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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우산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946 추천수:20 112.168.96.71
2014-11-25 16:24:11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 길음동 달동네였다. 살던 집도 달이 손에 닿을듯 가까운 달동네에 있었다. 아버지는 온종일 이곳저것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고물장사를 했다. 집에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깡마른 어깨에 물통을 매고 오전 내내 산동네를 오르내리셨다. 나중에야 부모님이 가난을 통해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릴 적 나는 가난이 너무 싫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초라한 행색도 친구들에게 늘 창피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만큼이나 가난한 아이들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엄마, 나는 아빠가 돈을 아주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 "아빠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아빠는 가엾은 분이시다. 너희들에게 잘 해줄 수 없다고 아빠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데."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엄마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어."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엄마와 함께 작은 음식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점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만두어야 했다. 생각보다 손님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산동네에서 더 높은 산동네로 이사를 가야했다.

새로 이사간 꼭대기 산동네에는 조그만 집들이 들꽃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이사한 후부터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나와 형을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았고, 환한 웃음마저 잃어 가는 듯했다. 새벽녘 엄마와 함께 우유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온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어둔 방안에만 있었다. 공부를 방해하는 우리 형제 때문에 누나가 공부방을 만들어 달라고 조를 때마다 아버지는 말없이 아픔을 삼켰다. 하루는 내가 다 떨어진 운동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아이들이 내 운동화보고 뭐라는 줄 알아? 거지 신발이래. 거지 신발!"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는 날이면 늘 엄마로부터 천 원짜리 한 장을 받아들고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곰팡이 핀 벽을 향해 돌아앉아 말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이사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밤늦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산동네 조그만 집들을 송두리째 날려 보내려는 듯 사나운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칼날 같은 번개가 캄캄한 하늘을 '쩍'하고 갈라 놓으면 곧이어 천둥소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가 계속 내리자 곰팡이 핀 천정에는 동그랗게 물이 고였다. 이윽고 물이 고인 천장에서 빗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빗물이 방울져 내렸다. 엄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걸레대신 양동이를 받쳐 놓았다. "이걸 어쩌나, 이렇게 비가 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손 좀 볼 걸 그랬어요." 돌아누운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버지는 며칠 전, 우유 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와 부딪쳐 팔을 다쳐 며칠째 일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한쪽 손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에게 천 원을 받아들고 천둥치는 밤거리를 나섰다. 그런데 새벽 1시가 넘도록 아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창 밖에선 여전히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불안해진 엄마와 누나는 우산을 받쳐들고 대문 밖을 나섰다. 아버지를 찾아 동제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비바람 소리만 장례 행렬처럼 응성거릴 뿐 아버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여는 순간. "엄마야!" 누나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 검은 그림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서 온몸으로 사나운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깁스한 팔을 겨우가누며 빗물이 스미는 깨어진 기와 위에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 갈까봐 한 손으로 간신히 우산을 붙들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힘겨운 듯 손잡이를 꽉 붙들고 떨고 계셨다. 그때 누나가 아버지를 부르려고 하자 엄마는 누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만둬라... 아버지가 가엾어도 지금 아버지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저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아버지는 더 슬퍼하실 지도 모르잖아.." 엄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에도 빗물 섞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난을 안겨 주는 것을 아버지는 늘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가난을 힘껏 들어올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지붕이 되려 했던 것이다.

비가 그치고 하얗게 새벽이 올 때까지...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렇듯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도 여러 번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을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실 때도 그랬고, 엄마를 속상하게 하실 때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적,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지붕이 되려했던 아버지 모습은 그날 이후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전부였다. - 필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이웃의 이야기 <연탄길>의 저자다.

아버지의 우산/이철환
-낮은 울타리 2002년 5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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