가면서까지도 묵묵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하게 살았던 성도들의 그 선한 삶이 결국 로마의 강력한 힘을 정복했던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참으로 선한 행실을 할 때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하며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언제입니까? 권고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현대인의 번역) 성도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의해 변화를 받아 회개하는 날입니다.

 

정처없이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 볼 수 없을 뿐입니다.(히11:3) 믿음이라는 주파수로 맞추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느낄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라고 말씀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땅을 떠나 영원한 본향을 갈 것입니다. 우리는 정처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라고 말씀했습니다. 잠깐 이 땅에 살다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해에 25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하루 685명, 한 시간에 28명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육체의 정욕대로 살다 실패하고 불행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승리하여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자신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6.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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