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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좀 하게 해 주세요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160 추천수:22 112.168.96.71
2014-11-25 16:30:51
"저기, 목사님 계시오? 지금 꼭 만나 봐야 쓰겄는디..." '등대원'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우체국장이 불쑥 남편을 찾아왔습니다. 한창 전쟁으로 인해 어려웠던 시절, 남편과 나는 부모를 잃고 학교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이곳 해남에 '등대원'이란 고아원을 열었지요. 간혹 등대원 소식을 듣고 수고한다며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날 우체국장은 무슨 딱한 사정이라고 있는 듯 남편을 급하게 찾았습니다. 그러더니 가방 속에서 반쯤 접힌 편지 봉투를 꺼내 남편 앞에 놓았습니다.

편지 겉봉에는 우표도 주소도 없이 또박또박한 글씨로 '하나님 전 상서'라고 쓰여 있었지요. "그저껜가 우리 우체부 하나가 우체통에서 편지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주소도 없길래 처음엔 애들이 장난친 줄 알고 버릴라고 했지라. 근디 읽어보니께 내용이 하도 딱하지 뭡니까? 이것을 워찌게 하끄나 밤새 고민하다가 결국 목사님한테 찾아왔소. 평소 불쌍한 아이들 핵교도 보내주고 좋은 일을 많이 허신다고 들었는지라 목사님이라면 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지라." 하나님 전 상서. 남편은 그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요. 남편의 눈이 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야 알았지요. "하나님 전 상서. 하나님! 저는 지금 공부를 무척하고 싶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갈증이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 길이 열린다면 신명을 바칠테니 부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처럼 도와주십시오..." 얼마나 지우고 다시 쓰고 했는지 닳을 대로 닳아버린 편지는 공부하고픈 아이의 간절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아이가 흘렸을 눈물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습니다.

당장이라도 그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희 남편은 더했을테지요. 남편은 그저 자나깨나 그런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했으니까요. "이 아이, 지금 어디 있소?" 남편은 우체국장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따~ 지가 알믄 목사님을 찾아왔겄소. 이름도 주소도 없제. 내 맘도 답답하지라. 어쨌든 이 아이를 살려 줄 수 있는 분은 목사님밖에는 없는 것 같소. 만약에 아이를 찾는데 제 도움이 필요하믄 언제든지 도울랑게 말씀만 하시쇼." 그날 밤 남편은 누워서도 그 아이 생각이 나는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뜬눈으로 보낸 남편은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간절히 기도했지요. 제발... 제발 그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우리를 통해 그 아이가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어느 덧 해는 뉘엇뉘엇 서산을 향해 지고 땅거미가 자욱한 저녁, 남편은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만날 만한 사람은 다 만나보고, 갈 데도 다 가봤는데 아일 찾지는 못했소. 대신 아이의 엄마는 만나고 왔지! 아이 이름이 영석이라오. 오영석!" 열 다섯 살의 영석이는 이곳 해남에서도 훨씬 더 들어간 산정리 산골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아버지는 놀음과 술로 논이고 밭이며 산까지 다 날리고는 머슴이 됐답니다. 그 아버지가 하루는 영석이를 부르더니 '우리집은 가난해서 너 중학교 못 보낸다. 그러니까 공부할 생각일랑은 버리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 하더랍니다. 아이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죠. 그러나 아이는 그럴 수 없어 교회 종탑 밑에서 날마다 기도를 했더랍니다. 교회 종소리와 함께 공부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하늘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요. 비록 영석이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렇게 아이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아니 만난 것이나 다름 없었지요.

영석이는 이미 우리 마음 깊숙이 심은 씨앗이었으니까요. '영석아, 어디 있는 것이냐? 네 편지를 하나님이 받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지금 어디서 뭘하는 거냐. 어서 이곳으로 와. 영석아, 영석아.' 우리 부부는 아이를 찾아 타는 목마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편은 그 뒤로도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영석이의 소식을 물으며 아이를 보면 등대원으로 보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다녔지요. 쌀쌀한 늦가을 밤, 낯선 소리에 혹시 이 밤에 영석이가 오는게 아닌가 하여 나가보면 사각사각 낙엽들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 그리움이 추운 겨울을 넘어 봄이 되었을 무렵, 한 아이가 등대원에 왔습니다. 다소 수척해 보이는 얼굴엔 채송화 같은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이 아이가 혹시 영석이...?' 남편 역시 아이를 보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네가 정말 그 영석이냐?" "네, 제가 오영석입니다." 아이를 거듭거듭 확인한 남편은 편지를 꺼내보였습니다."니가 하나님께 쓴 편지야. 내 이때꺼정 편지를 읽고 그렇게 감동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영석아, 공부가 그렇게도 하고 싶으냐." "네.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요.

그래서 목포까지 갔는걸요. 백 군데도 넘게 돌아다녔어요. 야간 중학교만 다니게 해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근데 아무도 받아주질 않았어요." 남편을 바라보는 영석이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덥썩 아이의 어깨와 손을 잡았습니다. "네 소원대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마. 앞으로 내가 널 지도할테니 너는 그대로만 따르면 된다." "참말이요? 그럼 지 중학교도 보내 주시는 거예요?" "그래,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석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을 와락 껴안더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저도 덩달아 울어버렸지요.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겠어요. 영석이는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잘 자라 주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줄곧 우등생과 장학생으로 마칠 정도로 공부도 잘 했지요. 틈만 나면 공부하던 그 버릇은 커서도 변함이 없더군요. 철학, 문학, 신학에다가 영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까지... 게다가 스위스 바젤대학이라는 곳에 유학을 가서는 그 어렵다는 박사학위까지 받고 왔지 뭡니까? 그 뒤에는 교수로 있다가 2년 전엔 신학대학교 총장이 되었답니다. 한번은 제가 물었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데 질리지도 않느냐고. 그랬더니 그러더군요. "제가 이 공부를 어떻게 하게 됐는데요. 전 책을 볼 때마다 그때 하나님께 보낸 편지를 생각합니다." 살아 생전 남편도 영석이에 대해 얘기할 적마다 늘 대견스러워 했습니다. 젊은 시절 어려운 형편에 '등대원'을 운영한다는 것이 힘겨웠지만 우리는 영석이와의 만남을 통해 알았지요. 우리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습니다.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이제 영석이도 예순이 다 됐네요. 하지만 이 늙은이 마음속 영석이는 아직도 채송화 같은 마알간 웃음을 가진 열 다섯 살의 아이랍니다. 공부좀 하게 해달라고 간절함으로 우릴 바라보던 꿈많던 그 아이 말이죠.

김수덕님은 등대원을 만든 고(故) 이준묵 목사(해남읍교회)사모인고 오영석 님은 현재 한신대 총장


공부 좀 하게 해 주세요 /김수덕
- 낮은 울타리 2002년 9월 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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