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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의 자세(벧전5:1-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654 추천수:4 220.120.123.244
2019-10-20 09:20:32

직분자의 자세

벧전5:1-4

 

우리 교회는 다음 주에 제 4기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우리 성도님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할 것입니다.

우리는 직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도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의 직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첫째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지 않고 함께 장로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초대 교회의 수장이었고 직위로 보아 장로보다 훨씬 중직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장로들을 권면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의 권위에 의지하여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위치에 있는 동역자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직분을 상대화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료 장로라는 것입니다. 권위 의식보다는 연대의식, 공감 의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직분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여 상대화하여 같은 장로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직분과 자신을 동일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가정에서도 목사이고 회사에서도 목사 의식을 가지면 곤란합니다. 직분은 그 조직과 환경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과거 베드로는 누가 더 크냐라는 다툼을 한 사람입니다. 직분을 권위의식, 특권 의식, 우월의식, 차별의식, 귀족의식 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형제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날 직분에 대한 그릇된 태도는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위에 권찰 위에 서리집사, 서리집사 위에 안수집사, 안수집사 위에 장로, 장로 위에 목사 이런 식으로 계급화시키는 태도입니다.

 

둘째,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증인(마르튀스)이라는 말은 목격자 혹은 증언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확신과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사람으로 그 고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기 위해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또 하나의 그릇된 태도는 직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누구에게 쓰고 있습니까? 1장 1절을 보십시오.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입니다. 왜 흩어졌겠습니까? 네로황제의 핍박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64년 7월 18일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화재로 거대한 도시 로마는 절반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네로는 이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렸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절한 신앙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맹견이나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처형되곤 하였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때로는 짐승의 털가죽을 입혀서 개에게 물려 죽게 했고, 짐승들에게 찢겨 죽게도 했습니다.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써 그들이 인간횃불이 되어 정원을 밝히게도 하였습니다.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것 하나로 잔인한 국가 권력의 박해를 받고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것이 영광스러운 때가 아닙니다. 믿는 것 하나로 죽임을 당할 때 당당하게 십자가의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 이렇게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사람입니다.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고난의 증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증언자 순교자로 살았습니다. 고난의 증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훈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 베드로는 네로에 의해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셋째, 자신을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말씀합니다. 직분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영광에 참여할 자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고난을 참을 수 있는 이유는 영광스런 그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장로들이 얼마나 영광스런 자리에 있습니까?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 4:4)"

직분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직분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보십시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3)"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8)“

구속 사역에 쓰임받는 직분입니다. 신령한 직분입니다. 피값으로 사긴 교회를 치게하는 직분입니다(행20:28).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자들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동참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우리 직분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직분을 감당하여야 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장로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당시 네로의 박해로 흩어져 모인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에는 교회를 이끄는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2절에 보니 양무리를 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치다"라는 말은 "이끌다, 먹이다. 돌보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꼴을 먹이고, 이리로부터 보호하며,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몸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지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지 말고 양무리를 치는 우리 모든 직분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될 줄 압니다. 우리는 모두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목자와 구역장으로, 교사로 가르치기도 하지만 부모로 자녀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질문하시고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처럼 모든 직분은 근본적으로 양육을 위한 직분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훈련시킨 후 그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직분을 제자를 삼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궁극적으로 다 양무리를 치는 자들입니다. 영양분 있는 꼴을 먹이고, 이리와 사자로부터 지켜주어야 합니다.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질병에 걸린 양을 치유시켜 주어야 합니다. 생명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 거짓 교사, 타락한 세상문화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제자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으로 양육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단지 교회 직분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직분을 수행하는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데는 베드로 당시에도 그랬듯이 고난과 유혹이 필수적으로 따라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동기가 억지로 하지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직분자의 자세는 동기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은 하기 싫은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통스럽게, 강제적으로,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인색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기쁜 마음으로가 아니라 의무감이나 어떤 외적 요인들에 의해 마음이 눌려진 상태에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자발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되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인간의 열심도 중요하지만 그 인간의 열심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성령께서 주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인간의 자발적인 열심은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 무리는 결국 내 양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무리입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하나님이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 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직분자들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고리도 후서 5장 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여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양을 치라고 하면서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랑의 동기가 되면 무엇이든 자원하여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목적이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해야 합니다.

목적에 있어 더러운 이득이란 부끄러운 이득, 추한 이득, 수치스런 이득을 말합니다. 혐오스러운 욕심을 가지고 부끄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장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명예를 취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출세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러운 이득 속에는 공명심, 명예심, 허영심, 이기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단들은 더러운 이득을 위해 직분을 사용합니다. 이들은 삯군입니다. 삯군은 양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 도다”(딛 1:11)고 말합니다. 치유해 준다고 돈을 받고 직분을 준다고 돈을 받습니다. 결국 성도들의 물질과 시간 재능을 빼앗아 자신의 이득을 취해 버립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발람이나 게하시, 가룟 유다, 니골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결코 어떤 직분자의 소유물도, 이용물도 아닙니다. 신자를 하나님의 소유로 알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양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기꺼이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합니다. 양을 섬기는 것이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인정과 칭찬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기쁨으로 양 무리를 돌보아야 합니다. 이말은 "헌신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었으니 기쁨으로 헌신적으로 그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방법이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본을 보여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방법에 있어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란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인 행세하고, 텃세를 부리고,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것입니다. 양무리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것입니다. 갑질하는 것입니다. 힘을 합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맡기운 자들이란 뽑힌 자들(신자)을 말합니다.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갑질하면 안됩니다. 이단들이 그렇게 합니다. 주인행세를 하면 안 됩니다. 종부리듯 하면 안 됩니다. 폭군이 되어 권세를 부리면 안 됩니다. 직분자의 영적 권위는 말씀 대로 사는 본을 보이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권위)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13).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가정 생활, 기도생활, 예배생활, 봉사행활, 헌금생활, 전도 생활, 섬김생활 등 모든 부분에 직분자들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의무로 하려면 힘듭니다. 어떻게하면 가능하겠습니까?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예수님을 본받으면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늘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직분을 수행하는 자는 어떤 대가를 받겠습니까?

4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목자장은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목자장이 나타날 때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를 말합니다. 그 때 무엇이 주어집니까?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얻게 됩니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황제가 씌워주던 월계관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경기 우승자는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황제로부터 영광스러운 월계수 면류관을 받는데 그것은 얼마 있으면 시들어 버립니다.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인기도, 부도, 지식도 시간 가면 다 시들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면류관을 영원히 시들이 않습니다. 시들지 않고 영원토록 빛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는 어린양 앞에 장로들이 영광의 관을 쓰고 예수님께 예배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직분을 통해 주시는 면류관은 영원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성경에는 여러 가지 면류관이 나옵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이 나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의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금 면류관이 나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

 

이사야 선지자는 생명의 면류관이 곧 주님 자신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사28:5)”

바울은 우리가 양육한 성도가 곧 면류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20)”

직분자로 억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양육한 성도가,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않고 기꺼이 즐거움으로 양육한 성도가,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고 양무리의 본이되어 양육한 성도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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