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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종이 우산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147 추천수:15 112.168.96.71
2014-11-21 17:46:23
그것은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만든 노란 우산이었다. 아버지는 손잡이 부분을 빙글빙글 돌려 우산을 활짝 펴 주시며 말씀하셨다. '학교에 가다가 키 큰 어른이 같이 쓰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하거라. 키가 너 만한 아이는 같이 써도 좋지만...'
우산을 쓰고 골목길로 나오니, 가겟집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남자 어른이 껑충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가, 나하고 좀 같이 쓰자." "어른하고는 안돼요, 키가 나만한 아이는 괜찮지만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허, 그거 참." 어른은 혀를 차며 도로 추녀 밑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다시 나오며 말했다. "아가, 그럼 내 키를 이렇게 줄이면 되잖아? 이렇게 하면 너하고 똑같으니까..." 어른은 다리를 반쯤 접고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어기적 어기적 걷기 시작했다. 꼭 오리 같았다. "아가, 우산이 무겁지? 자, 내가 들어줄게. 이리 다오" 뒤뚱뒤뚱 몇 발자국을 걷던 그가 멈추어 서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입술 위에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세요" 나는 우산대를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런데 고작 몇 발자국을 같이 걸어가니, 우산이 조금 높아지고 치마에 빗줄기가 들이쳤다. 그리고 또 몇 발자국을 걸어가자 이젠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어른은 어느 새 접었던 다리를 쭉 펴고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키 큰 어른하고 우산을 같이 쓰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른은 우산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나는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뛰어야 했다. 등에 짊어진 책가방 속에서 양철 필통에 부딪치는 연필 소리가 딸각딸각 들렸다.새로 산 예쁜 연필이 곯는 소리가. 물에 젖은 인조견 치마가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어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연신 치마를 떼어 내며 뛰어가노라니 속눈썹에 매달린 빗방울들 사이로 세상이 뽀얗게 보였다.

결국 밤이 되자 감기에 걸려 내 몸은 펄펄 끓어올랐다. '낮에 누구하고 우산을 썼지?' 퇴근하신 아버지가 뜨거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아기 커서 그런 어른 되지 말라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란다." 다독거리며 달래시던 아버지. 그 해 여름에 6,25가 터지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어른하고 우산 쓴 걸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혼자 궁금해하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세월이 20년쯤 흘러가고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부모란 아기의 얼굴만 보아도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 수 있으며, 그 어른을 하나님이 보내신 거라고 한 건 내 어린 가슴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될까봐 그러셨던 것을. 나는 어머니가 신문을 읽다가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시면 무식하다는 말을 예사로 했고, 가난한 친척의 사정 얘기에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귀찮아했으며, 삼류 잡지를 보는 친구를 보면 한심하다고 핀잔을 주었었다.

생각해 보면, 나를 이렇게 공부시켜 준 분은 바로 그 무학이신 어머니였고, 어린 시절 옛정을 뭉클 느끼게 해주는 이들이 바로 그 친구들이었으며, 지금도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찾아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해주는 이가 그 가난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은 깜빡 잊고서.... 옛날 그 비오던 날, 우산을 같이 썼던 그 사람은 정말로 아버지 말씀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게 틀림없나 보다.

노란 종이 우산 / 남 미 영

- '아버지의 보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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