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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1968 추천수:18 112.168.96.71
2014-11-25 13:25:53
나는 얼마 전 오랫동안 꾸어오던 작은 꿈을 이루었습니다. 서초동의 법원 담장 밑 손바닥만한 땅에 나의 변호사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베니스의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상점처럼 법률 사무소의 입구를 꾸몄습니다. 격자 창 옆에는 하얀 나무 덧창을 붙이고 배가 불룩한 예쁜 철 창틀을 달았습니다. 창을 통해 보이는 한적한 골목길을 바라다보면서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스피커에선 프루트와 피아노의 조화로운 선율이 은은히 나오고 있습니다.

창 밖으로 곧 눈송이가 날릴 것처럼 하늘이 뿌옇습니다. 참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런 따뜻한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14년 전 처음으로 변호사를 시작할 때 너무 두려웠습니다. 매달 임대료와 월급을 준다는 게 엄두가 나질 않아 독립 사무실을 낼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를 겸직하는 의원들은 사무실이 국회와 지구당, 또 자기의 법률사무소에 각각 하나씩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이 안 쓰는 틈을 이용해서 그 사무실을 잠시 빌려 업무를 했습니다.

그 대가로 국회의원의 민원업무를 해주기로 하고 말입니다. 한번은 가물에 콩 나듯 가끔 나를 찾아오는 고객이 있었는데 약속을 한 시간에 공교롭게도 사무실의 주인인 국회의원이 그 자리에 있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고객을 황급히 데리고 빌딩 근처의 지하다방으로 갔습니다. 더러는 상담을 하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명패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데 무슨 변호사냐고, 브로커 아니냐는 욕까지 뒤에서 먹는 적이 있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이는 허술하고 좁은 사무실 하나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법원 뒷골목에 예쁜 상점 같은 내 사무실을 가지면 좋겠다고 기도했었습니다.

변호사의 화려한 상품성은 경력에서 나오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장관, 대법관, 총장, 법원장 등 화려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재벌기업과 외국회사들은 상대하는 거대한 법률회사들이 마천루같이 서울 곳곳에 우뚝 서서 군림했습니다. 나처럼 경력도 능력도 없는 변호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하나님께 열심히 물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돈으로 달라고 투정도 해 봤습니다. 나는 퇴근 전 사무실 불을 끄고 책상위에 양손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돈 때문에 비겁하거나 교활한 꾀를 내는 사람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달 운영비를 걱정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시 잠자던 제자들처럼, 뜻은 있으나 몸은 따라가지 못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느 날 묵상 중에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고난 받으시던 예수님은 교회 벽에 달린 것 같이 구리나 나무가 아닌 뼈와 살로 된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얻어맞아 살이 터져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르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외로운 처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신다고 해도 화려한 성전에 군림하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감옥 안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의 죄인으로 고문당하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 내게 주신 변호사라는 달란트는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좋은 차를 타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내게 주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소명을 위해 주신 방편임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기다리지 않고 어둠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춥지 않은 서울 근처의 교도소에서 몇 달만 더 있게 재판을 끌어달라는 칠순 노인을 보기도 했습니다. 딸을 위해 죄를 범한 가난하고 늙은 엄마의 법정도 지켜봤습니다. 시집에 그 사실이 알려질까봐 못 오는 딸도 또 탈주범 신창원도 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언론에서 그렇게 스타처럼 떠들었지만 막상 무료변호를 하겠다는 변호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나 같은 변호사의 몫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흔히들 변호사를 도둑놈이라고 욕합니다. 나를 비롯해서 잘못도 많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사람을 도둑으로 만듭니다. 요즈음 나는 마음 속으로 법률 노동자임을 자처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일한 시간만큼 정직하게 품삯을 달라는 것입니다. 돈 번 자랑 말고 검소한 걸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길거리 아무데서나 국수 한 그릇 말아 요기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좁은 사무실이지만 벽 가득히 책들을 꽂아놓고 독서하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얼마 전에 내가 읽은 소설 ‘혼불’을 형이 확정된 신창원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걸 다 읽고 다른 재소자에게 넘기라고 써서 부쳤습니다. 너무 좋았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교도소 한 구석에 내가 보낸 책들로 도서관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을 품어봅니다. 하나님은 내게 과분할 정도로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얼마 전 내가 꿈꾸던 예쁜 카페 같은 사무실을 만들었습니다. 땅주인이 금액의 반은 몇 년 후에 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일흔 다섯의 어머니가 사시던 변두리의 허름한 집이 넓은 도로로 편입되면서 많은 액수의 보상금이 나왔던 것입니다. 은행에서 사무실과 그 위에서 내가 살 집 지을 돈을 꾸어 주었습니다. 사무실 위층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 집이 마련되었습니다.

매일 밤 나는 조용한 내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톡톡 치며 흰 모니터와 대화합니다. 감미로운 재즈의 음향이 바닥에 은은히 깔립니다. 포근히 내린 창 밖의 어둠 속에 노란 나트륨 등이 달걀처럼 둥글게 떠 있습니다. 예쁜 창 앞에서 하얀 눈이 펄펄 내리기를 기다립니다. 내가 노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그 분이 주신 소명을 다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봅니다.

엄상익변호사(낮은 울타리2001년 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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