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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맑은 영혼 하나 내 몸에 들어와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658 추천수:21 112.168.96.71
2014-11-26 09:43:09
가장 맑은 영혼 하나 내 몸에 들어와

- 박건호/ 작사가, 시인 -


나는 한 청년의 신장(콩팥)으로 생명을 지탱한다. 그 청년이 내게 신장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숨을 잃었거나, 일주일에 세 번씩 인공신장실에 가서 피를 걸러내며 구차스런 목숨을 지탱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허약한 신장을 타고난 나는 다행히 40여 년을 지탱해 오다가, 드디어 신장이식이라는 첨단의학의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첨단의학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신장이식이다. 누군가가 신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첨단의학이라 해도 나는 저 원시적 상태로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형제간이나 부부간이라 해도 몸에 들어 있는 신장 한 쪽을 선뜻 떼어주기 힘들 것이고, 설사 떼어준다 해도 조직형이 맞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조직 검사를 한 남동생이 나와 50%정도 조직형이 맞아 이식의 희망이 보이는 듯 했으나, 남동생에게 간염균이 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아내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나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잖아도 몸이 안 좋은 동생인데, 나 때문에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환 이식이 흔하지 않아 조직형이 맞지 않으면 투석을 하며 지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또 혈액투석을 하는 동안에는 하루에 물 한 컵 이상을 마실 수 없어 나는 늘 목이 말랐고, 수박 한 조각도 마음놓고 먹을 수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처량한 마음으로 투석을 받고 나오다가 사랑의 장기기증본부에 등록을 했다. 그날 밤 10시 경, 조직형이 맞는사람이 있으니 항체 반응검사를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장난인가 싶어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27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고 했다. 신장이식 이후 나는 정상인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소변도 잘 나오고 거무티티하던 얼굴빛도 제 색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생명의 환희였다. 나는 신장을 제공해 준 한 청년으로 인해 죽음에서 살아났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것은 '생명의 동행'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에는 항시 신장을 제공해준 그 청년의 삶도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를 섣불리 낭비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삶의 절반은 신장을 제공해준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수술을 위해 한달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내던 그 청년을 생각했다. 솔직히 나는 하나님이 왜 신장을 두 개나 만들었을까 하는 의혹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만약 내 가족 중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신장 하나를 제공하겠다고 하면, 나는 말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신장을 나눈다는 것은 삶을 나누는 일임을. 사랑을 나누는 일임을. 그러기 위해 신장은 반드시 두 개여야만 함을. 내게 신장을 준 청년은 성공적인 신장이식 후에 나보다 더 기뻐했다. 건강하게 사시라며 몇 번이나 내 손을 어루만지고 갔다. 이제는 주고 싶어도 더 줄 신장도 없다며, 자신의 신장을 아껴서 잘 써 달라고 했다. 오늘도 내 인생은 나 혼자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가장 맑은 영혼 하나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 깊은 한 청년을 통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하나님과의 동행이기도 하다. 이 생명의 동행이 내 나머지 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해 줄 것이다.

-목마르거든 2003년 12월 호 중에서-


여덟 번 접은 천 원짜리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12년 동안 남편의 독립 운동을 돕고, 12년 동안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 동안 남편 없는 땅에서 살다간 파란 눈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쪽을 찌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만 먹고,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것이 보이면 이산가족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고 당부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승만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1970년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해 1992년까지 이화장에서 아들 부부와 함께 살았다. 그 동안 이화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1988년 이화장을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화장을 개방할 때 형편이 어려웠지만 입장료를 못 받게 했고, 창문을 열어 놓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해 주었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이화장을 죽 돌아보고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러 왔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참 고맙습니다. 함께 독립 운동 하시느라고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서 치마를 들추고 속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꼬깃꼬깃 여덟 번쯤 접은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며 당부했다. "이 걸로 꼭 사탕 사 잡수십시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물이 글썽해서 그 돈을 받았다. 그것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평생 동안 받아본 돈 가운데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금액의 돈이었던 것이다.

- 좋은 생각 2004년 1월 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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